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신앙 자료

聖 노르베르토

김레지나 2012. 6. 6. 08:01

월6일(수) 음4/17

聖 노르베르토


 


노르베르토(6.6)
성인명 노르베르토(Norbert)
축일 6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설립자
활동지역 마그데부르크(Magdeburg)
활동연도 1080-1134년
같은이름 노르베르또, 노르베르뚜스, 노르베르투스, 노르베르트, 놀베르토,
놀베르트, 볼베르투스


 

마그데부르크의 성 노르베르토(Norbertus)
 

독일 산튼(Xante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노르베르토)
하인리히 5세 황제의 궁전에서 하사품을 관리하는 차부제로 지내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식에 참석하고자 말을 타고 가다가 번개를 맞아 땅에 떨어졌다.
얼마 후 의식이 회복되자 방탕했던 지난 생활에 대해 깊이 통회하며
"주님,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옛날의 사도 바오로(Paulus)처럼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그는 쾰른 근처 지그부르크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결국 주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쾰른 시로 나와 사제 서품을 준비하고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으나
환영받지 못하였다.

그는 과거의 죄의 보속으로 이러한 모욕과 냉대를 참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후 그는 주임 사제직을 사임하고 소유물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보속의 길을 떠났다.
그가 북부 프랑스를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큰 효과를 내게 되어
그는 매우 유명한 설교가로 변신하였다.
이윽고 포세스(Fosses)의 성 후고(Hugo, 2월 10일)가 동반자가 됨으로써
그의 능력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1120년 1월 25일 그는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레몽트레(Premontre)에서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수효는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프레몽트레 수도회'이다.
그는 생전에 8개의 대수도원과 2곳의 수도원을 세웠고,
교황 호노리우스 2세(Honorius II)로부터 1125년에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테오발드(Theobald) 백작이 입회를 요청하자 그는 입회를 거절하고
세상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제3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에 갔다가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굴복하여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하였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할 일들이 태산 같았다.
그가 임지에 갔을 때 주교관의 문지기는 그의 너무나 남루한 모습을 보고
거지로 착각하여 주교관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새 주교와 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 이들도 많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하며 심지어 그를 처치해 버리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덕행과 온화하고 용맹한 마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였다.
1132년 그는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다가
중병에 걸려 4개월 간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그 후 교구로 돌아와 2년 간 직무를 수행하다가 1134년 54세로 선종하였다.
그는 캉브레(Cambrai)에서 이단과 싸우는
친구 성 발트만(Waltman, 4월 11일)을 도와주었으며,
성체 현존에 관한 이단을 배격하는데 공로가 컸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672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전세계 교회에서
그의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