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정태현 신부님의 성경의 맥

성경의 맥 1 - 정태현 신부님

김레지나 2008. 8. 28. 20:50

제가 정태현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정리한 것입니다. 부족한 정리가 신부님의 훌륭한 강의에 누가 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동양의 종교입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대륙의 가운데 쯤에  팔레스티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마 아랍사람처럼 생기셨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셨고,,,모든 인종을 합친 외모를 갖고 계셨을 겁니다.


여호와증인들이 선교를 다니면서 성당에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잘 걸려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의 감언이설에 잘 속습니다. 그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대체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적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신자들 모두 말씀에 맛들여야합니다.


성서에는 대부분 엉망진창인 내용들이 나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 장자권 가로채기, 등등,, 그런 엉망인 이야기들이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완벽한 인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매력이고 저한테 위안을 줍니다.)성서의 내용이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하면 성경공부하면서 헤매기 쉽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4가지 맥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첫 번째 맥은 ‘’입니다.


성경에는 haya 동사 (be 동사와 비슷) 와 halak (걷다) 동사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인간은 나그네, 도인, 즉 길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길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방황 - 목적지가 없이 헤맴

   안주 - 움직이 않으려는 것

   순례 -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 즉, 하느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

순례와 방황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순례는 목적과 방향이 있고, 반면에 방황은 목적과 방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방황, 안주, 순례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은 이야기입니다. 법전처럼 딱딱하지 않아서 하느님께 관심을 더 갖도록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숨을 불어넣으셨는데, 숨은 생명을 가리킵니다. 뱀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사탄이란 ‘중상모략가’라는 뜻입니다. 뱀은 고대근동에서 다산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접근합니다.

하와는 “하느님께서 선악과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라고 뱀에게 이야기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따먹지 말라고만 하셨고,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안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바꾸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뱀이 유혹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후에 첫 번째 반응은 하느님 앞에서 몸을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아주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인간은 떳떳치 못한 일을 했을 때 숨어있게 됩니다.

그러자 “알몸이 부끄러워(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었기 때문에 제가 먹었습니다.” 라면서 여자를 고발합니다. 형제자매를 고발하는 것은 하느님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또 뱀을 고발합니다. 뱀을 만드신 하느님을 고발하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성모님이 장차 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의 주인이 되려고 했으나 추방당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낙원문을 걸어 잠그지 않으시고, 함께 나와서 인간과 함께 순례여정을 걸어가 주셨습니다.


선악과에서 선과 악은 착한행동과 악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선은 인간에게 행복, 이익이 되는 행동, 구원을 말하고

  악은 인간에게 불행이 되는 행동, 멸망을 말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 는 것은 “인간 스스로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을 좌지우지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방황하다가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므로 순례여정을 걷게 됩니다.


창세기 4장: 카인이 아벨을 죽이자 하느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묻습니다.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묻는 말이고,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묻는 질문입니다. 카인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고 대답하니, 하느님께서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카인이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고 뻔뻔하게 하소연합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대들어서 부모가 화나면 자식에게 집을 나가 버리라고 큰 소리칩니다. 그 때 자식이 정말로 씩씩대면서 짐싸고 나가려고 하면 더 화가 납니다. 그런데 자식이 “저 나가서 고생하는 것은 달게 받겠지만, 부모님 얼굴을 다시는 못 볼 것이 더 속상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부모들이 화난 마음이 녹아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카인의 말에 누그러지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의 보호자가 되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카인은 하느님의 호의를 얻고 축복을 받으려고, 즉 안주하려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카인의 길을 ‘순례의 길’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지방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이전 사람들은 원조라고 부르고 아브라함 아후 사람들을 선조라고 합니다. 선조란 ‘거룩한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르 는 기원 전 6000년 경에 세워진 부유한 도시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서 페르시아만으로 빠져나가는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큰 갑부였지만 하느님께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내가 일러준 땅으로 가거라, ”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0세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도 잘못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자신의 동생이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 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면 낯선 지방의 사람들이지만 예쁜 자신의 부인에게 잘 보이려고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잘 대해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아브라함의 부인에게 수청을 들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았더라면 봉변을 당할 뻔 했습니다. (성경에는 완벽한 인간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 점이 매력이고, 그 점이 고맙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르 지방에서 안주하다가 가나안 지방으로 순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성경에 ‘시험하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어려운 시험을 받을 수록 하느님께서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주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 큰 시련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장작을 지고 가면서 “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하고 대답합니다. 그 후로 아브라함과 이사악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뛰어난 문학가입니다. 아브라함 부자의 비통한 마음을 짧은 두마디에 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간이역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간이역들은 종착역은 아닙니다. 명예, 재산, 자식들은 모두 다 간이역들입니다. 순례길의 목적지는 아닙니다.

2004년 여름에 한 자매가 고속도로 가다가 차에서 내려 포도를 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8톤 트럭이 덮쳐서 차에 타고 있던 아들 둘과 친정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젊었을 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었는데, 남편이 조기퇴직하고 두 아들을 키우려고 안해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는 데 바빠서 하느님을 포기했던 겁니다. 그 자매님의 친구들이 장례미사를 대신 신청해서 미사를 드리는데, 그 자매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180일간을 죽은 아들들을 위해서 미사를 드릴 때마다 두 명의 동창생이 부축을 하고 왔는데,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자매님에게는  두 아들이 인생의 목적지였던 겁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모든 것은 다 간이역입니다. 자식도 간이역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도 간이역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종착역 뿐입니다.

이 세상 순례의 길의 목적지인 종착역까지 가장 안전하게 잘 걷는 방법은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아담이 130세 때 아들을 낳았다고 하고 93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나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당시 ‘장수’, ‘재산’, ‘자녀’는 하느님의 축복을 의미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므투셀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히브리 원문은 ‘살아가면서'라기 보다는 ’걸으면서‘라는 뜻입니다. 저는 ’걸으면서‘라는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번 새번역 성경에 ’걸으면서‘라고 번역하자고 주장했었는데, 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을 잡고 더 빨리도, 더 늦게도 아니고, 같이 걸어가야 안전하게 순례의 길을 마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손을 잡고, 끌어주시기도 하시고, 늦춰주시기도 하시고,.... 같이 걸어가 주십니다.

성경에는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걷다가 사라졌다. 또 한사람 노아, 아브라함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인간 개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맥’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방황을 하고 있나? 안주하고 있나? 순례하고 있나? 하느님과 함께 안전한 순례를 하고 있나?


탈출기부터는 개인이 아닌 한 민족의 순례, 방황이 그려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고기냄비에 맛을 들여서 이집트에 정착하는 대신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이집트에 있다가 시나이 광야에 들어가서 방황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남의 천막 안에서 함께 기거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안주합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의 풍습과 신을 받아들이고 안주해버립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다시 그들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버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방황에서 빼내셔서 다시 팔레스티나로 불러들이십니다.  .(안주- 순례- 안주-방황-)


창세기 개인의 역사에서 탈출기 단체의 역사로 넘어가는 이음새 역할을 하는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의 유모가 친엄마였기 때문에 친엄마로부터 젖과 신앙을 함께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십장이 히브리인 노예를 심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그 십장을 죽입니다...... 그러다가 들통나서 도망을 갑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시나이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 시절이 모세에게는 가장 어둡고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모세에게는 가장 어두운 그 때에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에게 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려 주십니다. 모세에게도 안주-> 방황 -> 순례 가 이어집니다.

(탈출기 3장)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셨는데,, 그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 hesed (헤셋) 이라는 말은 성실한 사랑, 흠없는 사랑, 조건없는 사랑,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랑을 뜻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자애’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hesed의 뉘앙스를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너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해주겠다. 라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꼭 지키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와 하신 약속은 꼭 지키신다는 뜻에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시면서 4번이나 부탁하십니다. 모세는 자꾸 핑계를 댑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시지요.” “징표를 보여주십시오” 등,, 하느님께서 모세의 부탁을 다 들어주셨는데도 모세는 “저는 말솜씨가 없습니다.”(탈출 4, 10) 라면서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탈출 4, 14-15)”라고 타이르십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처럼 우리에게 소명을 주실 때 반드시 우리의 동의를 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탈출 7, 3), 라고 씌여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러신 이유는 모세도, 백성도 믿음이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부러 반대세력에 부딪치게 하셔서 그 세력을 꺾어나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보고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시나이에 갔다가 떠난 1년간의 기간을 이야기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시나이 계약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두 번째 맥은 계약과 계명입니다.


계약과 계명은 창세기와 묵시록까지의 성서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맥입니다.

우리는 흔히 계명을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로 삼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신자들은  대죄 지어서 지옥가지 않으려고 마지 못해 미사참례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미사참례를 할 때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한주간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미사참례를 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임신해서부터 수입지출 장부를 적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진통- 지출, 아기가 웃는다- 수입..... 이런 식으로요. 어느 날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장부를 펼쳐서 계산해보고 지출이 더 많으니 그것을 1년 동안에 갚지 않으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니지요.

하느님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잘 지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이 계약입니다.

성당에서는 하라는 것도 많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으니,, 편히 살다가 늙어서 나가보자 라고 생각하거나 수동적으로 마지 못해 믿는다면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미리 알고, 하느님을 앎으로써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성서입문( 일과 놀이 출판사, 한님 성서연구소 정태현 지음) 책 P181에 계약의 정식(定式)여섯가지가 나와있습니다.

계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주종계약과 평등계약입니다.

주종계약은 주인이 되는 임금과 종이 되는 임금 사이에서 맺습니다. 보통은 힘이 있는 쪽에서 계약을 먼저 맺자고 합니다. 조공 바치고, 전쟁시에 군대를 보내라,, 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시나이 계약은 반대로 하느님이 주체가 되셔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입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야훼’를 다 ‘주님’ 으로 옮겼습니다. 동양의 관습에도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호바흐(야훼) 4글자를 써 놓고, 유대인들은 야훼, 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고쳐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란 ’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느님의 이름만 쓰는 펜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쓰다가 잘못 쓰면, 양피지를 새 양피지로 바꾸어서 다시 써야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서를 쓰려면 보통 양피 200마리 분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리이스 70인역 성경에서는 ‘야훼’를 ‘kyrios'(주님)으로 바꾸어 썼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새번역성경에서도 ‘야훼’대신 ‘주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탈출기 19장 4절-6절 “...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독수리 날개 위에 태워,,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표현은 깊은 뜻을 갖습니다. 독수리는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때 하늘 높이 떠올라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몇 번 날개짓하다가 힘이 빠져서 떨어지면 어미가 다시 새끼를 잡아채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다시 떨어뜨리고 잡아채고를 반복하다보면 새끼가 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나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바로 데리고 가면 그들이 어엿한 신앙공동체로 자랄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유가 되리라.”에서 소유의 원어는 ‘수굴라’입니다. 수굴라 란 고대근동에서 임금이 가장 아끼는 보석을 가리킵니다. 우리들 한 사람 , 한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보석들입니다. 우리가 그 보석과 같은 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면 먼지가 묻어서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존재는 세상에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 각자가 하느님께는 유일무이한 보석입니다. 그러니 다른사람이 되려고 다른 사람 흉내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되는 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면 주부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성모님의 생애 99%는 주부로서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30년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으로 사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업을 이어받아 목수로서 사셨습니다. 우리들의 진부하고 평범한 삶이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생명을 낳고, 생명을 돌보고, 손상된 생명을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주부는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일을 직접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일을 간접적으로 돕는 일을 할 뿐입니다.)


(성서입문 책 p. 182에서) 시나이 계약의 요소를 보면 당시의 주종계약과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종속국 임금이 의무를 이행하면, 종주국 임금에게 혜택이 돌아갑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하면 오히려 우리가 큰 덕을 봅니다. 하느님과 관계된 1,2,3 계명 조차도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4계명부터는 인간과 관계된 계명입니다. 효 가 모든 덕의 근본이니 4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 입니다. 부모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도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들도 쉬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풍산신을 섬겼습니다. 남신과 여신이 있고,, 신전창녀들이 많았습니다. 노예들 중 반반한 사람을 골라서 신전창녀로 만들었습니다. 남녀신이 화합하면 풍산( 아들 딸 많이 낳고, 곡식소출이 많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남신과 여신이 움직이지 않으니 사제들이 그 신들을 자극한답시고 제물을 바치기 전에 창녀들과 신전에서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아주 혼란스러운 성관계가 신전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간음한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해져라. 하느님 한 분만 섬기고 그 외의 어떤 신도 섬기지 마라.. 라는 계명도 결국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시나이 계약, 십계명은 모두 백성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끊임없이 파기합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계약에 충실하십니다.


성서입문 p189- 190에서 옮깁니다.

“시나이 계약은 더 이상 계약이 깨질 위험이 없을 때 확립될 것이다. 예레미랴는 시나이 계약의 확립을 새 계약으로 묘사한다. ”그 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 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올 EO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그 시절이 지난 다음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게 될 계약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 가슴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으르 써 넣으리라. (시나이 계약처럼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그 때에는 더 이상 제 이웃이나 동기간에 서로 ‘주님을 알아 모셔라’라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 모두가 다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나를 알아보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예레미아, 31, 31 - 34)


예레미아의 예언은 6백여 년이 지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온 인류와 맺으신 새 계약에서 성취된다. 신약성서에서 계약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만탄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에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내어 주신다. 이는 당신 자신을 과월절에 바치는 빠스카 양과 같게 보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다음 날(유다인 날짜 계산법으로는 같은 날)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목숨을 빠스카 양으로 내주셨다. 복음서 저자들은 특히 십자가의 피흘림에 주목한다. 시나이 계약에서도 피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모세는 짐승의 피 절반을 제단에 뿌려 제단을 정화한 다음, 계약의 내용을 백성에게 들려 주고 나머지 피는 백성에게 뿌리며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탈출 24,8) 레위기에서 짐승의 피는 속죄예식에 쓰였다. (레위 17,11) . 곧 어떤 사람이 계약긔 규정을 어겼을 때에 그는 짐승의 피로 자기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한 계약의 위반에 따르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짐승의 피와 관련된 탈출기돠 레우기 두 대목은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나의 �.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마타 26,28..) 바울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맡아 지셨다고 말한다. (갈라 3,13)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새 계약이 옛 시나이 계약의 저주를 영원히 철회한 것이다.“


새 계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즉, 계약을 맺는 두 당사자의 피가 합쳐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 당신의 피와 인간의 피로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1절에 새 계명, 이 나옵니다. 새 계약에는 새 피가 필요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헌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당신만을 사랑해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즉, 예수님께서는 10가지 계명을 단 한가지 계명으로 다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이 새계명입니다. 당신의 몸을 식사 때마다 먹는 음식으로 대치시키셨습니다.


그 당시 계약을 맺는 예식에는 일반적으로 짐승을 둘로 가르는 의식과 공동 식사가 뒤따랐습니다...(성서입문 p, 185).. 계약을 어긴 사람들ㅇ을, 내 앞에서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그 송아지처럼 만들어버리겠다..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과 시나이 계약을 맺은 다음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계명을 주신 다음,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식으로 승화된 것이 바로 미사전례입니다. 미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미사할 때마다 신자들한테 만원씩 준다고 하면 아마도 미사를 더 많이 하려 애쓸 것입니다. 미사의 은총은 돈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미사 때마다 “이는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라고 합니다. 미사의 가치와 은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스위스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떤 부인인 고기를 사러 정육점에 갔는데, 마침 돈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고기 한 근을 주시면 제가 대신 미사 한 대를 봉헌하겠습니다.”라고 청했답니다. 정육점 주인이 “대체 미사 한대가 뭔대요?”라고 하면서 그럼 그 무게를 재봅시다.  그리고 종이에 미사 한대, 라고 쓰고 고기와 함께 저울에 달았답니다. 그런데 미사 한대라고 쓰인 저울 쪽이 내려가서 아무리 많은 고기를 반대 편에 올려 놓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마침 고기를 사러 갔던 신사가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매일 미사를 참례하였고, 그 아들이 사제가 되었답니다.)

미사에는 새 계명, 새 계약, 만찬이 다 들어있습니다. 미사의 은혜는 무엇으로도 측정할 수 없습니다. 미사는 계약과 계명이라는 성서를 관통하는 중요한 맥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실리아씨는 00복집이라는 음식점 주인입니다. 열심한 개신교 신자였다가 카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그 분은 미사 때마다 우십니다. 왜 그리 우시느냐고 물으니 “개신교에는 말씀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몰라요. 하지만 말씀 뿐이예요. 천주교에서는 성찬의 전례에 예수님께서 음식이 되셔서 저한테 오시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성체를 무덤덤하게 습관적으로 모십니다. 그 이유는 세실리아 자매님처럼 신앙이 말씀으로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말씀으로 마음을 덥히지 않아서 성체를 감동없이 모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그러다가 식사 중에 빵을 떼시자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사라지시자 제자들은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 32)

그래서 말씀의 전례가 성찬의 전례에 앞서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가 있어야 성찬의 전례 때 감격스럽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세 번째 맥은 ‘구원의 역사’ 입니다.


구약의 뼈대는 이스라엘 역사이고,

신약의 뼈대는 예수님의 역사이며,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 라는 개념과 고대 근동인들이 갖고 있던 역사의 개념은 다릅니다. 우리들은 ‘역사’는 6하 원칙에 의해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사람처럼 조작을 하면 그것은 역사로서의 가치를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는 사실에 근본을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사실’보다는 ‘진실’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역사는 ‘진실’ (Truth)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사실(fact)'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역사이지만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책입니다.

창세기 1,2 3 장은 ‘진실’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진리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창세기를 바탕으로 천지창조를 설명하려고 과학적으로 따지면 실패하게 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지구의 나이를... 생명체가 없었던 무생대- 단세포 동물이 있는 시생대- 아메바, 플랑크톤의 원생대 - 이끼류가 있는 고생대 - 파충류의 시대인 중생대- 포유류의 시대인 신생대- 빙하시대,, 등으로 배웠습니다. 저는 시험을 보면서 하느님과 대화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하느님께서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거든요. 죄송하지만 그래도 점수는 잘 맞아야 하거든요.”라구요. 그래서 배운 대로 써서 과학시험에서 100점을 맞아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제 신앙과 위배되는 답안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또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하셨기에 여자들이 남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더 많은 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무척 실망했습니다. 참 순진한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요즘에도 그렇게 순진하게 성경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려는 책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은 픽션, 지어낸 이야기,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원은 어디인가? 인간은 왜 죽고, 왜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는가? 여자는 왜 진통을 겪는가? 뱀은 왜 징그럽고, 왜 사람과 원수처럼 지내는가? 왜 죽도록 고생해야 낟알을 먹을 수 있나? 그런 당시의 문제들에 대한 깊은 사색과 반성이 들어있습니다. 사색과 반성을 한 끝에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하신 뜻은 갈비뼈는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고 있으니, 남녀도 서로 가깝게 지내고 서로 보호해주어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옛날에 말하는 뱀이 있었나?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나? 라고 따지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FACT 로 보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폭력으로 가득찬 세상이었습니다. 폭력은 죄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니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게 했습니다. 카인의 이야기에서 ‘죄’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폭력은 카오스로 이끕니다. )


성경이 법조문과 같다면 달리 해석하면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이야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창세기는 이야기이므로 음악가, 극작가, 문학가, 등이 수많은 해석을 해 왔지만,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점이 ‘이야기’가 지니는 강점입니다.


익산에 있는 신동본당의 수녀님께서 어느 날 “신부님 큰 일 났어요. 원대 교수님 한 분이 교리에 참석하시다가 갑자기 나오시지 않아요. 그 이유가 성서 때문이래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교수님의 부인은 열심한 신자이셨는데 아무리 남편을 설득하려고 해도 신앙을 갖지 않았답니다. 은혼식에 남편에게 선물로 성당에 나가보라고 부탁을 했더니,, “신앙이 없는 데 있는 척 할 수도 없으니, 성당에 나가는 것은 곤란하고, 당신 소원이면 성경공부는 해보겠소”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성경을 배우시다가 여호수아서에서 문제를 발견하신 겁니다. 여호수아기에 이스라엘 사람이 가나안 사람을 대량학살하도록 하느님께서 조장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가축들 모두 다 안 죽였다고 하느님께서 장수를 벌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 교수님은 도저히 그런 하느님은 못 받아들이겠다고 공부를 그만 두셨답니다.

우리들도 구약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믿어보려 합니다. 하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또 누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놀릴까 봐서 ane지도 못하고, 성경에 깊이 맛들이지도 못하게 됩니다.

해결방법은 간단합니다.

성경에는 작중연대저작연대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작품상의 연대는 태고적입니다.

하지만 저작연대는 기원 전 589? 539? (받아쓰다 놓쳤습니다요..) 바빌론 유배시절입니다.

여호수아기의 작품연대는 기원전 1200년 경입니다.

여호수아기의 저작연대는 유배기간 말기, BC 587-539년까지 바빌론 유배 끝날 때쯤입니다.

여호수아기의 저자는 왜 우리가 약해서 남의 나라살이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다가 “우리가 가나안의 풍습을 받아들여서 하느님께 벌받아서 유배살이를 했다”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기의 저자는 “우리가 다시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우상숭배해서도 안되고, 가나안인들과 결혼해서도 안되겠다.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여서도 안되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토착민들을 다 쓸어버려야한다는 뜻으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것이 여호수아기의 저자에게는 ‘진리’(TRUTH)였습니다. 그러나 ‘사실’(FACT)는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인들을 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기 이후에도 가나안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기의 저자가 전달하려고 했던 중요한 진실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겠다”였습니다.


또 한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민족으로 삼았을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뽑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의 샘플일 뿐입니다. 추곡수매할 때 쌀가마에서 일부를 뽑아보고 1등품, 2등품 도장을 찍듯이,,, 구체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한테 올 수 있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한 백성이 필요했고 그 백성의 역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샘플로 이스라엘이 뽑힌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유배를 당하건 말건, 가나안에서 정착을 하건 말건,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상징과 비유로서 우리들에게 의미를 갖습니다.


네 번째 맥부터는 다음 강의 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