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기억할 글

고해성사를 꼭 봐야 하나요? - 홍성남 신부님

김레지나 2012. 8. 24. 20:08

평화신문 2012년 8월 5일, 19일자에서 옮김

심리학자이신 홍성남 신부님께서 고해성사에 대해 한 말씀 하셨네요.^^

 

아! 어쩌나?] (162) Q. 고해성사를 꼭 보아야 하나요?

Q. 고해성사를 꼭 보아야 하나요?

저는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신자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천주교에 대해 잘 모르고, 모든 것이 낯선 느낌입니다. 특히 고해성사는 제게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신부님이 제 목소리를 알까 봐 걱정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다른 친구들 말에 의하면 본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신부님이 거의 목소리를 안다고 합니다. 또 일전에는 저희 본당이 아닌 곳에서 성사를 봤는데 성사를 주는 신부님이 얼마나 야단을 치시던지 혼쭐이 나서 그 이후 거의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미사 때 영성체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성경에서 주님 말씀으로 생긴 것은 알지만 이렇게 불편함을 주는 성사를 그래도 봐야 하는지 늘 의문입니다.
 
 A. 우리 교회가 가진 고유한 특성을 들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고해성사는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신자들 영성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사이나 신자들이 가장 꺼리고 해프닝도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고해성사를 없애자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고해성사는 신자들 정신건강에 상당히 좋은 치유 효과가 있기에 그렇게 함부로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해성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알려면 '죄책감'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책감이란 무엇인가요? 사회가 설정해놓은 도덕적 기준에 자신의 행동이 어긋난다고 판단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교도소에 수용된 죄수 중 일부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 정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루 평균 2시간 동안 죄책감을 느끼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인의 경우에는 일반인보다 죄책감의 정도가 더 강합니다. 사회ㆍ도덕적 기준이 아닌 양심법에 의한 죄책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또 수도자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더 강한 죄책감을 갖고 삽니다. 사회ㆍ도덕적 기준보다 훨씬 더 놓은 영성적 기준에 의한 죄책감을 가지고 수도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갖는 죄책감은 불편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긍정적 기능을 갖기에 사람과 사람이 함께 안전하게 살려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지나친 죄책감이 갖는 문제는 우선 건강을 해치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개 건강관리를 하지 않고 무의식적 자기 처벌을 습관적으로 해서 신체 면역체계가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질병, 그중에서도 특히 심장질환에 잘 걸린다고 합니다. 또 우울증에 잘 걸려서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미국 사례를 살펴보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온 군인들 중에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걸려 자살기도를 한 이들이 적잖이 많았다고 합니다. 죄책감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는 사례인 것입니다.

 두 번째 부작용은 현재가 아닌 과거 안에서 사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입니다.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하는 지금의 문제가 과거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과거 속에서 여전히 자신을 질책하며 살기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가 돼버립니다. 죄책감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변명하면서 죄책감 속으로 도피하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따라서 심한 죄책감은 덜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죄책감은 수치심과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정직한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책감은 일단 표현하고 나면 그 감정의 정도가 약해져 괴로움을 덜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슨 이야기를 털어놔도 좋은 우리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신자들 정신 건강 유지에 크게 이바지하는 성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고해성사가 그런 기능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해소가 마음 안에 쌓인 것을 털어놓고 죄책감을 덜어내는 치료적 장소가 아니라, 사제가 재판관이고 고백하는 신자들이 죄인이고 보속이 죄에 대한 형량처럼 여겨질 때 고해소는 치료소가 아니라 재판소가 돼서 고해하는 신자들 죄책감을 덜어주기는커녕 더 강화시켜 병적 죄책감을 만들기에 치료적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죄책감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형제님도 좋은 고해신부님을 만나셔서 고해성사가 주는 은총과 치료 효과를 맛보시면, 고해성사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아! 어쩌나?] (164) Q. 작은 죄도 고해성사를 꼭 봐야 하나요?

Q. 작은 죄도 고해성사를 꼭 봐야 하나요?

저는 신앙생활을 한 지 10년이 넘은 신자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자주 고해성사를 봤는데, 때로는 이런 것도 고백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자주 고해소에 들락거리는 것 같아 때론 본당신부님 뵙기가 부끄럽기조차 합니다.

 그렇다고 고해성사를 안 보면 왠지 찜찜한 마음이 들고요. 큰 죄를 짓고 살지는 않는데도 생기는 이런 작은 죄책감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본당신부님은 그런 것까지 고해성사를 보면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시던데요.
 
 A. 사람이 살다 보면 왠지 마음에 찜찜한 것들이 생깁니다. 고해성사를 볼 정도로 큰 것은 아닌데 그냥 넘어가기에는 꺼림칙한 것들, 생선을 먹다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을 주는 것들, 이런 것들을 일컬어 '작은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분들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그냥 넘어가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사람 나름이고 현실에서는 심리적 괴로움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죄책감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다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손바닥에 박힌 가시처럼 방치하면 불편함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곪아서 큰 상처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책감을 다루는 첫 번째 방법은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털어놓는다는 것은 심리치료에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큰 죄책감이건 작은 것이건 간에 가슴에 끌어안고 쌓아두면 마치 썩어가는 쓰레기처럼 돼 결국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따라서 일정 기간이 되면 청소차가 와서 쓰레기 수거하듯 털어놓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 입이 무거운 친구라야 합니다. 그런 친구가 없으면 상담가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자렌(Zarren and Eimer)의 '자동칠판기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과거 기억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당치 못한 부적절한 기억을 삭제함으로써 현재 삶에 부담이 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눈을 감고 칠판을 상상하고 거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죄책감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말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적은 것부터 차례로 지웁니다. 이 작업은 심리적 노폐물들을 처리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심리적 안정감과 균형을 찾게 해줍니다.

 세 번째 방법은 과거 어두운 기억을 몰아내기 위해 현재의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만족감과 행복감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 그것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작은 죄책감이 주는 불편함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손바닥에 가시가 박힌 아이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레 가시가 빠져나가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네 번째 방법은 보상행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 가슴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춥고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마음 아픈 기억을 가지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특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부모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때 잘해드릴 걸 그랬어'하는 후회와 자책감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이런 때는 그분들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좋습니다. 자선행위는 사람들에게 만족감과 행복감을 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분들에게 보상을 해 드린다는 보상감도 있어서 작은 죄책감을 덜기에 최상의 방법입니다.

 다섯 번째 방법은 기도해 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미사를 해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살아계신 분이나 돌아가신 분들이나 미사를 해 드리면 마음 안의 불편한 죄책감이 덜어지고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돌봐 주실 것이라는 심리적 편안함이 생깁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작은 죄책감을 갖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단지 그런 죄책감이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따라다닐 때는 어느 정도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도 여전히 작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은 인간관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지나치게 완전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 중에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이분들은 완전함과 온전함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 사람임을,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임을, 그리고 사람은 실패와 실수를 통해 성숙해가는 존재이지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의식을 갖지 못하면 작은 죄책감에 시달려 일상생활을 활력 있게 살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분들은 기도 할 때도 약한 자의 기도, 자신의 허물
을 드러내는 기도를 해야 죄책감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