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김인호 신부님

현실 도피적 신앙 / 김인호 신부님, 평화방송 <건강한 그리스도인 되기> 강의

김레지나 2018. 7. 31. 19:00

평화방송 김인호 신부님의 < 건강한 그리스도인 되기 > 네 번째 시간

2018년 7월말 방송

현실 도피적 신앙

 

 

  김인호 신부의 건강한 그리스도인 되기 네 번째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신앙의 왜곡을 만드는 우리의 일상의 작은 부분들 하나를 더 바라볼 것인데요. 주제는 현실 도피적 신앙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골치 아프고 힘들고 조금 피하고 싶은 일들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일들입니까? 형제님들한테도, 자매님들한테도 있을 겁니다. 자매님들은 어떤 일들을 하기 싫고 피하고 싶지요? (청중: 집안일, 설거지) 형제님들은 어떤 일들이지요? (청중: 답 없음) 별로 없습니다.^^ 자매님들이 제일 하기 싫은 집안 일이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일이래요. 형제님들이 조금만 도와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명절날도 피하고 싶은 날일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 보고 성적표 나오는 날, 직장에서는 일 마감하는 날이라든가 누군가 어려운 상대를 만나서 영업을 해야 될 때, 또 상사에게 불려갈 때, 이런 순간들도 힘들고 피하고 싶은 시간들일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럴 때 어떻게 하시나요? 멀리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설거지도 잔뜩 쌓아둔 채 ‘아! 누군가가 해주면 좋겠다. 기계 좀 있으면 좋겠다.’ 하실 때가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잠을 자기도 하고요 친구들 만나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 부르면서 잠시 어려운 상황들을 피하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술을 마시면서 그런 일들을 피하고 싶어하겠지요? 요즘에 직장인들에게 월요병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월요일에 소포를 직장으로 보내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이름으로 보내서 월욜날 소포를 받을 수 있도록. 월요일을 얼마나 기다리겠지요? 나름대로의 방법을 통해 극복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잠시 어떤 순간을 통해서 어려운 순간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다보면 잠시 피하는 건 좋은데 돌아와서 해결이 안 된 경우가 많잖아요. 수다를 떨고 왔는데 집에 와서 설거지가 그대로 쌓여 있으면 스트레스가 더 심하지 않겠어요? 어떤 분들은 더 심하게, ‘지진 같은 게 일어나서 싹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고 해요. 이런 상황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명절 전이 되면 자매님들은 허리가 아프고 특별히 손목이 아픈 분들도 굉장히 많아요. 정형외과에 그때에 손목 기부스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진다고 합니요? 친정에 부인과 함께 남편이 가게 될 때 남편들은 머리가 아프고 갑자기 배도 아픕니다. 그때만 되면 돌아가시는 친구 아버지가 계셔요 세 번째 네 번째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고요. 아이들은 시험 볼 때만 머리가 아프고, 성당 가시 싫은 사람은 주일 아침만 되면 설사가 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낫게 되지요? 이걸 일명 꾀병이라고 부릅니다.

 

  유학 중에 제가 한국에 너무 돌아오고 싶어서 하나의 주문처럼 외웠던 것이 뭐냐면 ‘감기만 걸려라. 감기만 걸리면 아프다고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학생 때 수업 시간이 그렇게 싫었던 것 같아요 수업 중에 몸은 앉아 있는데 공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바깥에 나가 놀 생각, 맛있는 거 먹을 생각들 하면서 어려운 순간을 회피했던 것 같아요. 또 ‘잠을 자고 나면 많은 것들이 풀렸으면 좋겠다 ’하고 잠을 자기도 했고, 산책을 하기도 했고 영화나 드라마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어요. 이 정도면 그래도 고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씩은 이게 정도를 지나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유학 중에 너무 힘든 시간,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우리가 외국에 가서 외국말로 시험을 본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에요. 거의 써놓은 것들을 몽땅 외워야 하는 수준인데요. 제가 그 전날 머리 좀 식힐 겸 영화를 하나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자꾸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시험을 앞두고 들어오겠습니까? 영화를 통해서 휴식도 안 되고 시험공부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더 받고 그래서 또 영화를 봤습니다. 또 영화가 내용이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또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겁니다. 공부해야 되는데, 또 영화를 봤습니다. 그날 저녁에만 영화를 세 편을 봤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고 난 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지금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그리고 잠시 무엇인가로부터 도피하고 싶은데 도피처에서 나와야 될 거잖아요. 그지요? 그런데 나오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그 속에 있는 저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휴식과 도피가 약간의 차이가 있어요. 휴식은 다시 힘을 내어서 내가 마주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마주하기 위한 기회로 삼는 것이 휴식인데요. 그냥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건 도피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휴식과 도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휴식은 규칙이 있어요. ‘영화를 하나만 보자. 잠을 30분만 자자.’. 하는데요. 도피는 30분, 1시간 그냥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되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종종 그런 도피처 중에 성당과 기도생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틈만 나면 성지순례가고 교육에 가고 어떤 모임에 가고 또 성체조배에 많은 기도들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또 성당을 직장처럼 여기면서 왔다갔다를 반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의 이부자리만 가져다 놓지 않았을 뿐 성당을 집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런 분들 계신가요? 정작 성당에 상주해야 할 의무는 본당신부에게 있는데 그 의무를 신부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들이 요즘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성당에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이 정작 해야 될 역할들을 하지 않은 채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생활이라든가 성당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들, 불편한 마음을 자신의 신앙생활에 몰입하는 행동들을 통해서 조금 해소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일상의 문제는 점점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그럴수록 그 사람은 성당에 더 기도 생활에 더 몰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주제는 사실 굉장히 민감한 주제입니다. 때로는 염려도 됩니다. 자칫 성당에 열심히 나오면서 자기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까지도 통틀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같이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성당 일에만 매진한 채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로 조금은 축소해서 이해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남편이 화가 무척이나 났어요. 성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부인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이 남편도 성당에 잘 다니는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잘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이 하시는 말씀으로는 아이가 초등학생인데도 아이 엄마가 매일 기도모임에 나가고 봉사하러 다니느라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를 않는다는 것이지요. 남편이 퇴근해서도 또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도 엄마의 얼굴, 부인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부인에게 집안일에 조금 충실해졌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대요. 그런데 부인은 오히려 이게 다 우리 가정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왜 성화냐고 하면서 큰소리를 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남편을 향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훼방꾼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에 비록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때로는 남편인 주인공일수도 있구요. 또 자녀들도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다툼을 하다가요. 성경말씀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요. 어떤 말씀이냐면,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는 모습입니다.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는 예수님처럼 ‘이제 내가 신앙생활을 하니 이런 분열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응당 자신이 치루어야 할 전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라고까지 여기기도 합니다.

 

 

  신앙인은요. 본성상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분열을 체험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피할 수 있고 또 피해야하는 분열의 순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족들끼리 제사문제로 다툴 수 있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것으로 우리가 해야 된다 아니다. 유교문화의 전통 안에서 예를 해야 된다고 하면서 다투는 신앙인들이 많은데요. 이것은 조금 더 유연하고 조금 더 그리스도교 신앙을 폭넓게 해석하면서 얼마든지 일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유연함이 부족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단호함과 같은 성격적 특성으로 인해서 그냥 분열을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 예를 들면, 이 가정이 하느님 앞에 기도를 할 때 어떤 기도를 할 것 같으세요? 아마 부인은 이렇게 기도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 제발 저 인간이 기도하고 저 좀 방해하지 않게 해주세요. 사탄을 쫓아내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남편은 뭐라고 기도할 것 같으세요? “제 아내 좀 이제 가정으로 돌려주세요.” 아이들은 뭐라고 기도할 것 같습니까? “하느님 , 제발 우리 엄마 아빠 얼굴 좀 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종종 신앙 때문에 과부가 되기도 했구요. 홀아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순교로 인해서 갑자기 부모님을 잃기도 했고 부인과 남편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산 과부, 산 홀아비, 산 고아들이 많습니다. 남편들을 아내를 잃었고 아내는 남편을 아이들은 부모를 잃었습니다. 이게 과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신앙활동이나 기도, 미사 등과 같은 그런 경신례적인 활동 안에서두요. 우리는 얼마든지 현실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조금은 당황스럽게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1960년대에 머레이(?)라는 종교 심리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심리학자는 수도자 성직자들에게 영성생활의 기본 토대라고 하는 복음 삼덕인, 청빈, 순명 정결도 역시 우리 삶의 회피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가 이 말을 들으면 굉장히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택한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삶이 어딘가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것이라고? 하고요.

  그가 뭐라고 했냐면, 청빈은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랍니다. 내가 돈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노동을 의무로써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정결은요, ‘관계로부터의 도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서 그것으로부터 도주해서 혼자서 살아가는 것. 이건 참다운 의미의 정결이 아닐 수 있겠지요. 순명 역시도 누군가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명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일 수 있을까요? ‘결정이라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일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내 인생도 어려운 일이지만 누구의 인생에 대해 결정을 해야 될 때 그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편할 수도 있어요. 그런 것이 도피의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적인 고통과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만의 도피처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조금 심해져서 알코올이라든지 게임에 의존하기도 하구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에게 집착하듯 의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중독, 또는 의존이라고도 이야기하지요.

  신앙생활도 지금까지 말씀드렸듯이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불안을 없애기 위한 도피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영성생활이 자기가 마주한 고통과 불안을 잊게 해주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면 이것은 ‘영적 남용’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이런 영적 남용에 빠진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제가 어떤 자매님 한 분을 만났는데요. 이분이 성당활동에 너무나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대단하시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당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시다가 어떻게 해서 성당활동를 많이 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이가 너무나 큰 사고를 자꾸 저지르고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친 사고를 조금씩 수습했는데, 나중에는 경찰서에까지 가서 막대한 돈을 들여서까지 사고를 수습하게 되었답니다. 엄마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하느님에게 의존할 마음으로 성체조배를 그날부터 시작을 했대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 때까지 성체조배를 했는데요. 이 모습을 바라본 수녀님이 자매님이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나 좋아 보이고 그걸 꾸준히 몇 달째 하고 있으니까 자매님에게 와가지고는 “자매님, 성당에서 봉사활동 좀 해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권하시더랍니다. 이 자매님이 ‘아 이것도 하느님의 뜻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열심히 했대요. 이분은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성당에 와서 열심히 봉사를 했어요. 제가 너무나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이가 지금 몇 학년이지요?” 아이가 중학생이래요. “아이는 몇 시에 학교에서 오나요?” 한 6시쯤이면 온대요. “그럼 아이가 학교에서 왔을 때 집에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답니다. 제가 감히 그 자매님에게 “자매님, 자매님이 조배하실 분은요. 예수님이 아니라 아드님이신 것 같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 하시는 걸 조금만 줄이시고 집에서 아이를 조금 맞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저의 솔루션이 어떻습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저의 솔루션이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 수도회에서 강의를 한다거나 할 때, “절대 성당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들한테 외적인 모습만 보고 봉사활동을 강요하지 말아주세요.”합니다. 그들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시고 때로는 어떤 분은 성당에서 더 봉사를 하시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분들, 또 하느님의 치유를 청할 분들도 있구요. 때로는 그분들이 어디로 들어가야 할 것인지 정확한 장소를 알려주어야 할 분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청년들이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성당으로만 몰려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성당에서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그냥 세상에서만 살 것이 아니라 성당에 와서 하느님의 힘을 청하고 그 힘을 받아서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그렇게 인간 신호등이 될 필요도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의 언어적인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바로 ‘밖으로부터 불러 모으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밖으로부터 불러 모으는 것만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라고 하는 말은요. ‘미션’이라는 말입니다. 곧 ‘파견’이라는 말이지요. 밖으로부터 불러 모아서, 미사를 봉헌한다는 것은 이제 파견을 준비하고 세상으로 파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파견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고 기도를 했으면 이제 파견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힘과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파견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마술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술적 사고’라는 단어 들어보셨습니까? 이거는 정신의학 용어인데요.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기의 어떤 행동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는 원시적 사고의 형태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모습인데요. 예를 들면, 병에 걸려 있는 엄마를 위해서 ‘내가 백 일 동안 책을 읽으면 엄마가 병에서 나을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백 일 동안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엄마가 나을 수도 있겠지만 낫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사춘기를 지나서도 이런 마술적 사고를 하고 있다면 좀 심리적인 건강을 체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경우에도요. 미사를 봉헌하고 백일 기도를 하면, 또 30일 기도를 하면 나의 상황이 조금 달라지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 마술적 사고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신부님들 가운데서도 이런 것들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을 테네요. 수능 보기 전에 그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던 고3학생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는 엄마들도 더 열심해져요. 백일 기도를 바친다고 미사예물을 봉헌합니다. 그런데 이 돈을 받은 신부님들은요. 좀 두려워요. 왜냐하면 저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100일 동안 잘 봉헌했는데, 아이가 붙으면 좋은데, 떨어지는 경우도 생기더라는 것이지요. 제게 어떤 엄마가요. 자기가 미사예물 봉헌한 것을 돌려달라고 떼를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돌려드려야 되겠지요.^^ 제 기도가 그렇게 효력이 없나봅니다. (웃음)

 

  기도는 마술봉이 아닙니다. 짠~! 생겨라 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기도하면 기도한대로 좀 이루어졌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여러분들이 신부에게 기도를 부탁하면 신부의 기도가 조금 더 잘 이루어질 거라고 믿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실 기도 부탁을 받는 것이 좀 두렵기도 해요. 하느님이 저에게 기도를 짠~ 하고 이루어지게 하는 힘까지는 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신부 체면 생각해서 조금 들어주시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 그런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셔서 ‘진짜 하느님 계시나? 하느님 있으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그래도 신부 체면에 기도를 했는데 좀 들어주시지’ 할 때가 있는데요.

 

   제가 병자성사를 갈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종부 성사라고 해서 지금은 몸이 좋지 않을 때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 병자성사인데, 과거에는 돌아가시기 전에 성사를 많이 봤었지요? 지금도 이런 분이기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이 마지막 즈음에 와서 기도 좀 해달라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가 가서 기도를 했더니요. 일어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야~ 신부의 기도발이 좋기는 좋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녀분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반대로 어떤 집에 가서는 기도를 해드렸는데, 바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속상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렇게 기도의 효력을 형편없이 만들어주십니까?’ 내가 기도를 덜해서 그런가 하는 자책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녀분들이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겁니다. 희한하지요? 편안하게 돌아가시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하구요. 위중해서 가서 기도해서 살아나셨는데, 자녀분들 표정이 별로 좋지 않구요. 가서 기도를 했는데 돌아가시면 자녀분들이 좋아하는 경우도 있더라는 겁니다. 이걸 일반화하는 건 조금 위험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하느님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라고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 기도가 자판기에 동전 넣듯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런 하느님, 참 매력적이고 좋기도 하고, 그런 하느님이기를 바랄 때도 있지만, 그런 마음들이 내 안에서 너무 크는 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그 마음을 자제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실망을 크게 해서 더 강력하게 보이는 것을 찾기도 합니다. 부적을 찾구요. 또 굿을 하기도 합니다. 또 용한 곳을 찾아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길가를 지나가다 보니까요. 요즘에 굿을 하고 점을 봐주시는 분들이 현수막을 내걸었는데요. 이름하여 ‘용한 1세’,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마 천주교 신자였던가 봅니다. ‘요한 1세, 2세’, 이런 말들을 들어봤으니까 자기는 그걸 조금 바꾸어서 용한 1세라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당에 오면 그냥 신부님의 안수만 받기 위해서 오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 누군가로부터 축복받는 것이 좋으니까 신부님의 안수가 더 효력이 있을지, 스님의 기도가 효력이 있을지, 목사님의 기도가 효력이 있을지 잘 모르니까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한 달이 너무 바빠요. 한 주는 여기 가야지, 다음 주는 여기 가야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분이 계십니다. 최민순 신부님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분이 시를 썼습니다. ‘고인의 기도’ 라고 하는 시인데요. 노래로도 나왔지요.

  “주여, 오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제가 가는 길에 부딪치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라는 시이면서 기도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신앙인이 유아기의 사고로 돌아가서 마술적 사고에 익숙해진다면 이것은 비단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결국 현실 도피적인 신앙생활은 마술적 사고를 자꾸만 부추길 수 있다는 겁니다.

 

  종종 우리는 신앙을 허울 좋은 핑계로 삼아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하는 방편으로 삼기도 합니다.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전화를 걸으셔서 제사를 봉헌해야 하는데, 자신은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미사를 봉헌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될 건 없잖아요. 그렇지요? 제가 “다른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분들은 성당에 다니지만 그래도 유교적 전통 안에서 조금은 더 잘 차려놓고 그런 예식대로 제사를 봉헌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매님은 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싶으신가요?” 하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자매님이 시인을 하고 말았어요. “제가 다 해야 되잖아요?” 라고 하는 답변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신앙의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역할을 조금 모면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요. 자신들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아주 반복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기도해드릴게요.”라는 말입니다. 이 말 자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하시면서 여러분들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

 

  어떤 연예인이 연예 생활을 하다가 그만 두고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아주 심한 우울증에 걸려서 몇 년 동안을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고비를 겪다가 가까스로 살아나게 된 어떤 기회가 있었는데요. 어떤 기회 때문이었냐면요.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대요. 그리고는 그 친구의 사정을 다 이야기하고 한참을 울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울게 되었던 사연을 이야기했던 결정적인 한 마디의 단어가 있었대요. 그게 무엇인지 여러분 가늠해보실 수 있겠습니까? “통장 번호 대!” 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때로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들도 있다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의 손이 필요하고 우리의 발이 필요하고 우리의 입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든 우리들의 실천 앞에서 그저 “기도할게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비신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그래서 도움이 되는 경우들도 있지요. 그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신앙이라는 이름 하에 그 역할을 안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이 현실을 외면하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어떤 자매님이 남편 몰래 주식을 했대요. 주식을 잘 했으면 좋은데, 홀랑 다 날려버렸습니다. 남편한테 이야기도 하지 않고 이걸 어떻게 수습할까를 고민하다가 ‘이게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거구나’ ‘성당에 요즘에 안 나가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성당에 왔대요. 성당이 너무 편하고 좋더랍니다. 이 활동 저 활동 이 모임 저 모임에 다 참석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는데, 주식이 갑자기 다시 확 올라갔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식값은 여전히이고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그대로 속인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불편함을 그냥 신앙 안에서만 숨기고 살아갔던 것이지요. 그 자매님에게 “신앙의 이름으로 이제 신앙의 힘으로 남편에게 솔직해지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행동들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해보시고, 이 경제적인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 자매님이 무엇을 해야할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잘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을 때 지금도 그 표정이 기억이 납니다. ‘신부가 기도한다고 하면 칭찬해줄 일이지 왜 내가 보기 싫은 그 상황을 다시 돌아가라고 하고 있는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다른 모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집안에서 시어머니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며느리들 어떨까요? 며느리도 성당생활 잘 하나요? 안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무엇 때문이지요? 시어머니가 대신 기도해줘서? 가끔씩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방에 앉아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하는데, 된장 탄 내가 나는 거예요. 시어머니의 코가 얼마나 발달되어 있습니까? 손은 발달되어 있지 않지만 코와 입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까? “야~ 된장 탄다!” 하고 막 방에서 기도하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며느리가 없어요. “어디 간 거야?” 하면서 막 소리를 지르다가 아무도 없는데 소리를 질러봤자 효과 없잖아요. ‘오기만 해봐라. 확~!’ 그런데 마침 며느리가 된장 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러 갔던 겁니다. 그 사이에 탔던 거예요. 오자마자 그 며느리를 향해서 폭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구는 폭격을 마친 다음에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묵주를 잡고 ‘어디까지 했더라? 내가 저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하고 기도를 못하겄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더라는 겁니다.

 

 

  자. 우리 신앙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그림을 그리실 수 있겠습니다. 기도를 합니다. “은총이 ...” 하다가 된장 타는 냄새가 나요. “얘야” 하고 불렀는데 소리가 없어요. 시어머니들 그래도 된장찌개 좀 끓여본분들 아닙니까? 타고 있을 때 어떻게 복구해야할지 방법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불을 좀 끄고 물을 넣고 탄 걸 좀 걸러내고, 저도 아네요. 이런 방법으로 잘 하고 있는데, 며느리가 딱 두부를 사가지고 왔어요. 그럼 며느리에게 여러분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얘야, 니가 없는 동안에 된장이 타는 냄새가 나서 내가 나름대로 조금 해볼려고 했는데, 맛이 있을라나 모르겠다. 난 니가 된장찌게 끓여주는 게 맛있으니까 니가 다음부터 알아서 해줘.” 하고 들어가서 묵주기도를 다시 바칩니다. 아마 이 며느리는 생각할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의 저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유연한 자세, 저렇게 너그러운 자세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지? 아! 저 손에 들려있는 묵주 때문이구나. 신앙의 힘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자기에게 지금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다른 모습으로 들어가도록 초대하는 시간입니다. 똑같은 모습으로 들어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의 별 효력을 체험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현실도피적인 신앙은 왜곡된 신앙입니다. 도주하도록 만드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이탈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도록, 직장을 떠나고, 가정도 떠나고, 삶의 모습들을 다 다르게 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우리들 삶의 자리로 똑같이,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들어가도록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자신의 현실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현실 속으로도 들어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부정부패로 가득 차고 권력자들이 야욕으로 가득차고 또 인권이 무시되고 불의가 가득한 상황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라고 하시자,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우리는 나의 현실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 책임과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상의 정의, 가난, 인권, 생명을 위한 일에도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살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제 그런 것들이 자꾸만 눈에 걸리고 내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우리 기도 중에 그런 분들이 자꾸만 떠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위대한 힘입니다.

 

  파견되지 않는 신앙, 그것은 고인 물이 되어서 썩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삶의 자리인 가정으로 보내십니다. ‘여기만 없으면 잘 살 것같다’고 생각하는 그 가정으로 또 보내십니다. ‘저 직장생활만 아니면 내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직장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저 인간만 아니면 잘 살 수 있는데’, 그런 인간관계 속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그런 세상 속으로 보내실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답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주님,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라고 청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이번 강의를 통해서 현실도피적인 신앙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약간의 현실 도피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왔던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사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오늘 강의 들으시면서 질문 있으셨나요?

  “청중: 예 신부님 오늘 강의 너무나 감명깊게 잘 들었습니다. 듣다 보니까 저한테 의문 하나가 생겼는데요. 가끔은 현실이 어려울 때도 있거든요. 그럴 때에 신앙 안에 그리고 또 성체 조배라든가 그런 것을 통해서 봉사를 통해서 더 가까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요?”

  예, 지금 말씀하셨듯이 종종 우리 삶에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청하는 순간들이 있지요. 기도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또 성당에 조용히 홀로 앉아서 심리적인 위로와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도 있을 텐데요. 지금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그것을 너무나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행하는 경우,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계속해서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행동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또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이 될 때에 이것을 문제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또 하느님 대전에 나가실 때 거기서 느끼는 것들은 신앙의 부수적인 효과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체험하는 것 역시도 필요한데, 이것에 지나치게 계속해서 거기로 들어가고 거기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을 살게 만든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성체조배와 기도생활만 너무 편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불편해지고 이런 것들은 조금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30일 피정을 했었는데요. 30일 동안 침묵을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과 기도하다보니까 좋더라구요.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어떻게 말을 할까 이렇게 말을 하면 상처 받고 상처 주고 이런 것으로부터 떠나서 하느님한테 기도할 때는 굳이 문장을 잘 만들 필요도 없잖아요. 그러다가 30일 피정 가운데서 하루 정도 브레이크를 하는 날이 있습니다. 잠시 쉬어가는 날이 있는데, 이 날은 침묵을 해제하게 되는데요. 이 날 동료들과 말을 하다가 금방 싸움이 붙었습니다. 기도생활을 하다보니까 서로 말을 툭툭 던지는 거예요. 말 훈련이 조금 안 되었던 것입니다 싸움을 하고 나서 제가 돌아와서 느껴본 건, ‘아! 나한테는 관상생활이 맞는구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만 관계하면서 살아야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머지않아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때로는 하느님과 신앙생활을 하는 것, 하느님만 바라보는 것이 가장 편안한 신앙생활일 수 있어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꾸만 사람들을 보라고 하시고 세상을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 삶 안에서 내가 어떤 편안한 것을 찾기 위해서 신앙을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현실 도피적 신앙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여러분들 이해 되셨습니까? 네. 아무쪼록 아까 말씀드렸듯이 잘 살고 계신 분들이 제 강의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구요. 우리 삶 안에서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건강하게 마주하는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