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신앙 자료

시련의 밤을 통해서 관상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김레지나 2008. 8. 28. 21:43

 

지난 몇 개월 동안 회개의 사다리의 높은 단계인 영혼의 어두운 밤과 성화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이 달에는 역시 회개의 사다리의 높은 부분에서 주어지는 관상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상에는 능동적 관상과 수동적 관상이 있습니다. 수동적 관상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하고 원하여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주부 적으로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 또는 성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관상가였던 성인들의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이 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된 영혼들에게만 주부적인 관상의 은사를 주신다고 합니다.  주부 적 관상 은사를 받을 수 있게 합당하게 준비된 영혼이란, 영혼이 깨끗하거나 깨끗이 정화된 영혼, 여러 가지 덕, 특히 겸손의 덕이 많이 수련된 영혼, 자기를 끊는 영혼, 긴 기도 생활을 한 사람과 긴 시간 기도하는 영혼, 침묵하는 영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영혼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준비를 능동적으로 수련하는 것을 능동적 관상이라고 하며 관상 기도회 또는 관상 피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경자 꼰�숀 데 알미다에게 관상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적어 보겠습니다.


‘관상은 기도의 마지막 계단 다음에 오는 디딤판이다. 관상에 오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이 지상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다.


관상은 성령의 특별 은사로서 성령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은사이다. 성령께서는 이 은사를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이 준비된 영혼들에게만 주신다. 윤리적 덕으로 튼튼한 기초가 닦인 영혼, 깨끗한 영혼, 정화된 영혼 그리고 겸손한 영혼, 자신을 꺾는 영혼들에게만 주신다.


관상의 은사는 대단히 큰 은사로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천국을 앞에 가져다주는 은사이다. 관상의 은총에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 거룩함의 빛은 관상의 들에 핀 꽃들을 비추어 주는 태양 빛이다.


관상은 때로는 구름이 끼어 영혼 위에 비추는 태양 빛을 가려 영혼을 어둡게 하고, 때로는 완전히 가려 영혼이 아주 캄캄한 어둠속에 있기도 한다. 또 때로는 호된 시련도 받고, 아주 예리한 시련도 받게 되는데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관상하는 영혼들을 거치게 하시는 시련들이다. 때로는 하느님의 강한 은총이 아니면 지탱할 수 없는 투쟁들, 외로움, 잔인하게 버림받음, 고통들이 따른다. 어떤 때는 무서운 유혹도 따른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영혼들로부터 숨어 버리시어 하느님께 대한 갈증의 고통과 괴로움도 따른다. 어떤 때는 오직 캄캄한 어둠만이 영혼을 에워쌓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련과 고통가운데서도 영혼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정화되어 순수해 지고, 더욱 열절해지고 커진다. 이런 복된 영혼들은 이제는 자기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하느님 안에서 살기 때문에 하느님과 떨어져서 사는 것은 마치 생명이 끊어지는 듯 무섭고 비참한 삶이 된다.


완덕에 높이 올라간 관상가 일수록 시련이 크나 동시에 더욱 황홀한 천상의 빛으로 채워진다. 이렇게 정화된 영혼의 가치는 다만 나만이 그 가치를 잴 수 있을 정도로 크다.


관상의 은총 안에서 덕들이 성장한다. 관상가들의 영혼들이 거쳐 가는 고통과 그 고통의 강도에 따라 영혼은 더욱 깨끗이 씻겨지고 더욱 깊이 정화 된다. 깊은 정화수 밑에서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영혼은 그 고통을 잘 인내 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까지 갖는다. 그러므로 이런 영혼들의 고통은 대단한 가치를 갖는다. 관상하는 이 영혼들은 고통이 아무리 혹독하여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하여 이 고통을 받아드리고 인내한다.


이런 혹독한 시련과 밤이 지나면, 천상의 자비가 다시 돌아온다. 하느님께서는 죄나 악으로 더러워진 깨끗지 않은 것을 가까이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렇게 영혼들을 깨끗이 정화 시키신다. 그러면 영혼은 더욱 깨끗이 투명하게 되어, 이 영혼의 투명함을 통하여 천상의 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관상하는 영혼이 고통을 통하여 얼마큼 정화됐느냐에 따라 영혼의 투명함이 다르다. 이런 영혼은 천상의 것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고, 무한하시고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말로 표할 수 없는 티 없이 맑은 기쁨과, 평화와 밑바닥이 없는 깊은 행복의 바다 안으로 빠지게 된다.


이런 영혼들은 하느님의 특별 은총으로 자신이 정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자신은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깨닫는 겸손을 갖게 된다. 이 겸손한 영혼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너무 부끄럽고 고마워, 사랑으로 가득한 감사의 정이 그 안에서 타오른다.


사탄의 수천가지 속임수로 꾸며진 관상이 많다. 이 속임수에서 해방되고 보호 받기 위해서는, 영적 지도자가 꼭 필요하다. 영적 지도자는 경험을 통하여 관상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고, 이 길에 있는 암초들과 방해물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거룩해야 한다. 즉 분별력과, 거룩함과, 관상에 대한 경험 지식과, 또 관상 안에 따라오게 되는 시험들을 솔직하게, 단순하게 선명하게 지도 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


이 관상 안에 숨겨진 보화도 많지만, 이에 따르는 위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성령께서 이관상의 절정의 은총을 어디에 기준 하시는지 아느냐? 깨끗이 정화됨, 희생, 겸손, 숨음 그리고 어둠속에 두신다. 이런 조건이 준비 되지 않은 영혼에게는 관상의 은사를 절대로 내려 주시지 않는다. 이 것들이 없는 관상은 허위의 관상이며 무가치한 관상이고 많은 위험이 따른다.‘ 이상은 예수님께서 관상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위에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서도, 영혼의 깨끗함은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그래서 관상이나 묵상을 추구하기 전에 우선 영혼의 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영혼의 정화를 위해서도, 관상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많은 고통과 시련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통과 시련과 아픔은 관상 뿐 아니라 하느님 가까이 가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 하고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이것들을 통하여 영혼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체험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되고, 겸손의 덕이 생깁니다. 동시에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분께 의존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찬미, 흠숭, 감사가 나오고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생겨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통이나 시련 등을 통하여 체험하고 절감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자기를 끊는 자아 끊음의 덕이 생깁니다. 자기를 끊는 덕은 인내심을 주고, 영혼은 꿋꿋해 집니다. 죄를 끊는 면에서나, 역경이 닥쳤을 때 하느님을 따라가는 면에서 영혼은 인내하고 꿋꿋해 집니다. 동시에 영혼이 깨끗해지고 겸손해 지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순수하게 됩니다.


인내심이 성장하면서 항구함이 생깁니다. 다른 이들을 용서하게 되고 그들의 나약함을 너그럽게 받아드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성장합니다. 즉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영혼은 더욱 깊이 정화 되고, 많은 덕들, 특히 사랑의 덕과 겸손의 덕이 성장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데 항구하게 되며 꿋꿋해 지고 용감하게 됩니다. 영혼은 이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겸손으로 하고자 합니다. 영혼은 하느님께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영혼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동시에 주부 적 관상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많은 준비가 됩니다.


이런 준비가 된 후에도, 하느님께서 주부 적 관상의 은사를 주실 계획이 없으시면, 영혼은 하느님과 천국 가까이 가는 거룩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관상의 은사는 필요하지 않지만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되어야만 하느님나라에 갈수 있습니다.


특히 박해를 통하여 오는 고통과 시련에서는 하느님께서 천국을 우리 앞에 놓아 주시며, 세상이 모르는 하느님의 신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박해에는 외형적 박해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참혹하게 아픈 박해는 소리 없이 숨어서 영혼을 갈기갈기 찢는 내적 박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적 박해는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숨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짓과 위선과 때로는 덕이라는 위선의 뚜껑을 뒤집어쓰고 행하여지는 박해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죄 없이 받는 박해가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위하여 허락하신 것이며, 이런 박해는 영혼 안에 있는 독과, 영혼을 해롭게 하는 모든 악을 영혼 안에서 정화시키시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박해입니다. 이런 영혼들은 박해를 받는 동안 영혼이 더욱 깨끗해지고 덕이 수련되고 성장 되며 하느님께서는 천상에서 큰 보상을 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정의 때문에 박해를 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그러나 정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다 나의 왕국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박해 받는 사람들은 (1)자기의 잘못이 없이 무죄함 안에서 박해 받을 때, (2) 오직 나의 대한 순수한사랑 때문에 박해 받을 때, (3)자기의 원수를 용서하여 주고, (4)침묵 속에서 박해 받을 때 (5) 기쁘게 박해 받을 때만, 내가 그들에게 천국을 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박해도 그것을 우리가 잘 받아드리면, 주부 적 관상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강한 수련도구가 됩니다. 


세상에서 살 때 이름이 알려지면 알려 질수록 누구나 남으로부터 욕을 먹거나 모함을 당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서로 씌워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곤 합니다. 악의 힘은 온 인류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누구나 죄를 짓게끔 만들고자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인류를 유혹합니다. 특히 내적 박해인 말과 소문을 통해서 유혹하는데 성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시대에  이 유혹은 온 인류를 뒤 덮은 흑사병이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이 어떤 동기로든지 다른 이에 대한 말을 하면, 이것은 입을 통해 전달되는데, 한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이 옮겨질 때 마다 그 말의 색깔과, 형태와 질이 변질되어 나옵니다. 말하는 사람 안에 있는 감정과 악이나 경솔함에 따라 말의 내용이 변질되어 나온 말은 다시 다음 사람에게 옮겨집니다. 또 다음 사람 안에 있는 감정과 악이나 경솔함, 투덜거림, 질투, 시기 등에 젖어서, 말은 또 다른 색깔, 다른 형태 그리고 다른 질의 말로 되어 전하여 집니다.


말이 옮겨질 때마다 이렇게 변질된 말이 전하여 지면서 이것이 악 소문이 됩니다. 이 악 소문은 박해의 큰 도구가 되어, 진리에게 무참한 박해와 시련의 아픔을 줍니다. 진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지는 과정에서, 과장이 되고, 과장은 거짓을 낳게 하고, 거짓은 또 과장되고 과장된 거짓은 또 거짓으로 쌓여 마치 눈덩이와 같이 커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허위와 거짓의 소문을, 알아보지도 않고 사실로 단정하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하물며는 하느님의 작업도 이런 소문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파괴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간은 입을 통하여 사탄의 작업에 이렇게 적극 협조하여 악을 조작하면서, 하느님의 앞에 가서는 은총과 자비를 구하니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 얼마나 터무니가 없고 이렇게 무지한 인간이 얼마나 가엾게 보이실까 생각 하여 봅니다. 당신의 메시지를 주시면서 호소하시는 성모님의 심정도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쁜 소문을 만들어 내는 사람의 죄의 무게는 다른 어떤 죄의 무게보다 무겁다. 지옥에는 이 죄 때문에 그곳에 떨어진 영혼들로 가득 찼다.다른 사람의 소문을 나쁘게 만든 사람들은 화를 입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피할 수 있었는데 피하지 않고 그것에 동조한 영혼들도 화를 입으리라. 사탄은 이렇게 악소문을 만들게 하면서 그것을 즐기고 있다. 악소문은 사탄의 무기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박해나 중상, 몰이해 등으로 오해를 받거나 고통을 받을 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 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유혹자의 목적은, 착한 사람들이 이 악한 소문이나 모함이나 누명쓴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해명하고 누명을 벗기 위해, 흥분하고 분노하고 싸워서, 죄를 짓게끔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 우선 기도하고 기도의 힘으로 이 유혹과 싸워야 하는데, 아주 좋은 기도는 천주경과 성모경입니다. 천주경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가 있고 성모경에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가 있습니다.


그 다음 양심 성찰을 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받는 박해나, 고통이나 시련이면, 굴욕감을 하느님께 봉헌 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런 죄를 다시는 짓지 않도록 결심 합니다. 그러면 유혹자는 패배당하고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유혹자가 영혼들이 죄를 짓고,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고자 펴놓은 그물인데, 영혼이 오히려 죄를 끊고 겸손하게 되고, 겸손한 영혼은 하느님께 자석과 같이 끌려가는 천상의 은총을 받게 되니까 유혹자의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악 소문이나, 박해나, 시련, 누명, 고통이 자기의 잘못이 전혀 없이 일어났다면, 우선 진리의 의무를 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요. 그 뜻은 진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단 기회가 주어지면요. 다른 사람들이 다칠 위험이 있을 때는 진리의 의무를 한번 해 봅니다. 진리를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나, 변명이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는 자신의 아픔과 억울함을 하느님께 사랑과 겸손의 선물로 드리고 그 고통을 침묵하면서, 용서하고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인내 합니다. 변명은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하지 않으면 더욱 축복 받게 됩니다.


진리의 의무를 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한번 이야기 하고 그래도 상대방이 듣지 않을 때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봉헌 하고, 침묵 안에서 하느님께 맡기고 그것에서 오는 모든 잡념에서 빨리 해방되도록 잊으십니다. 이것을 통하여 유혹자는 하느님께 마음을 집중 못하도록 유혹 하면서, 기도의 힘을 빼갑니다. 마음의 흐트러짐은 영혼의 독이며 기도의 죽음입니다. 깊은 기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잡념 때문에 피로해 지고 지치게 되어 기도를 소홀이 하게 만든 다음 포기하게끔 유혹자는 유혹 합니다. 그리고 유혹자는 계속해서 기도를 할 수 없도록 방해물을 던집니다. 그러면 영혼은 마음이 흩어져서 기도에 더욱 집중할 수가 없게 되어, 기도에 불충실하게 되고 그 다음 생략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점 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유혹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보호의 방법은, 다른 이의 말을 옮기는 사람이나 부정적 말이나 투덜거림의 영을 갖은 사람의 말을 들어 주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고, 이런 사람을 격리하고, 악에게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의 귀한 시간을 배려 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에와가 뱀이 하는 말을 아예 듣지 않았다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자에게 자기의 시간을 주고 그 말을 듣기 시작했을 때, 에와는 이미 유혹자의 사슬에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그 다음 에와는 혼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혹자의 도구가 되어 아담에게 다가와 유혹의 말을 걸었을 때, 아담도 에와의 말을 들으려 시간을 주는 순간 또 유혹자의 그물에 발목이 잡혀 걸린 것입니다. 이렇게 악의 사슬에 발목이 걸린 사람은 혼자 넘어지지 않습니다. 죄에 넘어트릴 사람들을 찾아 나서서 유혹자의 도구가 됩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선한 말이 아니고, 부정적 말이나 투덜거림의 말은 그것을 들어야 할 의무가 없으면, 독사뱀을 피하듯 그 사람을 피하는 것이 바로 유혹에서 구원되는 방법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자 발을 멈추는  순간 이미 악의 사슬에 발목이 잡힙니다.


악한 소문을 만들거나 동조한 사람들로 지옥이 가득 찼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시고, 얼마만큼 다른 이의 이름이나 평판을 훼손시키는 죄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악 소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을 당해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겸손하게 그리고 절대로 죄를 짓지 말고, 침묵 속에서 인내하고 봉헌 할 때 하느님의 정의는 착한 사람의 억울함을, 무심하게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의 때에 당신이 선택하신 방법으로 진리를 들어나게 하시고 그것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용서하고 침묵하고 이탈한 상태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만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잘 인내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에 대한 넘치는 보상을 주십니다.


저는 지난 30여 년간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여 오고 있으면서, 억울한 경우,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경우, 핍박, 박해, 중상, 모략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련과 고통을 받아 오고 있습니다. 자신에 결백함을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꼭 변명이 필요하면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변명 하게끔 하여 주시고 원수 갚음이 필요하면 하느님의 정의가 원수 갚음을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너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하느님께서 이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정화시키시고 축복을 주시고자 허락하신 당신의 천상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세속적인 소음과 우리의 죄만 남게 됩니다.


저는 이런 고통과 시련을 침묵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변명하지 않고 받아드린 쓰라리고 아팠던 그 기간과 과정이,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주부 적 관상 은사를 받을 수 있게끔 수련시켜주고 준비하여준 천상축복의 시간 들이였습니다.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또 자신이 많이 변화되는 것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주부 적 관상을 받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고통과 시련은 꼭 옵니다. 거절하지 마시고 겸손의 지팡이로 꿋꿋이 버티고, 침묵 안에서 오직 하느님과만 함께 지나면서, 이것을 역 이용하여 주부 적 관상의 은사나 자신의 성화에로 진보 할 수 있는 수련 도구로 이용합니다.


성 프란시스코 살레시오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남에게로부터 욕을 먹거나, 모함을 당할 때는 이것에 무관하여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은, 과민하게 느끼거나 반발하거나 쟁론하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비방은 이를 무시해 버리면 점점 소멸되고, 이에 너무 관심을 두는 것은 비난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신심의 수업, 덕행의 진보, 영원한 복락을 위한 노력 때문에 조소하고 비방하며 악한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모름지기 그런 상스런 무리들은 달을 보고 제멋대로 짖게 내버려둬라. 비록 그런 패들이 다소간 우리의 신용에 관해서 악평을 퍼뜨리고 우리 명성을 깎아 버렸다 해도, 얼마 안 되어 이것이 재생되고 독설의 면도칼은 마치 포도의 곁가지를 쳐서 그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함 같이 도리어 우리의 신용을 두텁게 할 기초가 됨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명성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달에는 관상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하나 하나를 읽고 묵상 합니다. 또 관상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성찰 합니다. 다음 고통에 대하여 묵상 하십니다. 다른 이에 대한 말을 하는 악습을 끊어 다른 이를 중상, 몰이해, 박해하는 사탄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을 결심합니다. 현재 받는 시련과 고통이 있다면 박해를 위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의 방법으로 받아드립니다. 우리의 죄 없이 받는 모든 고통과 시련은 우리가 천국 가는데 타고 가야 할 교통수단입니다. 여러 형태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하느님과 천국을 향하여 충실하게 항구하게 가다 보면 관상의 은사 또는 다른 지상에서 맛볼 수 없는 천상의 행복을 주십니다


(  www.ojunim.org에서 뽑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