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말하는 하늘나라
정태현 신부
(전주교구, 성서학자)
사람이 죽고 나면 ‘좋은 곳에 갔다’ 또는 ‘좋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보통 ‘하늘나라(천국)에 갔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어떤 곳이냐?”하고 물으면,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과 좋은 집등 물질의 풍요로움에서 시작하여 완전한 자유와 기쁨과 평화 등, 정신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 답이 제각각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 ‘하늘 나라’를 결국 인간의 최종 구원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다음 세상을 두고 어떻게 말하는가? 성서에서 하늘나라와 관계 있는 개념들은 하늘, 낙원,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다. 이 가운데 가장 대중적 개념인 ‘하늘’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동안 다양한 의미로 발전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하늘’의 다양한 의미를 먼저 살펴보고, 여기에 다른 개념들을 연결시켜 우리가 지향하는 최종구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히브리 우주관에서 본 하늘
고대 히브리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평평하고 둥근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우주관에 따르면 이 땅은, 활 모양으로 휘어진 단단한 껍질(욥기 37,18), 이른바 ‘궁창’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 궁창에는 해, 달, 별들이 붙박혀 있다. 궁창은 산 기둥들로 떠받쳐 있으면서(욥기 26,11)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는 구실을 한다(창세 1,6-7). 하늘이 파란 이유도 바로 이 윗물의 색깔 때문이다. 하늘의 물이 궁창에 난 창문들을 통과하여 지상에 떨어지면 비가 된다. 노아의 홍수 때에는 아예 궁창이 열려 윗물과 아랫물이 합해졌다. 땅 역시 하늘처럼 기둥들로 떠받쳐 있는데, 이 땅 기둥들 사이로 죽은 이들의 처소인 ‘셰올’이 자리잡았다. 지상의 인간들이 죽으면 이곳에 내려가 의식은 있으나 활동력을 잃은 채 머문다.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서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하늘은 땅과 궁창 사이의 공간, 궁창, 궁창 위의 윗물이 자리한 곳, 그 위의 화천(火天), 그 위의 천상 조정 등 지상 위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화천은 하느님의 병기인 천둥과 번개, 비와 눈, 우박과 폭풍을 보관하는 창고이다(욥기 37,9; 38,22; 시편 135,7; 예레 10,13). 화천 위의 천상 조정에서는 하느님이 천사들을 문무백관처럼 거느리시며 세상의 일을 주재하신다(욥기 1,6-12).
하늘은 징표가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노아와 맺은 계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하늘에 나타나게 하셨다(창세 9,12-17). 하느님의 권능은 하늘과 땅에 일으키시는 징표와 기적으로 크게 드러난다(다니 6,27). 하늘에 나타나는 징표들은 지상에 내리는 하느님이 심판, 특히 종말의 심판을 포함하기도 한다(요엘 2,30-31; 마태 24,30; 묵시 15,1). ‘하늘과 땅’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며,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다(이사 65,17; 2베드 3,13; 묵시 21,1).
하늘은 하느님의 처소
이스라엘인들은 시나이산(신명 33,2; 시편 68,17), 예루살렘 성전(1열왕 8,12-13; 시편 68,17-18; 에제 43,7)이나 시온산도 하느님의 처소로 여겼지만, 하느님의 가장 고유하고 합당한 처소는 역시 하늘이었다. 하늘에는 하느님의 옥좌가 놓인 궁전 또는 성전이 있고, 그곳에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위에 임금으로 군림하신다(이사 6,1: 시편 11,4).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요 땅은 그분의 발판이다(이사 66,1). 하늘이 하느님의 처소라는 말은 그분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피조물과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늘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느님을 완전히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하늘의 하느님’(2역대 36,23; 에즈 1,2; 요나 1,9)은 ‘땅의 하느님’이시기도 하며, 때때로 지상을 방문하신다(창세 11,5.7; 출애 19,18; 이사 64,3). 곧 하느님은 하늘에 멀리 떨어져 계시는 초월자이신 동시에 창조된 세계와 인간 역사에 깊이 개입해 들어오시는 내재자이시다. 하늘이 하느님의 처소인 까닭에 하늘은 구원의 원천이요 구원이 실현되는 자리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인 만나도(출애 16,4),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축복도 하늘에서 내려왔다(창세 49, 25; 신명 33,13).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생각이 유다교 안에서 점차 발전해감에 따라 그런 삶이 하느님의 처소인 하늘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도 생겨났다(다니 12,2-3 참조). 신약성서에서는 하늘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보상의 장소로 여겼다(요한 14,
2; 2고린 5,1-10; 묵시 11,12).
한편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 저자들은 하늘의 모습이나 내용을 알고 싶어하는 강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여러 외경 문헌의 저자들은 에녹, 아브라함, 바룩 같은 큰 인물들을 내세워 하늘에 관한 환시와 하늘 여행을 묘사한다(1/2 에녹, 아브라함의 예언, 3바룩). 이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하늘이 어디에 있는지, 그 주민들은 누구인지, 재판하는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그밖의 여러 가지 비밀들이 계시된다. 유다 랍비 문헌에서는 하늘을 보통 일곱 개로 본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2서 12장 2절에서 ‘셋째 하늘’을 언급하는데, 이는 하느님과 천사들과 성도들이 사는 가장 높은 하늘(‘하늘 위의 하늘’ : 신명 10,14; 1열왕 8,27; 2역대 2,6; 느헤 9,6)을 말한다. 이곳은 앞에서 언급한 천상 조정을 가리킨다. 여러 하늘 가운데에는 악인들을 벌주는 곳을 포함하는 하늘도 있다.
하늘에 오른 사람
신구약성서를 통틀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은 에녹(창세 5,24), 엘리야(2열왕 2,1-12), 예수님(루가 24,51; 사도 1,9), 바오로(2사무 12,2-4), 요한(묵시 4,1)이다. 또 주님이 하늘 어좌와 천상 조정을 본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의 원로들(출애 24,9-11), 미가(1열왕 22,19-23), 이사야(이사 6,1-13), 에제키엘(에제 1장; 10장)이다. 하늘에 올랐거나 하늘을 방문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신구약성서 말고 고대근동 문헌과 헬라 문헌에도 나온다. 이 기록들을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처음 두 가지의 기록은 주로 고대근동문헌과 구약성서에 나오고, 나머지 두 가지의 기록은 헬라 문헌과 신약성서에서 쉽게 눈에 띈다.
첫째 것은 하늘을 침범한 경우이다. 히브리인들을 비롯하여 고대 근동인들의 우주관에서 인간은 땅에 속한 존재로서 죽으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한번 지하세계로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이런 인간이 하느님과 천사들에게만 유보된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은 일종의 침입 행위이다. 아카드 문헌에서 에아의 아들 아다파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늘에 올라가려 했다가 지상으로 다시 쫓겨났다(〈고대근동문헌〉101-3). 구약에서도 하늘에 오르려 했다가 지하 세계로 내쫓긴 인간의 운명이 언급된다(이사 14,12-20).
둘째 기록은 계시를 받으려고 하늘에 올라간 경우이다. 이 경우에 인간은 하늘에 왕복 여행을 하거나 천상환시를 체험하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하늘의 여행과 체험은 첫째 경우와는 달리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 형태로 계시를 받은 것(출애 24장), 이사야가 환시를 통하여 예언자 소명을 받은 것(이사 6,1-3), 앞에서 언급한 에제키엘의 천상 어좌에 관한 환시와 미가야의 천상 조정 환시가 모두 이 경우에 속한다. 여기서 하늘의 여행과 체험은 계시의 내용에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하는 구실을 한다.
셋째는 천상 세계의 복락을 미리 맛보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하늘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는 점에서 계시를 받으려고 하늘에 올라가는 둘째 경우와 구별이 잘 안 된다. 그러나 이 두 경우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천상 세계에 다시 돌아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둘재 경우에는 하늘 여행을 하거나 천상 환시를 체험한 사람이 나중에 죽어서 다시 그 천상 세계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없지만, 셋째 경우에는 천상 세계를 미리 맛본 사람이 죽음의 나라(셰올)에 가지 않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에녹은 살아 생전에 천상 세계를 잠깐 체험할 때 나중에 다시 하늘로 올라와 영광과 영원한 천상 생명을 영원히 누리리라는 말을 듣는다(1에녹 37-71장). 신약시대에는 바오로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들려올라간 체험을 한다(2고린 12,2-4).
넷째는 불사불멸하는 천상 생명에 들어가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죽어 없어질 인간이 하늘의 영역에 오름으로써 불사불멸의 삶을 얻는 것을 말한다. 셰올에서 죽은 이들이 영원히 머무른다는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생각은 헬라 시대의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문헌에서 점차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의 불사불멸 사상으로 대체되어 갔다(다니 12,3; 지혜 3,1-9 참조). 이런 사상적 변화의 배경에는 인간을 본디 하늘에 속한 존재로 보고 그의 지상 삶을 천상 생명의 타락한 형태이거나 죽음의 세력에 일시적으로 예속된 상태로 여기는 헬라 사상이 깔려 있다. 인간이 불사불멸할 수 있다는 헬라 사상은 신약성서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신약성서 곳곳에서 의인들에게는 영원 생명이 주어진다는 약속이 되풀이된다(마르 9,42-45; 마태 25,46; 사도 13,48; 로마 6,23 등). 예수님의 부활은 의인들의 부활에 대한 가장 뛰어난 예표이다. 그분이 죽은 이들에게서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 영원한 삶을 누리듯이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도 같은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3; 로마 8,29-30; 1고린 15,20-28). 이제 죽은 이들의 부활, 영혼의 불사불멸, 하늘에 오름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정상적인 규범이 된다.
낙원과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
낙원이라는 말로 옮긴 그리스어 ‘파라대이소스’는 본디 페르샤(오늘의 이란)에서 빌려온 말이다. 고대 이란어에서 낙원은 본디 담이 있는 정원을 가리켰다 〈칠십인역〉은 히브리 본문(창세 2,8)의 ‘간에덴’(에덴의 정원)을 낙원으로 옮겼다. 낙원의 뜻이 태초에 인간이 누리던 영화와 행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확대된 낙원의 의미는 유다교에서 메시아 시대에 누리게 될 영화와 행복과 연결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낙원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루가 복음 23장 43절에서 낙원은 영혼들이 죽은 다음 곧바로 가서 안식을 누리는 곳으로 제시된다. 고린토 1서 12장 2-4절에서 바오로는 낙원을 두고 영화를 체험하는 ‘셋째 하늘’과 동일시한다. 낙원이 종말론적인 의미로 쓰인 것은 묵시 2장 7절에서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시련을 이긴 자에게 낙원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낙원은 시련으로 가득 찬 지상 생애가 영광스럽게 완성될 곳이다.
이렇게 발전된 낙원의 개념이 바로 우리 사이에서 통용되는 천국이나 천당의 개념과 유사하다. 천국의 대중적 개념은 물질적인 풍요와 마음의 평안을 마음껏 향유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우리를 기복신앙으로 이끌 수 있다. 본디 천국을 우리말로 풀면, ‘하늘 천, 나라 국’ 해서 ‘하늘나라’가 되는데, 천국이나 천당의 대중적 개념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늘나라는 거리가 멀다. 마태오 복음에 자주 나오는 ‘하늘나라’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으려는 유다교적 경외심에서 고안해낸 ‘하느님 나라’의 완곡한 표현이다.
그러면 대중적 개념으로서의 천국과 거리가 먼 ‘하느님 나라’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하느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통치 또는 그 통치권을 말한다. 곧 임금님으로서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선정(善政)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선정의 혜택은 당신 백성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어진다. 가난한 이들은 구약에서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으로 대표되고, 신약에서는 물질적으로 가나나한 이들뿐 아니라, 죄인, 꼴지, 채무자, 여자, 어린이, 장애인, 병자, 마귀 들린 자 등 인간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모든 이를 가리킨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인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넉넉하게 드러났지만, 온 세상 구석구석 모든 이에게 다 전달되지는 않았다.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시작과 완성사이에서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인에게 있어서 이 하느님 나라의 가장 보편적이요 핵심적인 요소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곧잘 동의어로 나타나며(마르 10,17-27; 마태 19,16-26; 루가 18,18-27; 요한 3,1-21),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영원한 생명으로 대체된다(요한 1-21). 또 요한 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구원과 동일시된다(요한 3,16-17). 영원한 생명 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계명을 지켜야 하고 온갖 신적 부와 권능을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취하신 예수님처럼 자기가 가장 애착하는 것을 봉헌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율법의 핵심인 사람의 이중 계명, 곧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루가 10,25-28).
이미 시작된 나라
‘하늘나라’ 즉 천국은 하느님의 영역이다. 따라서 그 나라에 간다는 말은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의 생명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통속적인 천국 개념은 다분히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관련 있다. 죽음 이후 육체가 사라진 뒤에는 물질의 부요함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이 죽은 뒤에 육신은 무덤에서 썩어버리고 영혼은 천당에 올라가 즐거움을 누리거나 지옥에 떨어져 괴로움을 겪되, 영혼은 형상이 없어서 세상의 육신이 받는 고락과 다르다”(정약종의 〈주교요지〉 22). 그러니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듯이 우리도 이승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바쳐 주변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할 일이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모셔들이는 지름길이요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삶의 최종 목표이다. ‘하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우리의 동참을 기다린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생활성서」98년 11월호)
'성경, 지혜의 샘 > 정태현 신부님의 성경의 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 맥 2 - 정태현 신부님 (0) | 2008.08.28 |
---|---|
성경의 맥 1 - 정태현 신부님 (0) | 2008.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