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의 고독 속의 명상 중에서
장은명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3.
저의 주 하느님,
저는 지금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제 앞에 놓여 있는 길을 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 길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알지 못하며
저는 제 자신도 알지 못하고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제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바람은
실제로 당신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는 제가 하는 모든 일 안에서
그런 희망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희망을 저버리게 하는
어떤 것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압니다.
제가 이렇게 한다면
저에게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를지라도
당신께서 저를 바른 길로 이끄시리라는 것을 ...
그러므로 비록 제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항상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늘 저와 함께 계실 것이며,
제가 겪는 위험 속에
저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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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토마스는 어떤 사람의 의지가 선한 것을 좇아 하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며 악한 것을 좇아하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덕스러운 생활에서 행복을 찾으면 그는 덕스러운 사람이며 죄 많은 생활을 즐거워하면 그는 죄 많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19. 어떤 사람의 끝마침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시작을 보고도 그를 알 수 있다. 또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그의 됨됨이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그의 시작에서 얼마나 멀리와 있으며 그의 끝마침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는지 살펴보라.
기질이 성마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화를 잘 내는 경향이 있지만 분별있게 하면 화내지 않도록 감정을 자유로이 조절한다. 화를 내는 경향은 다만 그의 성격 안에 내재하고 있는 한 충동일 뿐이며 이것은 그의 욕구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다.
21. 수도생활은 기질, 성격, 감정 그리고 의지를 인간이 되게 하는 모든 요소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존중하면서 시작되고 영위되어야 한다. 극기에 의한 감정의 절제는 인간적 감수성을 성숙시키고 완성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금욕적 고행은 우리의 감수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감수성을 허용하면 고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감각, 감수성, 상상력, 판단, 의지를 단련함은 그 모두를 풍요롭게 하게하고 정화하기 위함이다.
22. 우리의 오관은 무절제한 쾌락 때문에 둔감해져 있다. 통회는 오관을 예민하게 하고 본래의 생기를 되찾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통회는 양심과 이성의 눈을 밝게 해주고 또 우리가 명확히 생각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도와주며 우리의 의지의 행위를 강화해 준다. 통회는 또한 감정의 질을 높인다. 수많은 종교, 미술, 종교문학, 감상적 기도와 여러 수도자들의 삶이 평범한 이유는 극기와 자제가 결여 되어 있기 때문이다.
25. 참된 극기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극기는 참으로 자기포기이다.
27. 도토리 안에 떡갈나무 잎과 가지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이 사랑인 은총안에는 모든 미덕이 숨겨진 채 잠재되어 있다. 상존은총은 모든 그리스도교적 미덕들의 씨앗을 가져다준다. 조력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숨어 있는 능력들을 실현하게 하고 그들이 의미하는 바, 즉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깨닫게 한다. 선한 행위의 기쁨은 기억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 같은 우리의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덕스러운 행동이 가능하고 가치 있으며 그러한 행동을 반대하고 좌절시키는 악덕의 행위보다 더 즐겁고 더 풍부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29.게으름과 비겁은 영적생활에 있어 가장 큰 적이다. 분별자체가 영적 인간의 가장 중요한 미덕 속에 있다. 분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무엇을 원치 않으시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분별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영감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다른 모든 계시에 복종할 의무를 일깨워 준다. 게으름과 비겁은 하느님의 사랑보다 우리 자신의 현재의 안락함을 더 중시한다. 그것들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한다.
30. 분별은 노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한다. 분별은 노력이 낭비되는 경우와 노력이 필수적인 경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게으름은 모든 모험을 피한다. 분별은 무용한 모험을 피하지만 믿음과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험을 감행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용기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참된 단순함에 이룰 수 없다. 비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주저하여 망설이게 한다. 이 주저함에는 참된 신앙이 없고 신앙은 다만 하나의 의견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32. 그리스도의 사랑밖에는 참된 영적 생활이란 없다. 오직 우리가 그분께 사랑받기 때문에 영적생활이 있는 것이다. 영적 생활은 성령의 선물과 그분의 사랑을 받는데 있다.
34.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믿음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구세주에 대한 사랑 안에서 산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올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산다. 희망은 참된 금욕주의의 비결이다. 희망은 우리 자신의 판단과 갈망을 부인하면서 현재의 세계를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 안에서 기뻐한다. 희망 안에서 피조물들을 즐긴다. 있는 그대로의 피조물들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 약속으로 가득 찬 피조물들을 즐긴다.
35.그분의 약속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는 모든 극기는 그리스도교적인 극기가 아니다.
36.나의 신뢰를 나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에 두게 하소서. 나의 희망을 건강이나 힘이나 능력이나 인간적 재산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두게 하소서. 내가 당신께 신뢰하면 모든 것이 내게 힘이 되고 건강이 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하늘로 데려갈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신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나를 파괴할 것입니다.
37.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감사에 의해 완전해 진다. 우리는 그분이 사랑이라는 진리를 체험할 때 그분께 감사하며 기뻐한다.
38.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곧 모든 것을 불평하기 시작한다. ‘뜨겁지도 차지도’않아 탁 털어놓고 사랑하지도, 탁 털어놓고 미워하지도 않는 영혼의 미온성은 곤경에 빠지지 않고 가상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표면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상태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일상적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이들은 곧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참으로 응답하고 자기가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참된 감사와 위선은 공존할 수 없다. 감사 그 자체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감사가 아니다.
39. 감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
40.’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내가 현재의 나 자신이 아니면 좋겠다’라고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결함과 무력함을 경험하는 데서 나올 수 있지만 우리 내면에 어떤 평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우리가 자신이 보잘 것 없음을 진실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또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좋은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임을 깨달을 수 없다.
41. 보잘 것 없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사랑과 존경과 숭배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므로 자신을 사랑한다. 겸손한 사람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사랑받고 존경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기’때문이 아니라 ‘합당하지 않기’때문에 그렇게 한다.
42. 그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사랑받으려고 애쓴다. 그는 동료들의 관대함에 의해 사랑받고 도움받기를 청한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이 모든 것을 필요로 함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 없이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간청하고 또 얻을 수 있을 때에는 그것을 얻는다.
43. 영적인 삶은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뿌리 뽑혀져서 천사들의 영역으로 옮겨 심어진 삶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인간으로 살 때 우리는 영적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되려면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44.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피할 수 없는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 일상 생활속에 내재함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이해력을 얻을 수 없다. 이 확실성 없이는 우리는 초자연적 확신과 평화를 가질 수 없다. 영적으로 항상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쇄신해야 한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도 깨어 있음의 문제이다.
45. 영적인 영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서는 안된다. 묵상은 영적인 인간이 스스로를 항상 깨어 있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이다. 묵상기도는 엄격한 훈련이며 억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용기와 인내를 요구한다. 끈기있게 그것을 배워 나갈 의지가 없는 사람은 마침내 타협하고 말 것이다. 모든 훌륭한 묵상기도는 우리의 온 존재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46. 아무것도 인식하거나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기도는 있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기도란 없다. 모든 참된 내적기도는 아무리 단순하다 해도 우리 온존재가 하느님을 향할 것을 요구한다.
47. 우리의 내적자아는 온전히 하느님을 향하게 하지 않고 하느님을 관상하려 한다면 결국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을 관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과 감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하느님께로 회심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날뛰는 영상들 속으로 뛰어들어 우리 스스로 종교적 경험을 날조 할 것이다. 온 존재를 하느님께 ‘향하게 함’은 참되고 깊고 단순한 믿음으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때 하느님과의 접촉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열망하는 사람이 이 믿음에 생기를 준다.
48. 그분의 현존에 눈을 뜨는 눈(안목)은 우리의 겸손의 한가운데, 우리 자유의 중심에 우리 영성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한다. 묵상은 다름 아닌 이 눈을 뜨는 일이다.
50. 영적인 생활은 ‘하느님이야 말로 모든 것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일상적 깨달음, 그분은 모든 것이 향하는 중심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가 지향해야 할 깨달음을 통하여 그분 앞에서 자책하고 흠숭하며 우리의 온존재가 침묵하는 것이다.
51.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검토하고 다만 심리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 어떤 평화로운 상태가 기도의 결실이라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기도 생활을 망치게 된다. 관상기도에서 추구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느님이다. 가난은 자유에 이르는 문이다. 우리 자신 안에서 희망이 원천이 될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 안에는 방어해야 할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52. 하느님의 모든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지 않고 그분의 선물 안에 머무른다면 선물은 그 좋은 본성을 잃는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적절한 시기가 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그분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거두어 가신다. 그 후에는 어떤 심리적 효과를 매개로 하여 그분을 찾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우리의 가슴속에서 그분에 대한 느낌을 찾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54. 영적 생활을 하고 싶다면 삶을 단일화 하여야 한다. 자신이 갈망하는 바대로 만들어 진다. 삶을 단일화하기 위해서는 갈망을 단일화 하여야 한다.
55. 수도자는 그 본분 앞에서 지혜를 찾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결코 지혜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지혜는 그의 소명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도원 안에 사는 그의 삶이 바로 지혜이다. 수도자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지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지 않는 어떤 것을 그의 삶에 부가함으로써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수도생활은 하느님의 자비로 가득차 있다.
56. 수도자가 향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라는 선물에 의해서만 순수하고 초자연적 의도를 가지고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분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우리의 능력도 커진다.
57. 공동체의 가장 가난한 이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이용될 수 있고 그 자신을 위해서 특별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결코 시간을 내지 않는다.
58. 가난은 우리를 남보다 우월하게 보이게 하는 특이성을 만족스러워 하거나 이것들을 ‘소유물’로 간주하는 태도를 참아받게 한다. 가난이 우리를 특이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예외적인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다른 이들을 돕고 우리의 시간과 소유물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능력도 소유되고 집착될 수 있다. 남을 돕는다고 우리 생각을 강요하고 그들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가 그들에게 베푸는 호의로 우리는 그들을 사고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59. 가난은 궁핍을 뜻합니다. 가난을 서약했으면서도 궁핍하게 지내지 않고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당장 그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60. 독서는 진리의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는 행위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실체나 더욱 위대한 실체인 그분 자신을 반영하는 말씀에 마음을 연다. 독서는 또한 하느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이들에 대한 겸손과 존경의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독서로부터 좀더 많은 것을 얻고 독서가 지성의 행위만이 아니라 온 인격의 더욱 심도 있고 활기찬 행위가 될 때 그것은 하느님을 한층 더 많이 찬미하는 행위가 된다. 그때 우리는 사고, 묵상, 기도 또는 하느님께 대한 관상에 몰입하고 심신이 상쾌해진다. 책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인간처럼, 또는 우리가 사는 도시의 소유처럼 말을 건넬 수가 있다. 책이 빛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우리를 침묵으로 채운다면 책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말하는 것이다.
61. 책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도움도, 평화도, 기억할 만한 그 무엇도 주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 권태로 우리를 포로로 만든다면 책은 도시의 소음처럼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처럼 말하는 책은 너무 권위 있게 말하므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지 못한다. 좋은 사람들처럼 말하는 책은 그 인간적인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책들은 위대할 수도 있고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다. 책은 단지 위대한 사람들, 그들 고유의 인간성 이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위해 태어날 사람들과 사귀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영적인 사람이 추구하는 진리는 실체, 존재, 본질을 모두 합친 온전한 진리, 사랑하고 껴안을 수 있는 그 무엇, 우리의 행위로 경의를 표하고 봉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62.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읽을 수 있는 생명의 책이다.
64. 우리가 참으로 겸손하다면 우리가 얼마만큼 거짓말쟁이인지 알 수 있으련만…끊임없이 내가 거짓말쟁이이고 사기꾼임을 나에게 보여주는 그러한 겸손을 지닐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내가 거짓말쟁이이고 사기꾼이라 해도 진리를 향해 노력하고 할 수 있는 한 진실해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겸손을 지닐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겸손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겸손의 끔찍한 면입니다.
65. 어떤 면에서 참된 겸손은 매우 참담한 갈망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내가 오로지 당신 안에만 희망을 두도록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함이기 때문입니다.
66. 鍾은 우리를 일깨워 준다. 하느님만이 선하시며 우리를 그분에게 속해 있을 뿐이며 이 세상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음을 일깨워 준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우리의 관심들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기 위해 종은 우리의 근심걱정을 깨뜨리며 울린다. 그 소리를 갖가지 의무와 덧없는 걱정거리 때문에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의 자유에 대해 얘기해 주고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71. 아버지 내가 알 수 없는 당신을 사랑하오며, 내가 보지 못하는 당신을 껴안으며, 내가 마음 상하게 해드린 당신께 나를 맡깁니다.
74. 내적인 침묵은 자비와 겸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그분은 삶의 법을 가르쳐 주는 양심의 빛을 주셨다. 삶이 하느님의 뜻인 이법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삶은 삶이라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이 빛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서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 지혜는 가장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이며 우리 영혼의 정직성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체험합니다. 지혜는 우리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를 안다.
78. 지혜에 이르는 첫 단계인 두려움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죄의 고백이다. 이 고백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가져다주고 그분 곧 진리의 빛이 우리의 양심 안에서 빛나게 해준다.
83. 고독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지리적 장소를 이리저리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좀더 완전한 외적 고독이라는 물리적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던 고독의 현실성마저 잃어버린다.
84. 고독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순수한 희망이다.
88. 침묵은 성화의 본질에 속한다. 성인들이 지닌 힘은 다름 아닌 침묵과 희망 속에 다져진다. 고독이 하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 내게는 고독이 없었다. 그런데 고독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이미 고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 전에도 그것을 소유 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독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고독이 주는 깊은 평화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으려면 고독은 세상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 존재 자체만큼 위대한 그 무엇인가의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89. 고독한 생활은 침묵의 생활이므로 인간이 그의 지성과 사물 사이에 만들어 놓은 언어의 연막을 흩어버린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사물의 적나라한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 한 적나라한 실재를 두려워 할 것도 부끄러워 할 것도 아님을 알게된다. 실재는 침묵과의 다정한 친교로 감싸여 있고 이 침묵은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91.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치고 정말로 살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고독한 삶으로 불리움 받았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길 그치고 고독할 때에 비로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참된 소명에 따라 살지 않을 때는 사고가 우리의 삶을 마비시키거나 대신하며 아니면 삶에 사고가 굴복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명을 발견할 때 비로소 사고와 삶은 하나가 된다.
교만과 겸손은 둘 다 내적인 침묵을 찾는다. 교만은 조작된 부동성으로 하느님의 침묵을 흉내 내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침묵은 순수한 생명의 완성인 반면 교만의 침묵은 죽음의 침묵이다. 겸손은 무기력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활동 안에서 침묵을 찾는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가난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활동 안에서 찾는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가난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활동 안에서 찾는다. 겸손은 기도에 의지하며 말을 통해 침묵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에서 침묵으로 들어가고 다시 침묵에서 말로 나아가게 되므로 만물 안에서 겸손을 침묵한다. 겸손이 말할 때조차도 겸손은 또한 귀를 기울인다. 겸손의 언어는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상냥하고 너무나 빈약한 까닭에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하느님의 침묵으로 나아간다.
96. 교만은 자기 안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잃어버릴 까봐 자기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 한다. 그러므로 교만의 침묵은 사랑의 행동으로부터 위협받는다. 우리의 침묵을 깨뜨리는 것은 말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남이 들어 주기를 바라는 조바심이다. 오만한 사람의 말은 다른 모든 이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이 그 말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강요한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이가 자기에게 말을 걸도록 하기 위해서 말을 한다. 겸손한 사람은 적선 외에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기다리며 귀 기울인다. 침묵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목적 전부를 말로 요약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97. 침묵은 마지막 말을 위해 존재한다. 침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99. 가장 불행한 것은 이것이다. 즉 나의 기도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면 기도가 다만 나 자신의 풍요로움만을 추구한다면 나의 기도 자체가 나를 가장 산만케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나 자신의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나는 지식의 나무열매를 따먹고 나 자신과 하느님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침묵과 가난과 고독 속에서는 하느님이 전부시기에 하늘도 나의 기도요, 새들도 나의 기도요,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도 나의 기도이다.
100. 참된 가난은 감사를 주고 받는 것, 우리가 쓸 필요가 있는 것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거짓된 가난은 아무런 필요도 없는척하고 청하지 않는 척 하면서 모든 것을 구하려고 애쓰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전혀 감사하지 않는 태도이다.
104. 그분이 나보다 더 무한히 위대하심을 알기에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나에게 보여 주시지 않으면 나는 그분을 알 수 없다. 이 사실을 알고 만족한다면 나는 평화를 얻을 것이고 그분은 내 가까이 내 안에 계실 것이며 나는 그분 안에서 쉴 것이다.
109. 순교에의 불림은 카리스마적이고 특별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에의 불림도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의 계획에 따라 순교자가 되지도 않고 우리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은수자가 되지도 않는다. 고독에 대한 갈망이 효과를 거두려면 그 갈망이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111. 은수자는 항상 기도하고 있는 사람, 항상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는 사람, 하느님께 드리는 그 자신의 기도가 순수하지 못할 까봐 걱정하고 그 자신의 응답을 하느님의 응답으로 착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사람, 기도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그의 기도를 은밀하고 단순하고 깨끗하게 만들려고 조심하는 사람이다.
112. 감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이 핵심이므로 그것은 또한 고독한 삶의 핵심이기도 하다.
113, 기도의 본질은 마음과 목적의 성실성에 달려 있는 망설임 없는 믿음과 끈기 있는 확신이다.
115. 고독한 삶은 끊임없는 친교와 감사의 삶이어야 한다. 고독한 삶은 우리의 근심을 주님께 던져버리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도움에만 기뻐하는 삶이다.
116. 참으로 고독한 삶은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누릴 수 있는 부분적 고독과 전혀 다른 본질을 지닌다. 우리가 고독을 때때로 얻을 때 우리는 다른 가치와 대조함으로써 고독의 가치를 맛본다. 우리가 정말 홀로 살 때에는 대조의 대상이 없다.
119. 영혼의 거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 모습 외에는 그 어떤 영상도 나타나 있지 않을 때 당신의 기도는 가장 훌륭한 기도가 된다. 이 모습은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말씀, 곧 사랑을 갈구하는 말씀이며 아버지의 영광이다. 순수한 사랑만이 영혼에서 피조물의 영광을 완전히 비우고 욕망을 넘어 우리를 고양시킨다.
120. 영혼의 깊은 곳에 은총이 자리하고 있는 한 감정은 우리 존재의 표면을 흔들 수는 있지만 심층을 휘저을 수는 없다.
123. 그분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항상 말을 삼가야 하고 사람들과 담소하고 싶은 욕망, 하느님께 담소하고 싶은 욕망조차도 조절할 필요가 있다. 고독한 삶은 본질적으로 가장 단순한 삶이다.
126. 행동은 존재의 문이요 창이다.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활동을 포기한다면 우리 존재의 심층을 발견할 수 없다.
127. 삶은 겸손과 믿음으로 우리의 활동을 정화시키며 사랑으로 우리의 본성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128. 완전한 믿음의 행위는 완전한 겸손의 행위여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순수한 비밀을 금방 폭로해 버릴 사람에게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결코 표현할 수도 없고 나 혼자 조리 있게 생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려고 기다리신다.
129. 고독한 삶의 가장 훌륭한 결실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가 고독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의 선함을 더욱 명확하게 본다.
131. 시편은 은수자의 참된 정원이며 성서는 그의 낙원이다. 극도의 가난과 겸손 속에 사는 그는 시편과 성서가 사는데 필요한 그 어느 것도 지니지 않는 까닭이다. 성서를 학문적으로, 미학적으로 또는 단순히 경건한 태도로 읽는 이들에게 성서는 참으로 즐거운 기분전환과 유익한 사고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성서의 내밀한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궁핍할 때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분을 발견하지 못하고 둘러볼 곳도 없을 때 성서는 참된 일상의 양식으로 삼고 성서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한다.
132. 당신은 내가 위대해져야 비로소 나와 함께 계시어 내 말을 들으시고 내게 응답하시려고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께서 나의 처지로 내려오시어 나와 동등하게 되시고, 내 안에 머무르시어 자비로운 손길로 내 안에 사시도록 당신을 끌어 당긴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비천함과 나약한 인간성입니다.
133.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인간이어야 하고 앞으로 인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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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는 모든 것이 하나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우리 시대는
불안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의 불안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부로부터 이 불안을
우리의 세계에, 또 서로에게 강요한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성스러움이란
틀림없이 불안이 있는 지역에서 불안이 없는 지역으로
떠나감을 의미할 것이다.
아니면 성스러움이란 불안의 한가운데서 불안 없이
존재하는 법을 하나님께 배우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막스 피카르가 지적햇듯이,
성스러움이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즉, 성스런 삶이란,
우리 내부의 모순들을 화해시켜서 그 모순들이 우리 내부에
남아 있으면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만드는데,
이 성화는 침묵 속에서의 삶을 의미한다.
모순은 인간의 영혼 안에 항상 존재해 왔다.
그러나, 모순이 끊임없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침묵하기보다 오히려 분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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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며,
모순을 안고 살고 모순에서 벗어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모순을 사소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가치에 비추어서 모순을 바라본다.
이렇게 볼 때 침묵은 성화의 본질에 속한다.
성인들이 지닌 힘은 다름아닌
침묵과 희망속에서 다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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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침묵을 우리 자신 안에서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발견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하느님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그러한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우리 영혼 안의 하느님의 침묵과 교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히려 뒷전으로 물러나시게 되는 우리 자신의 침묵 안에 고립된 채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 자신만의 침묵에서는 떠나실 때가 많다. 왜냐하면 내적인 침묵은 끊임없이 모색하고, 어두운 밤에 끊임없이 외치며, 심연 위로 몸을 거듭거듭 굽혀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히 지닐 침묵을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것을 중단한 것이며, 침묵도 우리 안에서 사그러져 버린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 침묵은 그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다. 침묵 속에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 침묵은 그분의 지속적인 현존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 그분은 찾을 때에만 발견되고 찾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서 빠져 나가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를 바랄 때에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분은 말씀을 그치신다. 우리가 비록 소란한 감정의 반향으로 그 침묵을 다시 채운다 해도 그분의 침묵은 활기찬 것이 아니라 무기력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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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과 비겁은 하느님의 사랑보다 우리 자신의 현재의 안락함을 더 중시한다.
그것들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한다.
분별은 노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러나 겁쟁이에게는 모든 노력이 낭비일 뿐이다.
분별은 노력이 낭비되는 경우와 노력이 필수적인 경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게으름은 모든 모험을 피한다.
분별은 무용한 모험을 피하지만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험을 감행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열렬함으로 얻어진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어떠한 모험을 대가로 치르고서만 하나님의 나라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조만간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내기를 하여, 우리가 보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걸어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러나 덧없는 세상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 모험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용기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참된 단순함에 이를 수 없다.
비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주저하여 망설이게 한다.
이 주저함에는 참된 신앙이 없고 신앙은 다만 하나의 의견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위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지 않으므로 우리는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이 망설임은 희망에 대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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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큰 사랑 내 안에-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의 주님,
당신을 사랑하고 찬미함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게 하소서.
나무들은 당신을 알지 못하면서도 진실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참나리와 수레국화도 당신의 현존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검은 구름도 당신에 대해 명상하면서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갑니다.
마치 놀면서 자기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한가운데서 나는 당신을 알고 당신의 현존에 대해서도 압니다.
나는 그들과 내 안에 당신 사랑이 있음을 알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더욱이 내 안의 나는 당신 사랑의 현존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오, 당신이 먼저 그 사랑을 내게 주셨고, 또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결코 내 가슴 속에 있을 수 없을 친절하고도 강렬한 사랑이여!
당신의 마음을 한번도 상하게 해드린 적이 없는 이 존재들 가운데 나는 당신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나인데도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하늘 아래 존재하는 나를 보시면서도 나의 무례한 행위를 잊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가지만 청합니다.
나의 무례함에 대한 나의 기억 때문에 사랑의 선물을 내 가슴 속에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청합니다.
그 사랑은 당신께서 나에게 불어넣어 주신 것이기에, 내가 무가치하기에 그 사랑을 받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나는 오직 당신을 더욱더 사랑할 것이며, 당신의 자비를 한층 더 찬미할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었음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은 나 자신의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것이기에 그것이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은 당신의 아드님에게서 나오는 까닭에 당신께 소중한 것이며
그 사랑은 나를 당신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까닭에 더욱더 당신께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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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고독속의 명상"에서
고독한 삶을 사는 소명__숲과 산 또는 바다나 사막의 광활한 풍경이 빚어내는 침묵에 자신을 내어 주고, 자신을 넘겨주며,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 태양이 땅위로 솟아 올라 빛으로 그 침묵을 가득 채우는 동안 고요히 앉아 있는 것. 아침이면 일어나서 기도하고 일하며, 그 땅에 어둠이 내리고 침묵이 어둠과 별들로 채워지는 밤이면 힘써 묵상하는 것. 이것은 참되고 특별한 소명입니다. 그러한 침묵에 완전히 빠져들어 침묵이 자신의 뼛속까지 스며들게 하고, 오직 침묵만을 호흡하고, 침묵을 먹고 살며, 자신의 삶의 본질 자체를 살아 있고 깨어 있는 침묵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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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고독 속의 명상>이란 책에서 옮긴 내용이 아닙니다.
토머스 머튼, 명상이란무엇인가, 오무수 옮김, 가톨릭출판사, 1987. 중에서
11.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거룩해지고 당신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불리었다.
12. 신비적인 명상은 명상 중에 반드시 지속적으로 불가사의한 현상, 탈혼상태, 황홀경, 성흔 등등을 초래한다.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것들은 카리스마적 선물, 하느님께서 거저 받은 선물이며 그런 형상들이 곧바로 그것을 체험한 사랑의 성화에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주부적 명상은 성화의 강력한 수단이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기른다.
18.명상의 기쁨은 완전한 일치 속에서 성취된다.
23.영적인 사물들은 일시적인 만족이라든가 단순히 인간적인 따름일 만족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에 의해서는 제대로 평가되거나 이해 될 수 없다.
24.열망은 명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열망이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그 위대한 선물들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
29-32.내적인 삶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방법과 실천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한에서 능동적인 명상의 부류에 속한다. 능동적인 명상에서는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작용이 요청된다. 명상의 기능은 정신을 일깨어 준비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좀더 잘 알고자 하는 그리고 그분 안에서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 주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영적인 삶의 기쁨에로 이끌어 준다.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명상은 사랑에로 통하는 길을 닦아준다. 그것은 순명과 겸손을 가르쳐 준다.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 안에서 그분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이 바라시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게끔 한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세상 것들에서 오는 만족을 즐기기 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열망하도록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 한테 어떻게 하느님께 신뢰를 둘 수 있는지 보여주며 우리가 점점 더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맡겨 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 간다.
33.전례는 그 풍부한 신학 내용과 성서의 계시를 통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도 능동적인 명상을 가르쳐 주는데 있다. 우리가 기도와 명상의 모든 은총이 흘러 나오는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은 바로 미사안에서다.
39.엄밀한 의미에서 명상은 하느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다.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대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엄숙한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준다. 신비적 명상은 순수 사랑에서 난 하느님에 대한 직관이다. 그것은 영혼의 그 모든 자연적 능력들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며, 누구 하나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도대체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한 모든 애착을 깨끗이 비워내는 정도에 따라 영혼에게 선물을 주신다. 명상은 순수 사랑의 발전이요 완성 그 자체다.
40.명상이란 하느님은 무한하신 사랑이라는 것 그분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 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랑, 그것만이 오직 문제일 따름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체험이다. 12세기의 위대한 시토회 신학자는 사랑은 그 자체에 대해 충족되어 있으며 그 자체 목적이며 그 자체 功이요 그자체 보상이라고 지적한다.
43.명상을 통해서 체험되는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영혼에게 평안과 강한 기운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다. 때로 그 평안은 고통과 어둠과 메마름 속에 온통 파묻혀 버리기도 한다. 기운 찬 힘은 때로 우리 자신의 극도의 무기력, 무능을 느끼게 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44. 명상은 영혼위에서 곧바로 비추어지는 하느님의 빛이다. 주부적 명상 안에서 얻는 하느님 체험은 영혼이 그분에 관하여 상상해 왔던 일체의 것에 대한 전면적인 모순이다.
45. 주부적 명상은 영혼 안에 놀랄만한 엄청난 내적 변화를 가져온다. 기도의 감미로움을 사라져 버린다. 묵상은 불가능해지고 싫어지기 조차한다.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짐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정신은 생각할 수가 없다. 의지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만 같아진다. 내적인 생활은 어둡다. 메마름과 고통으로 가득차게 된다. 영혼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리고 자신의 불충에 대한 벌로 모든 영적인 생활은 종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려 들게 한다. 이때가 기도 생활의 결정적인 순간이다.
49.묵상을 하는 도중에 겪는 건조함이나 덕을 쌓기 위하여 분투하면서 느끼는 무력은 그 자체로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적 생활에 나타나는 메마름과 무력은 죄나 불충실의 결과이거나 혹은 단지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어려움들은 건강이 나쁜데서 발생할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57.명상기도를 할 때 훌륭한 지도, 훌륭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그대 영혼안에서 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64.오직 한가지만을 찾아 구하라. 하느님께 대한 그대의 사랑은 더더욱 정화하는 것, 더욱더 완전하게 그분의 뜻에다 그대 자신을 내맡겨 드리는 것, 보다 오롯하고 보다 완전하게 뿐만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보다 평안하게 그리고 보다 온전하고 굽힘없는 신뢰를 가지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
67.성성과 명상은 오로지 정화된 사랑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말 명상적 영혼은 하느님 본질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젼들을 갖고 있는 영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과 사랑속에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일치되어 있는 영혼이며 자기 자신을 성령에 의하여 그분안으로 흡수되고 변화되도록 내맡기는 영혼이다.
68.아주 보잘 것 없는 이 순수한(신비로운)사랑이 다른 모든 업적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더 귀하며 교회에 더 커다란 유익이 된다(십자가의 성요한, 영혼의 노래 29,3).
70.정적주의 邪說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과 그분조차 도외시하는 전적으로 이기적인 고독속에서 스스로를 그 자신안에 가두어 놓게 한다.
71.명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창조된 사랑을 비어낸다. 반면에 정적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철저한 無化라는 거짓된 관념을 붙좇으면서 그 자신안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지식을 비워 내려고 애쓴다. 그리고는 움직일 수 없고, 지각도 없고, 사랑의 행동도 없고, 수동적인 감응도 없는 게다가 내적인 삶의 빛이라든가 따사로움, 생기 어느것 하나 없는 단지 공허만이 있을 따름인 어떤 영적인 진공속에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정적주의자는 자기가 하느님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움직여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75.실상 참된 명상자는 그가 하느님에 대한 열망 없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 사실로 하여 고통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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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명상의 씨>에서
고독 속에서 거룩해지는 사람은 퍽 드물다.
아주 혼자서 완전해 지는 사람은 썩 드물다.
남과 같이 살면서 그들의 약함과 모자람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버리기를 배우는 것이
참된 명상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길이 아니면 뿌리 깊은 자의식의 딱딱함과 거칠음, 사나움을 벗어날 길이 없는 까닭이다.
자의식은 성령의 작용과 쏟아 주시는 빛에 대하여 깨뜨릴 수 없는 장애가 된다.
쓸쓸한 고독 속에서 내적 시련을 과감하게 받아넘긴다 할지라도,
결코 남을 사랑하고 그들의 무리하기 짝이 없는 요구들을 낱낱이 들어주면서
겸손과 인내로써 이룩한 정화의 실적을 메울 수는 없다.
숨어서 닦는 사람은 언제나 괴상한 버릇에 굳어져 말라붙어 버릴 위험이 있다.
다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순수한 사랑만이 줄 수 있는 영신적 실재를 깊이 느낄 수 없다.
그대는 마음에 맞고 흥미를 끄는 기도와 책과 묵상으로
그대롤 외계로부터 잠가 버리고,
그대에게 어리석게 생각되는 사람들을 거슬러 많은 담을 쌓음으로써 그대를 지키는 것이
성덕의 길인 줄 생각하는가?
그대는 남의 복리를 위하여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대에게 귀찮고 마음을 흩어놓는다고 해서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일하기를 마다하는데서 명상의 길을 찾아보리라 생각하는가?
그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그대의 취미와 욕망, 야심과 만족을 다스리기는커녕,
숨막히는 지적 쾌락으로 그대를 또 고치처럼 돌돌 감아 쌈으로써
하느님을 찾아보리라 생각하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그대가 다른 사람한테서 임을 찾아보지 못한다면
임도 그대 안에 사시지 않을 것이다.
'밭에 묻힌 보물 > 책에서 옮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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