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리야산’을 다녀와서
저는 3년 반 전에 유방암으로 수술을 했습니다. 림프절 전이가 되어서 항암치료를 받았구요. 그 후로 5년간 먹어야하는 약을 먹고 있습니다. 3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다가 이제는 6개월에 한 번씩만 검진 받습니다. 일주일 전에 외과, 산부인과 검사를 했고, 어제 진료 받고 6개월치 약을 받아 왔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검사 결과 이상 없다고 6개월 후에 검사하라 하셨습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주님 뜻대로 하세요. 어떤 결과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하고 의지적으로 애써 기도하곤 합니다.
기차로 내려오는 긴 시간 동안 주님께 기도하면서 지나간 일들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 살고 있는지, 그 고마움에 눈물이 났습니다. 또 다시 6개월을 선물 받은 것이 기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병원진료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평화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제 믿음이 자라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고마워서 목이 메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어린 보살핌이 제 영혼 안에서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면서 3일 동안을 걸어서 모리야산에 도착했습니다. 치열한 갈등과 고통과 의문 속에서 아브라함은 그동안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의 기억들을 총동원해서야 선하신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지난 3년 동안 여러 번 모리야산을 올랐습니다. 제가 바쳐야할 ‘이사악’은 ‘건강’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이기도 했고,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기도 했고, ‘목숨’이기도 했고, 심지어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기도 했습니다. ‘제 이사악들’을 주님께 봉헌하려고 모리야산을 오르면서 하느님께 고통의 존재이유를 따져 묻기도 했고 힘들어하고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기억들이 얼마나 진하고 얼마나 많았는지, 이젠 하느님께 섭섭한 마음도 없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모리야산을 오릅니다. 제 믿음이 그동안 부쩍 자란 것입니다. 제게 믿음은 하느님이 주신 사랑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과연 고통은 믿음을 굳건히 하고 “야훼이레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고통을 만날 때마다 오직 선하신 하느님께만 시선을 두고 세속적인 애착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과거의 기억들, 현재의 행복, 미래의 계획들까지 다 내려놓은 후에 “야훼이레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 마음 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화가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제가 성격이 밝고 살려는 의지가 강해서 행복하게 투병생활을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절대 죽는다는 건 생각하지 마. 오래 살 거라고 믿어야 해. 희망을 가져.”라고 응원해주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낫게 해주셨다는 거야? 그렇게 믿는 거야?”하고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리는 기쁨과 평화는 앞으로 건강해질 거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살고자 하는 욕망까지 내려놓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법을 <조금은> 배웠기에, 문제와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제게 허락된 여생이 6개월이든 60년이든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6개월 후에 다시 한번 모리야산을 오를 때에는 더 많은 사랑의 제물도 같이 드릴 수 있도록 매 순간 애써야겠습니다.
“아빠, 하느님,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총만으로도 넘치도록 넉넉합니다. 제게 어떤 것을 허락하신대도 고맙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9년 8월 11일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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