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비치지 않은 적에도 태양을 믿노라.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적에도 사랑을 믿노라.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적에도 하느님을 믿노라.
1. 서품을 받은지는 8년째 접어들지만,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생활을 한 지는 이제 1년이 좀 지났다.신자들의 내적인 삶을 구석구석 파악하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지적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다. 아니, 근본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실 수 있는 것! 그래서 현상이 이러니 저러니 지적하기 보다는 우리의 기도가 이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적어보고자 한다. 이 바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숙한 신앙인의 기도라 할 수 있겠다.
2.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사람이긴 하지만 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살아간다. 말하자면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특징이 있겠으나 그 중의 하나는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런 아이는 부모에게 이것 저것 달라기를 잘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에는 떼를 쓰고 울며 투정을 부린다. 그 아이가 자라면 - 적어도 정상적이라면 - 부모의 고마움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러면 철이 들었다. 자랐다. 즉 성숙해졌다고 말한다. 신앙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저 하느님께 아이들 학교 잘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돈 잘 벌게 해 주십시오, 등등 이것 저것 청하기만 하다가 자기가 청한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신앙마저 저버리는 수가 많다. 이는 미숙한 아이와 마찬가지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이런 신앙인은 어쩌면 다음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어머니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을 두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수고비로 돈 백원씩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아이가 너무 돈에 맛을 들인 것 같아서 한 동안은 심부름을 시키고도 돈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종이 쪽지 한장을 내밀면서 읽어 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그동안 심부름 한 내역과 그 심부름의 대가는 얼마라는 것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어머니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잠시 후에 쪽지 하나를 이들에게 주었다. 아이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내가 너를 만 구개월 동안 뱃속에서 기르고 낳느라고 고생한 수고비, 너를 기르느라 밤잠 못 자고, 젖 먹이고, 기저귀 갈아 준 수고비, 또 네가 아팠을 때에 마음 졸이고 간호해 준 수고비, 그것이 얼마나 될까?'' 하느님 앞에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된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 청하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우선 그분께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 감사한다. 성인들이 감사의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은 그들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감사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만일 우리가 신앙의 눈을 뜨게 된다면 많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삼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크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보리 고개라는 말이 이제는 잊혀져 가고 있지만 불과 이 삼십년 전만 해도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이 있음은 분명 감사해애 할 일이다. 또 우리가 실의에 잠겨 기운을 잃고 있을 때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로써 다시 힘을 얻어 살게 되었다면 그 또한 감사해야 할 일이다. 산행을 할 때 힘이들어 숨이 차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 바람이 다시 힘을 준다. 인생살이를 하다보면 이런 순간들이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하느님의 큰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곧 성숙한 신앙인이다. 우리의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그분은 공중의 새들과 들꽃과 같이 하찮은 것 안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읽으셨던 것이다(마태6,26-30 참조).
3. 감사의 기도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남에게도 제대로 베풀 줄 알기 때문이다. 받은 은혜가 크다고 가슴 깊이 느끼는 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점에서 루카복음 19장에 나오는 세리 자캐오의 이야기는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당시에 아주 천대 받던 세리의 직업에다가 키까지 잣았던 자캐오는 심한 열등감과 자괴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으리라. 이런 열등감과 자괴심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돈을 벌었을 것이고, 그럴수록 주위 사람들은 자캐오를 멸시하였을 것이다. 돈만 아는 사기꾼, 노랭이, 수전노라고.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위대한 예언자로 추앙 받던 예수라는 분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고 식사까지 함께 하셨다. 난생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아 본 것이다. 자캐오는 이에 너무 감격하여 선뜻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이야기가 예시하듯 자신이 받은 은혜를 올바로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나누는 삶에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우리 신자들이, 아니 우선 나부터 자신이 이미 많은 은혜를 받았음을 깨닫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도록 변화되기를 기도하고 싶다.
4. 기도를 얘기할 때 대부분 청원기도를 많이 생각한다. 실제로 예수께서도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마태 7,7)고 말씀하셨다. 믿지 않는 이들도 급해지면 하늘을 쳐다보고 강청을 드린다. 어려울 때, 곤경 중에 잇을 때 하느님을 찾으며 기도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하느님께 청한 것이 들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서 신앙마저 저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렇게 간절히 애원했는데, 이럴 수가 - 하느님이 안 계시는가 보다''하면서 말이다.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을 안 들어 주실 때가 잇을까? 하느님은 분명 우리의 청원을 들어 주신다.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7,11)라고 예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느님은 우리 좋은대로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아버지가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다 늙은 나이에 얻는 외아들이라 애지중지하게 키웠다. 그런데 너무 응석받이로 키웠더니 장가들 나이가 되었는데도 부모에게만 의존할 뿐 생활능력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명이 다한 것을 느끼면서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내가 죽ㄷ은 다음에 네가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구나. 그래서 너를 위해서 보물 한 단지를 집 뒤의 밭에 묻어 두었다. 내가 죽고 나면 그것을 찾아서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도록 하여라." 아들은 장례를 지낸 다음 아버지의 유언대로 밭을 구석구석 파보았지만, 어디에도 보물은 없었다. 분한 마음이 가득하여 며칠을 지내다 보니 기왕에 파놓은 밭에 씨나 뿌려 두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들은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고,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서 다음 한 해 먹고 살 양식을 장만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과 땀이 바로 숨겨진 보물이라는 것을.
하느님도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시되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쪽으로 들어 주신다. 신앙의 눈을 떠서 이를 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기에 당장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원망하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족함과 약함을 절절이 느끼는 인간이기에 하느님께 청하지 않을 수 없다. 청하되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이루어 지소서>라고 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일 것이다.
5. 성숙한 기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기도는 고통 앞에서의 기도이다. 고통은 신앙인을 밑바닥에서 부터 흔들어댄다.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도 있지만, 고통 때문에 신앙을 잃을 수도있다. 열심히 성당 다니고 기도와 봉사활동을 잘 하던 신자들도 갑자기 우환을 당하게 되면 방황하고 회의에 빠져드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하느님께 충실하던 욥도 고통이 심해지자 하느님께 원망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나 이제 하느님께 아룁니다. 나를 죄인으로 다루지 마소서.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그 까닭이라도 알려 주소서. 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것을 억압하고 멸시하는 것이 기쁘십니까? 악인의 꾀가 마음에 드십니까?"(욥 10,2 이하) 세상의 누구보다도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 사셨던 예수께서도 고통 앞에서는 약해졌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가 22,42).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의 고통 중에서 철저하게 외치셨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얼마나 괴롭고 힘드셨으면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까지 하실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신다. 올리브 동산에서의 기도는 "아버지,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라고 끝을 맺는다. 십자가 상에서의 탄원은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라고 이어진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대할 것인가를 스스로 보여주셨다.
고통 앞에서 영웅인 양 태연자약할 수만은 없다. 고통을 당하면서 약해지고 흔들리고 하느님께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께 대한 마지막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당장 고통의 의미와 이유를 다 깨닫지는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그 의미를 밝혀 주시리라는 것을, 이 고통을 통해서 나를 정화시키고 최선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또 믿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기도한다면 그야말로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하겠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바르샤바 겟토의 담장에다 한 유다인 젊은이가 이런 믿음의 기도를 썼다.
태양이 비치지 않을 적에도 태양을 믿노라.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적에도 사랑을 믿노라.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적에도 하느님을 믿노라.
이는 극도의 암흑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기도이다. 고통은 신앙을 빼앗아 갈 수 있기에, 그 고통을 겪으며 바친 신앙의 기도는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이런 기도는 칠흙같은 어두움을 뚫고 비쳐오는 햇살처럼 찬란하며, 용광로에서 제련된 순수한 금과 같이 귀중하고 아름답다. 교회 역사상 주옥같은 기도는 대개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 바친 기도이다.
6.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기도가 정말 성숙한 신앙인의 기도라고 했다.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견디기 어려운 죽음의 고통 속에서 남까지도, 그것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서까지도 기도할 수 있다함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고 산산수훈에서 하신 말씀을 예수께서는 스스로 실천하신 것이다. 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완전하게 닮는 길인 것이다.(마태 5,48 참조). 그러나 고통 중에서 예수님처럼 기도를 해야 한다고 남에게 요구하기는 두렵다. 그저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내 자신 스스로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겸손되이 청할 뿐이다. 적어도 평소의 삶에 나와 의견이 대립되고, 나를 반대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라도 배우고 싶다.
성숙한 신앙인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한 마디로 대답한다면, 예수님처럼 기도한다. 이는 하느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음을 깨닫고 감사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청원하는 기도,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을 뿐더러 그 고통을 주는 이까지 용서하는 기도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런 기도를 바치는 이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성숙되고 뿌리깊은 나무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요구하기에 앞서 나 자신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 -
영성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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