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증거자 성령님

김레지나 2010. 5. 15. 22:10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6주간 월요일 - 증거자 성령님

 

 

 

미국에서 어떤 신부님께 함께 공부하시던 스님 두 분이 성경을 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종교의 편협한 시각을 넘어선 그 스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성경 두 권 스님들에게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뒤 성경을 읽고 계시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스님들은 성경을 몇 장 읽지 못하고 포기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만들고, 형제끼리 죽이고, 가족끼리 서로 속이고, 이스라엘 아닌 다른 민족들을 마구 죽이는 하느님을 접하고는 그런 허황되고 불공평하고 자비롭지 못한 하느님을 자신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정말이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 내려가면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거룩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며 수백 년간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은 어쩌면 잔인하고 자신의 백성만 알고 질투심이 강하고 무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도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허황된 이야기들이 거룩한 말씀이 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은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글을 쓰는 이들을 통해 진리가 그 안에 기록되도록 감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보통 책이 아니라 ‘거룩한 책’이 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성령님의 감도로 ‘하느님의 말씀’이 되었다면,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자 예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주보성인인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글이 성령님의 중재로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교회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계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둘 사이에 있어야 둘이 한 몸이 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몸은, 육체와 영과 영혼으로 되어있습니다.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을 계시합니다. 육체는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줍니다. 영혼이 겁을 먹으면 심장이 빨리 뜁니다. 이는 육체가 놀라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가서는 육체는 영혼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혼은 그 사람을 싫어하는데 육체는 거짓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나아가 영혼은 진실을 알고 있는데 육체는 계속 거짓말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육체가 영혼을 올바로 계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영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활기를 얻게 되는데 죄를 지어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의 영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데 결정적으로 성령님이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특별히 첫 제자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도 유다인들이 무서워 그 분을 증거하지 못하고 숨어서 한 집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려오시고 나서야 제자들은 비로소 밖으로 뛰쳐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성령님으로 충만 하려하지 않으면 아무리 길거리에 나가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떠들고 다녀도 사람들은 콧방귀만 뀌게 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가 빠져나가면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가 생명을 상징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피 안에 ‘산소’가 있어야합니다. 산소가 빠져나간 피는 죽은피라 생명을 상징하지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어 버려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셔야합니다. 성령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지밖에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시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짧은 묵상>>

어렸을 때 한 선생님을 매우 미워하였습니다. 워낙 무서운 분이었고 학생들을 폭력과 인신공격으로 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 숨 쉬는 것까지 미워보였습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본 일이 없지만 미움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그와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생기거나 조금이라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선생님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그런 사람들 모습도 나도 모르게 미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른 선생님을 용서하고 내려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그와 비슷한 많은 사람들을 미워할 것 같았습니다.

군대 있을 때는 저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선임도 있었습니다. 잘못하는 것이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때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미움이 미워하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잘못하는 것도 없는데 왜 미워하느냐고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정의롭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시고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실 것이고 제자들은 그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였다면 당연히 그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면 그 제자들도 미워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세상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정의롭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나중에 제자들이 박해받게 될 때에 놀라지 말라고 미리 알려준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았으니 제자들도 박해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미움으로 돌아온다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세상적인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을 수치로 여겨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고 있다면 세상은 그를 ‘당연히’ 미워하고 박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만 잘 보인다면 어차피 나를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고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한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해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싫은 사람에게도 잘 보여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 곳에서 뽑힌 사람이고 세상은 자신들끼리 칭찬해 주겠지만 뽑힌 사람은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고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억울해하지 맙시다. 우리를 온전히 판단해 주실 분은 주님 한 분 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