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신나고 힘나는 신앙 (28) - 이유 있는 수난

김레지나 2013. 7. 27. 22:06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28) 이유 있는 수난

죄인들 곁에 둔 거침 없었던 예수의 처신
발행일 : 2013-07-14 [제2854호, 13면]

■ 반대 받는 표적

나는 청년시절 신앙서적을 즐겨 읽었다. 과외공부를 가르쳐서 받은 목돈의 절반 이상을 책 사는 데 할애할 정도였다. 당시는 가톨릭 서적을 취급하는 서원이 드물어서 일부러 한 달에 한번 씩 서울 명동에 있는 성바오로서원까지 가야 했다. 책 한 보따리를 끈에 묶어 들고 대중교통 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심정은 바로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이의 그것이었다.

그때 읽은 것 가운데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쓴 「반대 받는 표적」이라는 책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책은 예언자 시메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향해 발설한 예언을 영적 단상의 발단으로 삼는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여기 이 새번역 성경에서는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당시의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랬기에 책 제목이 「반대 받는 표적」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치하에서 모진 박해를 받았던 자신의 경험을 기저에 깔고서 “왜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아야 하는지”의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예언 말씀에서 발견한다. 즉, 아기 때부터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야 했던 예수님,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며 ‘칼에 꿰찔리는’ 영혼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성모 마리아의 운명은 고스란히 그리스도인의 그것이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왜? 악의 세력이 세상 종말까지 하느님의 구원활동을 방해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기를 원하는 자는 악의 훼방을 각오하라! 복음을 세상 복판에서 선포하려는 자는 박해를 의연히 감내하라! 바로 이런 취지의 글이었다. 교황 바오로 2세의 깊은 영적 묵상에서 나온 이 메시지는 한 청년 신앙인의 마음에 굵은 선으로 각인되어, 오늘도 명료한 가르침이 되어 주고 있다.

■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라는 고백의 의미를 헤아려 볼 차례다. 라틴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다. ‘파수스 수브 폰씨오 필라토 크루치픽수스 모르투우스 에트 세풀투스’(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여기서 ‘파수스’는 ‘수난당함’을 뜻하고, ‘크루치픽수스’는 ‘십자가에 못 박힘’을, ‘모르투우스’는 ‘죽으심’을 그리고 ‘세풀투스’는 ‘묻히심’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특별한 개념을 내포하기보다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간결하게 요약해 주고 있다는 데 더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당시 기득권 세력의 비위를 건드려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니까 세리, 죄인, 창녀와 같은 밑바닥 인생들, 군중들은 좋아했지만,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다. 자기들이 선생이고 교수인데, 인기 강사는 예수님이다. 뒷조사를 해 보니 학벌도 초라한데 말이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잔뜩 심통이 났다. 바리사이도 마찬가지였다. ‘분리된 자’라는 뜻의 바리사이파는 율법과 전통에 충실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과 자신들을 ‘분리하여’ 자신들만의 폐쇄 집단을 이루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더 경건하게 살고 있는데, 엉터리 같은 예수님이 얘기하는 영성이 군중에게 더 먹혀들어가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엄격한 눈에 예수님은 영락없는 풍기문란범이었다. 기성 질서를 깨는 위험인물이었다. 소위 경건하다는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고,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성전에서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분의 행동은 마침내 그들의 눈에 신성모독 죄로만 보였다.

여기에 또 사두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녹을 먹고 있던, 일종의 종교 공무원이다. 사제의 직분을 맡고 있는 사두가이는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전통에 없는 새로운 요소로 여겨 배격했으며, 상벌은 현세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로마에 협력하면서 현상 유지에 애쓰는 우익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슬슬 비위가 상하기 시작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난 체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성전에서 잡상인들을 몰아낸 것은 엄연히 영역침범이었다. 그곳에서는 사두가이가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떡하니 나서서 성전 잡상인들을 내쫓고 상 뒤엎고 하는 꼴이란 실로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분개한 나머지 다른 기득권층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제거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수난을 받게 된 결정적 원인이었다.

■ 거침없는 예수

그러니까 예수님의 반대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결국 밑바닥 인생들이었던 셈이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이 워낙 전통의 금기를 깬 것이었기에 저들의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었다. 시쳇말로 거침이 없으셨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분의 처신은 늘 자유롭기만 하였다. 가난하고 평범한 무학자들을 제자들로 부르고 함께 지냈으며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어울렸다. 그분은 죄인들을 더 좋아하시고 더 가까이하셨다(마태 9,9-13 참조).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렇게 비난하였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왜 ‘먹보’인가? 걸핏하면 “우리 같이 먹자” 하시며 함께 회식을 해대고 먹어댔으니 그렇다. 예수님이 먹는 문제를 굉장히 챙겨주신 것이다. 이것 역시 감동이다. 예수님은 우리 먹거리 문화를 우습게보지 않으셨다. 생필품, 생계유지. 이런 것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신 분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예수님이 경제에 관심 많으시고, 밝으시고 했다는 얘기다. 왜? 당신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술꾼’은 또 무슨 말인가? 예수님도 기분을 낼 줄 아셨다. 여기서 얘기하는 술꾼은 반주 문화 속에서의 술꾼이다. 음료수 대신 포도주를 곁들이셨다는 얘기다. 그러니 너무 술을 혐오하는 것도 제대로 된 영성은 아니다. 물론 너무 술을 탐닉하는 것도 문제고. 하여간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술을 즐기셨다.

그 다음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는 말씀. 여기서 얘기하는 ‘세리’는 우리로 치면 일제 강점기 일본 앞잡이들이다. 세리는 말하자면 매국노들이다. 예수님이 세리들하고 어울렸다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처신을 하셨음을 뜻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돌멩이 맞는 집단의 친구셨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죄인들’에서 ‘죄인’은 종교적인 백성인 유다인들의 사회문화적인 용어로, 천륜과 인륜을 거슬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이 예수님은 과격할 정도로 밑바닥 인생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셨다. 이러니까 윗선으로부터 미움을 사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기득권층의 분노는 ‘저자’라는 단어에서 극명하게 노출된다. 거의 ‘저놈’, ‘저자식’의 수위에 해당하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적개심은 차오르고 있었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