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이수철 신부님

참 만남의 욕구

김레지나 2011. 8. 28. 12:28

2011.8.24 수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 묵21,9ㄴ-14 요한1,45-51

 

 

 

 

 

참 만남의 욕구

 

 

 

새벽 성무일도 독서 중, 사도 바오로의 다음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우리가 받는 박해를 참아내고 비방을 받을 때는 좋은 말로 대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1코린4,12-13).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살아가는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사도 바오로 일행의 이런 여유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들 안에 숨겨진 보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면

바오로 일행의 삶은 참으로 불쌍하고 희망 없는 삶일 것이고

외관상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이는 우리 수도승의 삶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예전 대구 앞산 밑의 신학교 시절에 재미있게 관찰한 사실이 생각납니다.

신학생들 중, 주일날 외출 시 앞산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구 시내의 사람들을 찾아 간다는 것이며

반면 시내 사람들은 끊임없이 앞산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산이 있는 시골 사람들은 도시를 동경해 도시의 사람들을 찾고

도시의 사람들은 자연을 동경해 시골의 산을 찾습니다.

 

자연 안에서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람들 속에서는 자연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나 사람을 찾는 사람들은

우리의 근원적 만남의 욕구를 반영합니다.

‘그립다’ ‘보고 싶다’라는 말마디는 모두 만남의 욕구를 표현합니다.

하여 끊임없이 자연을 찾고 사람을 찾습니다.

 

어제 인공미의 극치를 이룬 대형 서점을 방문했습니다.

현실세계 같지 않을 정도로 내부 환경이 참 장관이었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하지만 뭔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서적들을 통해

인간의 관심사와 그 전공분야의 다양함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천차만별 다르고 깊이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사람들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결코 자연과의 만남도, 사람들과의 만남도

내적 공허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자아초월의 욕구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참 행복은, 참 자유는, 참 기쁨은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자아초월에 있습니다.

 

자연을 통해, 사람을 통해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내적 충만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 요한과 나타나엘은 우리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끊임없이 주님과의 만남을 찾았던 분들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찾을 때 만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나를 알고 주님을 알아 내적 충만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찾았던 나타나엘은

도반인 필립보의 안내로 주님을 만났을 참 나를 발견했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짓이 없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 묵상에 항구한 결과 마음 순수해 졌을 때,

때가 되자 주님을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주님과 은총의 만남으로 참 나를 발견한 나타나엘은

즉시 주님을 알아보고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체험으로 참 나를 알고 주님을 알 때

바로 이게 참 만남의 구원체험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면서 거짓 없는 순수한 참 나를 만납니다.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참 나를 만날 때 만남의 완성이요 충만한 삶입니다.

이어 주님은 나타나엘에게 더 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마치 야곱이 꿈 중에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듯이

우리 역시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바로 주님이 현존하시는 지금 여기가 활짝 열린 하늘 문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소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사도 요한 역시 하느님의 특별 은총으로 성령에 사로잡혀

오매불망 그리던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체험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새 예루살렘 도성은

바로 완성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앞당겨 체험하는 우리를

당신 몸인 하늘의 빵 성체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