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들은 밀떡과 포도주 안에 주님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실제로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은 성체와 성혈 안에 그리스도가 오직 상징으로만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체와 성혈 안에 예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체와 성혈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 현존의 실제성을 몇 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거부합니다.
첫째로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느낌이 그 하나입니다. 그래서“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고린토 후서 5장 7절)와 같은 성서 귀절이 이런 논쟁에 편을 들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둘째로는 우상 숭배에 대한 우려가 개신교 신자들의 정서를 가로막습니다. 바른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밀떡을 숭배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경스러운 말입니까?
이러한 감상이 로마서 1절 25절,“사람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겼습니다.”라는 귀절로 더더욱 뒷받침 되었습니다.
셋째로, 개신교 신자들이 일상 걸려 넘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필이면 왜 빵과 포도주에만 더더욱 특별히 현존하시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개신교 신자들은 우리 전례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톨릭이 기적의 종교이며 그리스도는 전례를 통하여 반복적 육화를 거듭하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이 복합되어서 성찬을 하느님 체험으로 여기는 것도 싫어하고 성체와 성혈을 통하여 인생을 정말로 변화시키는 힘을 주신다는 것도 파렴치하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신앙은 성체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믿음에 증거를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장 21절에서 아담은 자신의 살과 피를 바쳐서 아내를 얻습니다. 이브는 아담의 살붙이가 됩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 21-21절.“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과 아담의 죄는 그 효과에 있어서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은총의 경우에는 죄지은 많은 사람이 은총을 거저 입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의 경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거저 얻은 사람들이 생명의 나라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만약 제 1의 아담이 그의 살과 피를 바쳐서 아내를 얻었다면 구약을 초월하는 신앙을 위하여 제2의 아담은 같은 특전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 19장 33-34절에서 그리스도는 옆구리가 로마 군사의 창에 찔리는데 성찬의 상징으로 피가 흘러내립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살과 피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문맥으로 보아 아담은 그리스도가 그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살과 피를 나누는 그 이상으로 더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됩니다. 만약 아담이 그의 신부에게 살과 피를 주었다면 신약에 있어서도 동일한 것이 발생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기억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 타락은 먹음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은 것 역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요한 복음 6장은 성찬의 전례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참으로 중요한 복음입니다. 성체성사에 대한 가톨릭의 신앙을 증거하고 확고히 해 주는 영적 증거의 귀절들로 풍성히 채워져 있습니다. 요한 복음 6장 전반에 걸쳐 예수님은 반복적으로‘아멘’,‘아멘’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거룩한 맹세를 하십니다. 그것이 계약을 맹서하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의 법률에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경우에 두 사람이‘아멘’이라고 증언하지 않는 한, 사형이 집행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결정적인 메시지를 주시고자 할 때 두 번 반복하십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41장 1-7절.“그로부터 세월이 이 년이나 흐른 뒤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 그는 나일 강 가에 서 있었다. 난데없이 살이 찌고 잘생긴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나와 갈대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곧 이어 여위고 볼품없는 암소 일곱 마리가 뒤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그 여위고 볼품없는 소들은 강가에 먼저 나와 있는 소들 곁으로 가는가 했더니, 이내 그 살이 찌고 잘생긴 소들을 잡아먹었다. 그러는데 파라오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잠이 들어 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줄기 하나에서 일곱 이삭이 나와 토실토실 여물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뒤이어 돋아난 일곱 이삭은 샛바람에 말라 여물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마른 이삭이 토실토실하게 잘 여문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는데 파라오는 잠에서 깨어나 그것이 꿈인 줄 알게 되었다.”
창세기 41장 22절.“다시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줄기 하나에서 이삭 일곱이 돋아나 토실토실 여물어갔다.”
창세기 41장 25절.“"폐하의 꿈은 결국 같은 내용입니다. 앞으로 될 일을 하느님께서 폐하께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고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하였다.”
파라오의 두 가지 꿈이 다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그의 메시지를 두 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근으로 국가가 생사의 기로에 서는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6장에서 자신을‘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그 말씀은 자기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의미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6장 51절.“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서귀절을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그 말씀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요한 6장 63절.“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성서에는‘영적인’이라는 말씀이‘상징적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습니다.‘영적인’이란 말은‘물질적인’이란 말과 동일하게 실질적인 의미입니다.
위의 귀절에서 예수님은 자연인이나 혹은 육적인 인간, 그리고 믿음으로 가득찬 영적인 인간을, 대조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이성과 지각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믿으려하지 않는 육적인 사람을 거론할 때에는 성찬의 살을 말씀하시면서 반드시‘나의 살’이라고 말씀하시어 주님의 살과 인간의 육체를 구분하십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문’,‘포도주’,‘바위’,그리고‘생명의 빵’등으로 비유하신 은유를 발견합니다.
카이트 그린은 자주“여러분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이 진짜로 바위요 진짜로 문이요 참으로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셔야 옳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예수님이므로 그분을‘문과 같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같습니다. 바오로가 말씀하시듯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만 하느님의 자녀임을 주장하며 악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위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은 그분 안에서, 그분 말씀 안에서만, 하느님 성부와의 관계가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살이 어떻게 한 조각의 빵과 같습니까? 어떻게 빵이 예수님의 몸과 같습니까? 조금도 같아 보이지 않는데요. 자연적인 겉모양으로 보아서는 유사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요. 유사성이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 친구 마이크 훌러는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비유로 시작되는데 6절에서는 이 비유를 유대인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7-8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나는 문이다.’,‘나는 착한 목자다.’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시대에는 선량한 유대인이면 누구나 다 알아듣던 은유입니다. 예수님이 표현하신, 양을 보살피던 방법은, 지금도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마을의 양들도 모두 공동 축사에 몰아넣고 그 법적인 소유주가 문 앞에 나타나 소리 내어 부르면 자기의 양들이 나옵니다. 진짜로 그의 양들만이 주인을 따라 나옵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은 민수기 27장 16-17절에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목자 즉 지도자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예수님이 무언가를 가르치시고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적용하지 못할 때 대중들에게건 제자들에게건 아주 상세하게 공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예를 들면 마태오복음 13장 1-9절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과 씨앗의 비유는 18-23절에서 설명하십니다. 또 밀 가운데 자란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 24-30절에 제시하시고 36절에서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설명하시는 데가 없습니다. 그의 제자가 의심을 보이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요한 6장 61절)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요 인간의 아들인 예수님은 아무 비유적인 설명도 안 하시고 침묵하십니다.
알아 두십시요. 아랍어로는‘고기를 먹는다’라든가‘피를 마신다’라는 말은‘핍박하다’,‘도살하다’,‘학살하다’를 의미합니다.
시편 27장 2절.“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한 무리들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
미가서 3장 3절.“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냄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
사무엘 후서 23장 15-17절.“하루는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 물이 생각나서 그 물을 길어다 줄 사람이 없겠느냐고 하자, 이 세 용사가 불레셋 진을 뚫고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야훼께 부어드리며, "이 물을 마셨다가는 야훼께 벌을 받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갔다 온 이 사람들의 피나 다름없는 물을 내가 어찌 마시랴!" 하고는 끝내 마시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세 용사가 한 일들이었다.”
묵시록 17장 6절.“그리고 내가 보니 그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의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여자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16절.“그리고 네가 본 열 뿔과 그 짐승은 그 탕녀를 미워하여 벌거벗기고 처참한 지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리고는 그 탕녀의 살을 뜯어먹고 마침내 그 탕녀를 불살라 버릴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셔야 할 것입니다.“누구든지 나를 학대하고 도살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으리라”고요.
얼마나 부조리한 말입니까? 구약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과월절의 양고기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2-13절.“그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전국에 있는 맏이들을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조리 치리라. 또 이집트의 신들도 모조리 심판하리라. 나는 야훼다. 집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이 너희가 있는 집이라는 표가 되리라. 나는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를 보고 너희를 쳐죽이지 않고 넘어가겠다. 너희가 재앙을 피하여 살리라.”
신약에 있어서 예수님은 과월절 양의 완성입니다. 세례자 요한은“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라고(요한 1장 36절) 예수님의 이름을 과월절의 양으로 부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피를 간청하기는 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보다 오히려 해석하기로 결정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 보십시요.
출애굽기 12장 3-11절.“너희는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알려라. 이 달 십일에 사람마다 한 가문에 한 마리씩,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마련해 놓아라. 만일 식구가 적어 새끼 양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을 생각하여 옆집에서 그만큼 사람을 불러다가 먹도록 하여라. 흠이 없는 일 년 된 수컷이면 양이든 염소든 상관없다.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십사일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서 해 질 무렵에 잡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피를 받아, 그것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하여라. 그 날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도록 하는데,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도 반드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도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살라버려야 한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나 야훼에게 드리는 과월절이다.”
만약 유대인이 이렇게 대답하면 어땠을까요.“저는 양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피를 짜서 문설주에 바르고 양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양대신 먹으려 합니다. 하느님은 양대신 과자를 먹어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느님은 아주 분명하십니다. 안 먹은 사람은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주 분명합십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 6장 53절.“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고린토 전서 5장 8절.“그러므로 우리는 사악과 음행이라는 묵은 누룩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내지 말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냅시다.”
신약에서 과월절을 지내는 방법은 양을 먹는 것이고 그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그 양을 먹지 않으니까 그 과월절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토 전서 10장 10-17절에서 바오로는 제대 위의 성찬을 모독하는 무리에 대하여 꾸짖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나무랍니다. 만약 가톨릭의 성찬 전례가 잘못이고 예수님이 진정 제대에 현존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버팀목은 아주 높습니다. 우리 둘 중 하나는 크게 축복을 받고 또 한편은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청중들인 고린토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여기에서,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이스라엘을,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이교도들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성체를 모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희생제물인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루가 복음 22장 19절,“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를 읽으면, 그들은 그 말씀이 마치 손가락을 줄로 묶고 예수님이 진짜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환기하라 하시는 것과 같다고 믿습니다. 마크 쉬아는 말합니다.“희랍어로‘아남네시스’는 영어의‘리멤버런스’와 같고‘리멤버런스’는‘기억하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실현하라’를 또한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가령 내가 오늘이 나의 10살 되는 생일날이고 또 나는 오늘 도서관에 책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을 때, 후자는 과거 회상이 아니라 실제적 현실에 주목한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의 주님은 실제적 현존 여부를 갈등하지 말고 현존을 오히려 강화 확인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본것처럼, 비록 예수님의 수난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수난의 실제는 영원히 우리들의 일치 참여를 위해 지속되는 것입니다.
죤 하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미사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직접 자신을 영원한 사제로 봉헌하는 것이며 그의 봉헌은 심리적인 기억이 아니라 신비적인 실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사가 주님 부활의 기념이라고 말할 때 이 역시 단순한 정신적 회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지금 제대에 으뜸의 사제요 구세주로 부활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활은 한 번 전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구세사에서 지속되는 오늘의 사건입니다. 미사를 부활의 기념이라고 회상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빨리 스쳐 지나가는 유쾌한 기억의 이어진 사진들과 같은겁니다. 그러므로 미사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직접 부활하시고 현존하시고 우리들 한 복판에 계시고 우리들과 하나가 되어 부활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고 지금도 죽으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첫번째 성찬 이야기는 빵과 포도주를 그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시는 힘을 증거해주십니다.
마르코 14장 22-26절.“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시자 그들은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다.”
창세기 1장의 창조사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말씀은 의견 제시가 아니라 명령이셨습니다. 같은 차원으로 그리스도는 빵을 드시어“이는 내 몸이다.”하시자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이 일을 하실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0-11절.“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원로들과 죤 칼빈
묵시록 5장 6절.“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 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느님께서 온 땅에 보내신 일곱 영신이십니다.”
위의 구절은 그리스도가 과월절의 양으로서 하느님 성부 앞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영원한 제물이신 어린양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번 죽으셨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미사가 봉헌될 때마다 그리스도가 지속적으로 희생되신다고 가르치는 우리 가톨릭을 공박합니다.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그는 한 번 죽으셨지만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교회의 원로들은 최후의 만찬을 갈바리의 수난과 연결시켰습니다.“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은 그 순가”부터가 아니라“제자들을 위하여 예수가 그의 몸을 쪼개어 나누어 준”순간부터 사흘 동안을 계산하였다.
이레네우스는 말했습니다.“그는 빵을 들어 감사하고 말씀하셨습니다.‘이는 내 몸이니라’. 잔도 들어 그의 피라 하셨습니다. 그는 새로운 계약의 새 희생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언자 중의 한 분이신 마라기가 전에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내 뜻대로 마시고’라고 전능하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너희의 손에서 희생을 받지 않으리라. 태양이 뜨는 순간에서 지는 순간까지 내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영광을 받을 것이며, 어디에서나 향연, 순결한 희생제물이 나에게 봉헌될 것이다.’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그는 전의 사람들이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하던 것을 그만 두게 되었음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나 제물, 참으로 순수한 제물이 그에게 봉헌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씨프리안은 말했습니다.“만약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하느님이신 주님이 아버지 하느님의 가장 드높은 사제이시라면, 그리고 그가 자신을 하느님 성부께 봉헌하셨다면, 그리고 이 일이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영원히 행하여지도록 명령하셨다면, 예수님이 하신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제들은 정녕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씨리안의 원로들은 그리스도 행위의 실제성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순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몸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던 순간부터 사흘 동안을 죽음의 순간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한 번 죽으셨으나 우리 모두를 위하여’죽으신 예수님의 당대 사람이 되었습니다. 칸타레메사 신부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과월절을 기념할 때에는 성찬의 의미와 동일한 생각을 했었다고 말합니다.“과월절의 예식에서 예수 당대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세대가 그날 밤 에집트로부터 빠져나온 것처럼 서로를 보도록 하여라.”
나는 흑인 영가를 들을 때마다“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던 때 너 거기에 있었나?”를 들으며 내 가슴으로 대답합니다.“그래요. 제가 거기 있엇습니다.”
1세기 때부터 초대교회는 성찬에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 왔습니다.
원로들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요 순교자인 안티오크의 이냐시오 성인(기원후 110년)은 그의 믿음을 대변하는 글들을 많이 썼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영성체와 기도를 안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체가 구세주 그리스도의 살이라고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조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고 그리하여 전선하신 아버지 성부께서 다시 일으켜 부활시키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의 성체 신심을 이렇게 강조하여 써 보냅니다.
“나는 하느님의 빵을 갈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나는 주님의 피를 원합니다. 썩지 않는 사랑입니다.”
치명자 성 져스틴은 기원 후 150년 경에 로마의 통치자에게 써 보낸 그의 첫번째 호교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음식을 성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빵이나 보통 포도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육화되시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살과 피를 갖추셨으며 성찬의 기도에 의하여 그리고 하느님에 의하여 성체가 되시어 오시매, 그의 변화에 의하여 우리의 살과 피가 양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살과 피는 육화된 예수님이십니다.”
리용의 주교이시고 사도 요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성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네우스 성인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예수는 피조물인 컵을 들어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고 거기로부터 피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인 빵을 들어 그의 몸이라고 선언하셨는데 그 몸이 한없이 증가하여 우리의 몸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성 시릴은 기원 후 350년 경부터 끊임 없이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인께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천명하시었으니 단순히 빵과 포도주라고 생각하지 마라. 감각은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믿음은 굳게 하라. 맛으로 판단하지 마라. 믿음으로 굳게 확신하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지니는 가치를 빈약하게 하는 의심을 갖지 마라.”
죤 칼빈은 마지막 만찬에 관한 그의 짧은 논설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진리와 본질에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이유로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재현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존하시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성서가 어떻게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증거하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희생양이시고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미사때마다 제대 위의 성체 성사에 진정으로 현존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성체 성사 안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 가톨릭은 왜 좋은가? / 필립 스코트 신부 지음 / 우진출판사
[출처] <가톨릭은 왜 좋은가> 성체가 예수님의 상징이라고요? ②|작성자 바다의 별
'밭에 묻힌 보물 > 신앙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3) 은총으로 하느님과 합일 체험하는 ‘신비생활’ (0) | 2013.06.23 |
---|---|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 이해 (0) | 2013.02.20 |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및 신앙의 해 교구장 사목교서 (0) | 2012.10.07 |
영화 사랑의 침묵 - 갈멜 수녀원 다큐 (0) | 2012.09.22 |
천주교회의 교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까 (0) | 2012.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