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을 해석해 주시는 분 - 윤경재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12,24-27)
탈출기 3장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시는 분은 당신을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모세에게 알아들을 수 있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3,15절에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데 그 때는 아예 칭호를 가르쳐 주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모세는 이 말 속에서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조상신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전 민족, 전 인류 나아가 전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생각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이집트 파라오 왕에게서 억압을 받고 울부짖는 백성을 구해주실 조상님들의 신이라는 제한 된 관념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외치는 울부짖음을 들으셨고, 조상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셨으며, 후손의 처지를 살펴보았으며, 낱낱이 아셨습니다. 탈출기 저자는 이 4 가지 동사로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밝힙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어디에서 뒷짐 지고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일하시는 분이라는 체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야훼’라는 이름도 ‘있게 하다’라는 동사가 명사로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동사적으로 생각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체계가 어디서 왔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이렇게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소개하는 내용도 실은 두 가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시며 ‘구원을 실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런 야훼 하느님을 조상의 신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믿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논쟁을 빌어 유대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그저 그들의 조상신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여태껏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아무도 아버지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요한3,32) 예수님만이 아빠 하느님을 보셨기에 증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굳이 유대인으로 오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지녔던 생각이 옳기도 하며 또 적지 않은 오해가 있었다고 밝히려는 의도였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가리켜 보이시고 또 실제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러 몸소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파스칼(1623-1662)이 남긴 쪽지를 되새겨 봅니다. 그는 위대한 수학자이며 과학자요 사색가로 인류에게 빛이 되신 분입니다. 그가 쓴 팡세는 프랑스 문학의 금자탑이며 지금까지도 읽어야할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바야흐로 인간 지성의 합리주의가 맹위를 떨칠 때였습니다. 무신론이 싹트기 시작했고 교회는 분열되어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웃옷 안쪽, 심장이 닿은 곳에 실로 꿰맨 메모지를 발견했습니다. 파스칼이 하느님 체험을 기록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저녁 아홉시 반부터 자정 후 반 시간쯤까지.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확실한 것, 확실한 것.
감동. 기쁨. 평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것과 세상을 망각함.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그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본질을 한 순간에 꿰뚫어 보았으며 그 감격이 얼마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른바 조명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통해 세상을 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기쁨과 평화를 얻었다는 고백입니다. 1662년 39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뇌척수막염과 암이라는 고통스런 병고로 죽기까지 그는 이 엄청난 은총의 체험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성적 과학자요 수학자답게 깨달음의 시간을 정확하게 기술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자신의 체험이 분명한 체험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깨달았다는 표현입니다. 그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엄청난 진리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에서 깨달았습니다.
이 글귀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의 고백으로 바꾸어서 아브라함의 예수 그리스도, 이사악의 예수 그리스도, 야곱의 예수 그리스도로 불러 보면 그의 깨달음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아빠 하느님께서 생명의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 그는 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 보이시고 또 성령의 모습으로 현존하십니다. 그 진리를 깨달은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기쁨의 눈물을 펑펑 흘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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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자체이신 분- 윤경재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12,35-37)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당신을 지칭하실 때 여간해서는 메시아(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군중이 예수께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과 메시아라는 명칭이 복음서에서 각각 30여 회 이상씩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호칭하는 대목은 공관복음서에는 마르코복음 9,41절과 마태오복음 23,10절 그리고 요한복음서 17,3절에서 도합 세 번 나올 뿐입니다. 이 세 구절도 과연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지 그 진정성이 의문시 됩니다.
그 대신 당신을 은유적으로 부르셨습니다. 병자를 위한 의사로, 잔칫상에 초대하는 사자로,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 건축가로, 씨 뿌리는 사람으로, 농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아주 독특한 호칭으로 부르셨습니다. 결국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명칭은 남이 예수를 지칭할 때 사용된 호칭이고, 사람의 아들이란 명칭이 스스로 부르신 호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을 메시아라 부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메시아라는 호칭에는 사실 상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자’라는 뜻에서 나온 명사로서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기름 붓는 동작은 야곱이 베델에서 베고 잔 돌멩이를 축성할 때 기름 부었다고 나옵니다. 그 뒤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성별할 필요가 있을 때 기름을 부어 축성하였습니다. 사람에게 기름 부어 축성하는 것은 탈출기 28,41절에서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 부어 사제로 삼은 것이 시초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고 똑같이 다윗에게도 기름 부어 왕으로 삼는 것이 메시아라는 호칭이 시작된 유래입니다. 그 후에 대사제를 세울 때도 기름을 부어 메시아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바빌론 유배 시절에는 왕과 대사제가 사라지자 메시아라는 호칭을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2 이사야가 북방의 페르시아 왕인 키루스에게 메시아라는 호칭을 과감히 붙입니다. 자신들을 바빌론 압제에서 해방하고 약속의 땅으로 귀환을 선사할 인물로 보았기에 그렇게 불렀습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백성의 목자(히브리어;로이)라는 존칭을 키루스에게 붙이기까지 합니다.
메시아라는 명칭에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독립시킬 인사라는 이미지가 깊이 새겨있습니다. 그의 인격이 거룩해서라기보다는 지도자로서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줄 지도자라는 개념이 확고부동했습니다. 한번 깊이 새겨진 이미지는 여간해서는 바뀌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이후 교회 공동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난해한 명칭보다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이방인들에게 쉽게 접근할 것이라는 사목적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 즉, 다윗의 가업을 이은 후손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에 제동을 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간과한 시편 110편, 다윗의 시를 실례로 들며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지식이 얼마나 아전인수 격이며 오류에 빠지기 쉬운지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근거를 드는 대목은 사무엘 하 7,12-14절 예언자 나탄의 예언 내용입니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죽자 곧바로 왕국은 분열되었고 몇 세대 후에 바빌론 유배와 같은 수모와 이민족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되실 분은 정치적 통치자,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예언의 본래 내용은 하느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고서 그 의미를 충실하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 분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에 이끌려 나탄 예언자의 말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고, 그 깊은 의미를 자기도 모르게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주군께 하신 말씀.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구약의 약속을 정확하게 해석하시며 정정해 주시는 예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확실한 사명의식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지혜 자체이신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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