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4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1542-1591) 기념일
이사45,6ㄴ-8.18.21ㅁ-25 루카7,18ㄴ-23
하느님 체험
성경의 예언자들은
대부분 신비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하면
저절로 예언자이자 신비가가 시인이 될 수뿐이 없습니다.
이런 예언자들에게
자연은 모두가 하느님을 만나는 ‘하느님의 성사(聖事)’가 됩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이웃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서 체험하는 하느님이요,
이런 체험을 통한 시적 감수성의
회복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자연을 통한 시적
감수성의 회복이 , 하느님 체험이
정서를 순화하고 정신생활을 풍요롭게 합니다.
오늘 날 온갖
정신질환들은
바로 자연을 떠나 자초한 재앙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이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
꼭 친구인 자연과
대화하는 듯합니다.
시편의 많은 찬미가 역시 자연 만물과 친구 되어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초대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또한
‘태양의 노래’에서 모든 피조물을 형제라 하며 함께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러니 영육의 치유와
구원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약도 없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다.”
신비가인 예언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하느님이 만드신
살만한 세상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성사’인 세상 만물이요
이런 만물을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빛을 만드신 이도,
어둠을 만드신 이도 하느님이요,
행복을 주는 이도 불행을 일으키는 이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떠나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멀리 밖에 있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삶의 현장에 계십니다.
행복한 현장만이 아니
불행의 현장에도,
희망의 현장만이 아닌 절망의 현장에도,
빛의 현장만이 아니 어둠의 현장에도 계십니다.
불행도, 절망도, 어둠도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절망은
없다는 말입니다.
어디에나 하느님은 계시며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서 겪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주님께 돌아 와
구원을 받으라는 주님의 간곡한 초대입니다.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없다.
땅 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 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치유와 구원의 길은 단
하나 주님께 돌아가는 길뿐이요
우리 역시 치유의 구원을 받기 위해 매일 미사를 통해 주님께 돌아옵니다.
밖으로 주님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눈 만 열리면 지금 여기서 만나는 구원의 주님이요
활짝 열려있는 하늘 길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만난 주님을
우리는 은총의 대림시기를 통해, 교회의 성사를 통해,
특히 성체성사 중에 만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주님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온갖 치유와 구원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한 번의 창조가 아니라
지금도 말씀을 통해 끊임없는 창조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오,
매일의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체험함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치유, 구원하시고 시적 감수성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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