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행복한 죽음 공부]"고마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며 남기는 작별 인사
김지윤 기자 입력 2017.11.03. 17:25 수정 2017.11.03. 18:19
[경향신문]
연명의료결정법 시범사업이 시작된 지 꼭 1주일이 되는 지난 10월30일 서울 송파구의 한 카페에서 죽음준비교육 전문강사이자 ‘웰다잉 연극단’의 리더인 최명환 단장(69)을 만났다. 그는 이미 7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죽음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가 체크무늬의 베레모를 벗자 항암치료로 몇 가닥 남지 않은 백발의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2003년 처음 왼쪽 신장에서 발견된 암세포는 지난 14년 동안 4차례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반대쪽 신장, 폐, 췌장, 간으로 계속 전이됐다. 그는 “수술로 생긴 몸의 흉터를 다 합치면 70㎝가 넘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내자 이제는 인생의 훈장처럼 여겨진다”고 웃었다.
그는 제대로 ‘죽음 공부’를 하기 위해선 인간의 심리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모교 평생교육원에서 심리학 학사학위까지 땄다. ‘죽음준비지도자’ 과정을 마친 후에는 복지관과 구청 등에 유언서 작성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쓰기 등을 강연하러 다녔다. 그러나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나가버리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죽음’이라는 어렵고 딱딱한 주제를 쉽게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고, 이 고민은 유치원 연극무대에도 올라본 적 없던 그를 ‘웰다잉 연극단’ 오디션에 지원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단원으로 선발된 17명의 평균 나이는 66세. 본인 혹은 가족의 죽음을 앞두고 ‘죽음준비교육’을 받았다는 것 외엔 공통점이 없었다. 이들은 병원 로비, 마을회관 등을 순회하며 노인들의 자살 문제, 시한부 인생의 존엄사 등 죽음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연극을 선보이며 죽음과 마주한 이들을 위로했다.
그는 “전에는 죽음이 너무 두려웠다. 지금도 두려움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면서 “연극무대에서 그렇게 죽는 역할을 많이 했는데도 여전히 그렇다”고 고백했다. 특히 지난해 암이 또 다시 전이돼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을 때의 심정은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도 그는 “죽음을 공부하고 극단 활동을 하면서 지금은 죽음 역시 삶 속에 있는, 삶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최명환 단장의 ‘웰다잉 연극’
■ 죽음의 문턱에서 알게 된 것
다니던 회사에서 임원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최 단장의 인생은 ‘승승장구’라는 단어로 집약됐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이 남았다고 믿었던 쉰일곱의 일상이 무너진 건 2003년 건강 검진에서 암세포가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신장의 3분의 1을 잘라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억울함과 분노가 앞섰다. 머릿속에서 ‘왜’, ‘하필이면’이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급기야 우울증까지 앓았다.
수술 후 2년이 지난 2005년, 최 단장은 반대편 신장마저 들어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종양의 위치가 좋지 않아 위험한 수술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허탈함에 웃음이 났다. 생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나니 죽음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별을, 그리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재를 그려보며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아내는 화부터 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두려움을 나누고 함께 준비하고 싶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 첫 수술의 상처도 가시지 않았을 때였을 텐데요.
“사실 처음 수술을 앞두고는 놀람과 두려움에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고, 두 번째 진단을 받고 나서야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어요. 환자들은 의사의 표정이나 말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잖아요. 암세포가 전이됐다고 말하는 의사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죠.”
- 수술대 위에서 만감이 교차하셨겠네요.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이미 경험해서 아니까 더 고통스러웠죠. 그러면서도 만약 내가 이번에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꼭 ‘죽음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 역설적이죠? 수술대 위에서 죽음을 앞둔 순간 새 인생을 계획했으니(웃음).”
- ‘죽음 공부’라는 말이 낯설어요.
“두 번째 수술을 하고 회사로 돌아왔는데 그다음 해 인사 발령 때 제 이름이 안 불리더라고요. 임원들에겐 그게 곧 퇴직을 의미하는 것인데(웃음).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그런 고민을 많이 했죠. 그래서 일단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이 ‘죽음’이란 놈부터 파보자, 싶어서 관련 주제의 책들을 섭렵했어요.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리부터 알아야겠더라고요. 제가 경영학과 출신인데, 다시 모교로 돌아가 평생교육원에서 심리학 학사학위까지 땄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각당복지재단 산하 모임인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알게 됐어요. 그 안에 죽음준비지도자 과정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신청했죠. 자격증도 따고요.”
- 죽음준비지도자라니 감이 잘 안 오네요.
“죽음 준비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막연한 것이잖아요. 그래서 유언서 작성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쓰기 등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거죠. 지금이야 죽음 준비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지만 10년 전만 해도 정말 답답하고 씁쓸한 순간들이 많았어요. 2009년이었나. 한 구청에서 ‘제2의 인생’이란 주제로 강좌를 열면서 저보고 웰다잉 교육을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강의 시작하자마자 3명이 나가버렸어요. ‘재수 없게, 아침부터’라고 투덜대면서.”
‘죽음’이라는 어렵고 딱딱한 주제를 어떻게 하면 보다 사람들에게 쉽게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각당복지재단에서 존엄한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웰다잉 극단을 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 배우 오디션 제안이 들어왔다. 아내에게 ‘배우 제의가 들어왔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피식’ 웃었다. 오기가 생겼다.
- 단장님을 캐스팅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무엇이라 하던가요?
“환갑 넘은 사람들의 모임에 가본 적 있어요? 남성이 흔치 않아요. 아마 그래서였을 겁니다. 그 모임에선 지금도 제가 아주 귀한 존재예요(웃음). 남은 인생 잘 살아보자, 했는데 못할 것은 또 무엇이 있겠나 싶더라고요. 오디션 보면서 솔직하게 말했어요. 관심도 있고 의지도 있지만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 존엄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대
그와 함께 단원으로 선발된 17명의 평균 나이는 66세. 본인의 죽음 혹은 가족의 죽음을 앞두고 ‘죽음준비교육’을 받았다는 것 외엔 공통점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늦깎이’ 배우들의 방향을 잡아준 사람은 연극인이자 서울예술대에 재직 중인 장두이 교수였다. 이들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열심히 했다.
“인생이 참 그래요. 내가 배우가 될 줄 누가 예상했겠어요. 사실 그전까지 나는 드라마 시청은 고사하고 유치원 연극무대에도 올라본 적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 발성이나 대본 외우는 것도 쉽지는 않았겠네요.
“그랬죠. 연습하면 할수록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더라고요. 대화하듯 대사를 하라는데 또 대화체는 아니라네. 이게 대체 뭔 말인지(웃음). 대사는 또 왜 그렇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지. 그래서 세 번째 모임 때 못하겠습니다, 하려고 갔는데, 내가 주인공이었거든요. 그만둔다는 말이 차마 나오질 않더라고. 매일 두시간씩 한강 둔치를 걸으며 발성연습을 했어요. 그랬더니 실력이 확 늘더라고요.”
서투름이 노련함으로 바뀐 2009년, 첫 무대의 막이 올랐다. 20분짜리 단막극 2편이었지만 2시간 러닝타임 무대보다 벅찼다. 이듬해 최씨가 단장자리를 이어받은 뒤 극단은 더욱 탄탄하게 성장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핀 조명 하나 없는 병원 로비, 마을회관이 이들의 주 무대였다. 전국 방방곡곡 누리지 않은 곳이 없다.
- 몇 번의 무대에 오르신 거죠?
“몸이 아파 쉬었던 지난해를 빼고 오른 무대를 세어보니 총 136회더라고요. 결코 적지 않은 숫자예요. 연기하는 사람도, 보는 관객도 주로 노인들이 많다 보니 상시 공연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거든요. 볕 좋은 봄·가을에만 하다 보니 어쩔 땐 일주일에 한 번도 많은 거죠. 연습은 주로 공연을 앞둔 여름에 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개막 공연을 앞두고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하고요.”
-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으세요?
“많죠. 너무 많아요. 한 번은 양평군청에서 공연을 끝내고 뒷정리를 하는데 여든 넘은 노인 한 분이 와서 제 어깨를 툭툭 치셨어요. 그날 한 연극이 <소풍가는 날>이라고, 사별한 아내를 따라 자살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였거든요. 그분이 ‘나도 2년 전에 아내가 죽었어. 1년 정도 지나니까 또 살아지더라. 힘내’ 하고 날 위로하더라고요. 극 중 인물이 진짜 저인 줄 아셨던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정말 자살을 시도하셨던 분이래요. 연극 보고 많이 치유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고맙기도 하고 보람도 느끼고 그랬어요.”
- 또 어떤 연극들을 하셨나요?
“첫 번째 연극은 <립스틱 아빠>라고 립스틱을 좋아했던 아내와 사별한 뒤 생전 립스틱 하나 사주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는 남편의 이야기였어요. 자식들의 나쁜 기운을 모두 떠안고 하늘나라로 가겠다는 할머니의 죽음 준비 과정을 다룬 <춤추는 할머니>, <행복한 죽음>, 그리고 아까 말한 <소풍가는 날>. 지난 9월부터는 내년 2월부터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과 관련된 연극을 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암 투병을 하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예요.”
- 단장님의 상황이기도 하네요. 현재 항암 치료를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아무래도 나를 모델로 해서 쓴 것 같아(웃음). 두 번째 수술 이후 2012년 또다시 폐로 암세포가 전이됐어요. 그러고 나서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지난해 5월쯤 황달이 심하게 와서 검사를 했더니 췌장암 4기라고 하더라고요. 또 수술을 했죠.”
- 그 뒤로 계속 안 좋아지신 거예요?
“한동안은 괜찮았어요. 그러다 올 초 가슴 쪽이 너무 아팠는데 어머니 장례를 치르느라 바로 병원에 가질 못했어요. 나중에 가보니 이번에는 췌장에서 간으로 암이 전이됐다고 하더라고요. 항암치료를 하는데 강도가 앞엣것들과 달라요. 머리카락이 다 빠졌고 구토에 설사에 몸무게가 13㎏이나 줄었어요. 그렇다고 밥을 안 먹으면 기력이 떨어지니까 또 의사가 입맛 돌게 하는 약을 주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고 다 하는 셈이지(웃음). 한 달에 세 번, 그러니까 한 주에 한 번씩 주사를 맞고 마지막 한 주는 쉬어요.”
첫 만남부터 쉼 없이 대화를 이어온 최 단장이 잠시 휴식 시간을 달라고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돌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그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유쾌하게 건네는 유머와 간간이 쏟아지던 웃음들이 더 기억됐을지도 모르겠다.
- 일상생활이 힘들진 않으세요?
“주사를 맞고 온 날이나 다음 날은 조금 힘들어요. 처음엔 진통제 없이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내성이 생길까 그게 걱정이죠.”
- 무대에 오르시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할 텐데요.
“이게 정말 미스터리한 건데 무대에 오르면 하나도 안 아파요. 집중을 해서 그런가 봐요. 집에 가면 ‘팍’ 하고 쓰러져 다음 날까지 못 일어나지만(웃음).”
- 그렇다면 더블 캐스팅을 고민해보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럴까도 했는데,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행히 이번 극은 3장에만 출연하는 조연 같은 주연이라 할 만해요(웃음). 연극을 하면서 죽는 것이 내 꿈인데 뭐.”
■ ‘준비된 죽음’은 불행하지 않다
누구나 마땅히 겪게 되는 인생의 마지막이지만, 이를 인정하기로 했다는 것이 곧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 단장 역시 ‘죽음’이 쉽진 않다. 몇 번이나 확인해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죽음이 때때로 버거운 순간들이 있다.
- 죽음을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다고 해도 여전히 인정하기 힘든 순간들이 있으시겠죠.
“지난해, 그러니까 가장 최근 암 전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랬어요. 연극을 통해 수없이 죽는 역할을 해왔고, 10년이나 죽음 강의를 했지만 그럼에도 ‘췌장암 4기입니다’라는 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더라고요. 나보다 더 넋이 나간 아내를 보면서 정신을 차렸어요.”
- 존엄한 죽음을 위해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어떤 삶이 의미가 있을까부터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암 선고를 받은 후부터 매년 12월이면 버킷리스트를 써왔어요. 모자라다 싶은 건 다시 적고, 됐다 싶은 건 빼면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삶이란 특별한 게 아니에요. 가족에게 헌신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투자를 하는 것이 진짜 의미 있는 일이지. 그게 내겐 연극이었고요(웃음).”
최 단장은 인생을 4막으로 나눴다. 1막은 교육의 시기로 사회진출 전까지의 삶이다. 2막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부모를 봉양하는 기간인 의무의 시기다. 3막은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투자의 시기고 4막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한 병수발의 시기다.
- 현재는 인생 3막을 즐기고 계신 셈이네요.
“그렇죠. 이건 길면 길수록 좋아요. 문제는 4막인데, 그 기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거든요. 나는 한 달 내였으면 하는데, 그러려면 또 건강해야 해요. 죽음을 위해 건강해야 한다는 말이죠. 웃기지 않아요?”
- 연명의료 거부 고민도 해 보셨는지요.
“이미 2010년에 연명의료의향서를 썼는걸요. 그런데 그때 쓴 건 법적인 효력이 없고, 이번 시범사업으로 진행되는 양식에 맞게 써야 해요.”
- 아내분이나 가족들은 단장님의 이런 생각을 불편해하진 않으세요?
“요새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응원하는 편이에요. 연극을 하다 쓰러지진 않을까, 그런 걱정은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무리하지만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더라고요.”
- 다양한 활동을 해오면서 단장님은 죽음을 대하는 마음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궁금해요.
“예전에는 누가 죽었다, 하면 두려웠어요. 왜 사람은 죽어야만 하나 서글프기도 했고요. 공부를 하고 연극을 하면서 두려움이 완벽히 사라졌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겁니다. 줄어들었을 뿐이에요. 저는 죽음과 삶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죽음도 삶 속에 있는, 삶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봐요. 어렵죠? (웃음) 많이 친숙해졌어요. 죽음이. 나 역시도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게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예요.”
- 끝으로 단장님이 바라는 마지막 순간은 어떤 모습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정신이 희미하게 사라져갈 무렵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진실로 행복했습니다. 이게 제가 꿈꾸는 마지막 순간이에요. 멋지죠? (웃음)”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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