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영진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헤로데와 다윗의 차이

김레지나 2011. 8. 30. 15:30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2011. 8. 29. 월)(마르 6,17-29)

 

<예언자>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결혼 문제를 비판하다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이 너무 오지랖이 넓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종교인들이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하면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예언자의 임무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9).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할 수밖에 없도록 ‘말씀’이 자기 안에서 불처럼 타오르기 때문에 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지랖이 넓어서 헤로데의 사생활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헤로데에게 전한 것입니다.

 

헤로데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회개 대신에 예언자의 입을 막아버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자기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음을 당한 예언자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고,

예언자를 죽인 살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으니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뭔가를 비판하고 꾸짖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하고 있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는 말씀일 때도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일곱 교회에 전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들 중에는 칭찬도 있고, 격려도 있고, 꾸중도 있습니다.

 

어떻든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하느님에게 혼날 짓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혼날 짓을 했으니 혼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윗이 간통죄를 지었을 때,

나탄 예언자가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2사무 12,7-10).”

 

그때 다윗은 즉시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사실 다윗의 죄나 헤로데의 죄는 거의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꾸짖으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회개를 했고, 헤로데는 예언자를 죽였습니다.

(그 후에 헤로데 왕실은 몰락하고 멸망했습니다.

다윗은 혹독한 보속을 해야만 했지만 어떻든 용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계속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하면 살겠지만,

듣기 싫다고 자기의 귀를 막고 예언자의 입을 막아버리면

헤로데가 간 몰락과 멸망의 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경고가 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