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이해 -1
우리에게는 언젠가 죽음이라는 매우 어려운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부활의 희망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삶, 크리스챤의 은총,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아야 할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육체 안에서 나이가 들고 고통을 느끼며 아무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언젠가 세상을 마치고 그것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변화의 순간을 맞이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믿음이 강한 크리스챤일 수 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과 , 특히 죽음의 순간에 용기와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은총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살아 갈수록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매우 평화롭게 임종을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우리 할머니는 미소지으시며 매우 평화롭게 돌아가셨어” 라는 이야기 등을 가끔 듣곤 합니다. 그러나 이때 육체를 떠나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 하는 이면에는 육체로부터 나와 맞딱드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로부터 전해오는 많은 성인들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 왔고, 이 삶의 마지막에 사탄과의 전투가 있음을 아실 겁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아 영적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악령들이 나타나 우리를 유혹하며 속이려 들 것입니다. 자신이 하느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둥, 여러 짓을 할 것입니다. 위대한 성인들 조차도 그 과정을 거칩니다. 우리는 추락된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그 곳으로 부터 (영적인 세상으로 )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죽음이 평화로웠다 할지라도 영혼이 육체에서 나와 영적 세상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순간은 매우 고통스러운 순간이며 많은 영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빛의 자녀로서 믿음에 의해 완전히 하느님의 빛으로 감싸여져 있다면 확실히 그 전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쉬울 것입니다.
신앙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매우 미지근한 사람들도, 많은 경우에 자비와 동정, 조상들의 기도, 선한행위, 혹은 주변의 많은 기도들로 인해 구원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빛으로 채워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충분한 빛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연옥의 상태에서 빛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한 상태의 영혼이 겪는 (사탄과의) 전투는 매우 어마어마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누구이든,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든, 우리 모두는 삶의 마지막에 전투를 겪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전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적인 사람 가운데 섞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어둠에 둘러싸여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도 여러분은 그들과 교류 하며 그들의 언어에 맞추어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러분의 언어인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합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경우 사람들은 여러분의 말이 아닌 여러분의 모범적인 행동의 증거를 보고 하느님께 다가옵니다. 설교가 아닌 행동에 의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음의 전달은 여러분의 행동으로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이지요. 여러분의 사랑, 자선, 동정심, 용서등의 영적인 봉사들로서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복음, 말하는 복음, 사랑하는 복음, 행동하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복음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남편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아내는 종교나 하느님에 대해 언급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과 사랑, 생각등 모든 것에 복음을 반영하고 남편을 보듬어야 하지요. 영적인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세계는 정확하게 그러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육체에서 나왔을 때 여러분이 하느님에게 속해있다면, (악)령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여러분을 속이거나 함정에 빠지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처음 영적인 세계로 나가게 된다면, 물론 전혀 새로운 세계이므로 단연코 쉽지는 않을것이므로 그들은 다소 혼동을 줄 수 있겠지만 그 힘을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진 삶을 살았다면, 하느님께서 성령의 은총을 주십니다. 하느님께 믿음으로 충실하였다면 우리보다 더욱 더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그 순간, 영적세계로 새로 태어나는 그 순간에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떄문입니다.
왜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신학에 대해 들어왔고, 저는 다른 여러가지 주제로 강의를 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 변모(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밤 우리가 죽지 않을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 때가 언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를 불문하고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 만이 죽음을 준비합니다. 여러분은 죽음이나 죽음의 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거의 들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폭풍이 오거나 지진이 오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지침은 들어 보았어도, 일단 죽었을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한것은 듣지 못했을 겁니다. (웃음) 그러므로 제 말은 매우 중요한 매뉴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팔에 이렇게 들고 다니다가 그 순간이 오면….ㅎㅎ
교회의 박사나 위대한 성인들은 매일 죽음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훈련을 하였습니다. 죽음은 삶의 치명적인 불행한 상황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란 치명적인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인식하고 준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그려보고 상상하십시오. 죽음은 나이에 따라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오늘 죽음을 맞는다면 받아 들일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참으로 많은 것들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여러분의 삶 안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인생, 사람들, 세상, 꿈, 느낌, 지난일, 등.. 참으로 많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완전히 끝이 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진지하게 그려본다면 여러분의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들이 한 순간 완전하게 끝나 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많은 것들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림픽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지요. 그러나 만일 사고로 몸이 마비가 되어버렸다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그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소 환영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혹은 판타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잊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삶 자체를 잊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삶을 살기위해서는 그 변화 의 순간, 영적인 세계에로의 들어가는 순간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계획과 나자신의 모습을 그 참된 삶에 촛점을 맞추고 그위에 세워야 합니다.
삶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삶입니다. 하나의 삶을 살고 나면 그 다음 또 다른 삶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신학이라면 잘못된 신학입니다. 잘못된 신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부활을 약속했다고 말합니다. 성서에서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라비 라자렛이 죽은 후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부활할 것이라고 다른 차원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다르게 이해하고 “압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것은 바로 그곳에 죽어 누워있는 그가 그 곳에서 부활할 것임을 의미하십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현실을 이해하고 , 그 의미에 촛점을 맞추고 살아간다면 삶의 모든 것들이 다른 차원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깊은 지혜를 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속고 있습니다. 우리는 꿈과 같은 많은 것들에 몰두해 있고, 우리가 원하는 많은 것들로 인해 영적인 현실로 부터 멀어져 땅아래에 묶여 있습니다.
또 자신이 지금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잘못한 많은 것들에 의해 괴로워하고 더 잘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자신의 잘못으로 영영 놓친 것에 대해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또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괴로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끝나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 그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지금 이순간 어떤 불치의 병이 걸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주일만 살 수 있다고 합시다. 삶의 모든 드라마는 끝이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이 신발을 주고 가나” 그런 생각이나 하겠지요. ㅎㅎ 더이상 그동안 꾸었던 꿈이나, 걱정, 욕망 같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밤사이 삶은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이죠
저와 친한 72세의 사제가 있습니다. 독일 출신으로 미시간의 한 교구에서 서품을 받고 그 곳에서 사목하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저는 그 본당으로 사순피정을 하러 가곤했지요. 그 사제는 은퇴를 하게 되면 저와 함께 여러곳을 다니며 선교를 하고 싶다고 말하곤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고 말했지요. 그는 아주 훌륭한 사제입니다. 결국 그는 은퇴를 하였고 작년에는 정말로 콜롬비아에 있는 저의 공동체에 오셔서 몇 주를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는 뭔가 편안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았어요. 결국 그분은 시카고로 돌아가 암선고를 받았고 몇 달 안 남았다고 합니다. 며칠전에도 그분과 통화 하며 우리의 현실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죠. 그는 많은 것을 계획하였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전혀 자신이 원치 않았던 곳, 시카고에 움직이지도 못한 채, 아마 그 곳에서 돌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중요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계획이나 희망, 꿈이 아무리 거창하다 하더라도, 물론 그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꿈을 가질수 있는 자유를 주셨고, 상상력을 주셔서 풍부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아주 소중한 것이지요. 그로부터 아름다운 음악이나 예술작품등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상력을 통하여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가질수 있게 하셨습니다. 꿈이라는 것이 나쁜것이 아니죠.
그러나 한가지 나쁜 것은 그것만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상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사탄은 우리의 상상력을 이용합니다. 영은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말하고 교류하기 떄문입니다. 그들은 지적, 영적인 형태이지 육체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우리와 상상력과 생각, 느낌, 감정, 감각을 통해 교류합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이해한다면 우리의 지금의 삶과 앞으로 올 삶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비체험을 통해 보여주신, 제가 이해했던 아름다운것 중 하나가, 지금 이 곳에서 하느님의 왕궁으로 걸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자선, 베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돕는것은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하시는 가장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공동체를 돕고 있을 때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가 왜 존재합니까. 영혼을 구하기 위한 것이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데려오기 위한 것이죠. 여러분이 이 곳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뭔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제이든, 종교인이든, 선교사든, 혹은 결혼을 통해 자녀들을 하느님에게로 데려오든, 하느님의 왕궁인 교회에서 일하든, 여러분이 그 안에 있음으로서 죽음이후에도 여러분은 계속 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래전에 수도회를 건립하였던 많은 신비가들은 이 세상의 삶을 끝내고 천상으로 간 이후에도 계속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소화데레사는 “나는 천상에서도 지상의 사명을 위해 일 할것입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성녀가 얼마나 큰 성인이 되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24년 밖에 살지 못한, 수녀원에 있었던 작은 수녀가 지금은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수녀일겁니다. 얼마나 많은 성당에 소화데레사의 상이 있습니까? 모든 교회에 다 있다시피 합니다. 그 성녀가 말한대로 이루어진겁니다. 비오성인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영혼이 영광안에 있을때까지 나는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가운데서 일하겠다는 말입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 성녀에게 성녀의 사명은 죽은 이후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순간부터 주님의 왕국을 위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선함으로, 자선과 베품으로, 주님의 도구가 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것들이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죽어서도 계속 그일을 하게 될 것이기 떄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직업을 이곳에서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곳에서 그 놀라운 하느님의 기업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천상, 구원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먼 곳,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도 성인도 이곳에 있습니다. 그 세계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으므로 여러분이 하느님 안에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사실상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연옥은 천국의 아트리움 (입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죠. 제가 언젠가 폴란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두 가족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가족이 성당안으로 들어가기 전 아트리움에서 분주히 옷 매무새를 고치고, 자녀들의 옷도 바로 잡아주고는 성당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는 서로 전혀 말도 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에게만 몰두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제가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은 요즘 보기 힘들지요.
그것이 (아트리움) 바로 연옥의 모습입니다. 연옥은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하고 바로 잡는 곳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영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아트리움(연옥)은 굉장한 곳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곳이죠. 결혼식에 참여 할 때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으면 잔치에 들어가기 전에 갈아입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한 세계가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연옥영혼도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연옥영혼들은 지상의 삶을 풀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의 아주 작은 것도 풀지 못한 것들을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씩 배울 때마다, 완전한 빛의 영역을 향하여 올라 가기 시작합니다. 빛 안으로 나아가면 그들은 빛과 같이 됩니다. 천상의 빛입니다. 성바오로는 빛으로 만들어진 천상의 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볼 수 없다고 말하지요. 하느님은 완전하십니다. 우리가 그 세계를 볼 수 있으려면 우리도 완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완벽하게 볼 수 있는 분입니다.
이 곳에 있는 이 아기예수님상에는 정말로 예수님이 그 곳에 계십니다. 아기 예수님이 실제로 그 곳에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보지 못할까요? 우리는 불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좀 더 완전해질수록 더욱 명확해질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함을 목표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완전한 것과 같이 우리도 완전해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요구하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그분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완전해진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성모님이나 천사나 성인들을 봅니다. 그 순간을 우리는 완전한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그 완전한 순간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완전한 순간은 완전한 순간의 영적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목격증인이나 예언자, 초자연적인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일대일로 그 완전한 순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순간이 허락된 개개인은 변화됩니다. 그러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증명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영적세계를 본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짜 목격증인이나 예언자를 가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본 사람은 100 퍼센트, 완전히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코 예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영적세상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실제로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인간적으로 증명해 보일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일대일로 예수님을 얼굴을 맞대어 보았으므로 하느님이 계심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믿음 안에서 그것을 신뢰하지요. 우리가 들은 것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을 떠난 변모된 누군가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나 진리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들어왔던 것을 직접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증명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에 의해 그들은 모든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얼마나 많이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까? 성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음을 증거한 몇 사람 중에 한명이지요. 성 바오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모두에게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 누구도 뒤쳐지게 두지 않으셨겠죠. 여러차례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너머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삶이 이세상 너머의 승화를 직면하는데 촛점을 맞추어야 할 운명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가장 큰 희망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멸망하는게 아닙니다. 기쁨으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주말에 우리들에게 당신을 좀 더 잘 보여주기위해 우리를 이곳에 부르셨습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곳에 불러 우리의 신비로운 운명에 대해 묵상하여 당신을 좀 더 잘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천사들과 성인들은 이미 하느님의 영광 안에 있지만 그들도 끊임없이 하느님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새로움을 창조하시며 펼쳐보이십니다. 천사와 성인들도 바로 다음 순간에 무엇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곳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좀 더 드러내고 계십니다. 비록 이 곳에서의 모든 이야기들이 이미 들은 것이고 익숙한 것일지라도 성령은 여전히 항상 새로우며 새롭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복음 말씀을 들을때 이미 여러번 들었었더라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새롭게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전례중에 얼마나 여러번 성서 말씀을 들어왔습니까? 그럼에도 그것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차원이 열리고, 전례를 통해 듣는 말씀이 어느 순간 마음을 터치하고 다르게 들리곤 하지 않습니까? 그 말씀이 살아 있기 떄문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저는 회개하기 전이었고, 믿음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당신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바로 전 저의 두 형제가 죽었었기 떄문에 제가 유일한 남아있는 아들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네명의 누이들이 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침상주위에 우리모두 함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십자가를 손에 쥐게 하셨고, 십자가가 어머니를 향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동안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는 심장에 문제가 있어 매우 고통스러워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기도를 함께 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를 할 줄 몰랐습니다. 어머니도 제가 삼십년전에 하느님을 떠났고 기도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제가 기도를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매우 깊은 체험을 하셨고 돌아가시기 바로 전 , 이미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떤 사람은 돌아가시기전 이 세상보다 저쪽 세상에 더 가까이 있는듯 합니다.
제가 믿음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신비한 믿음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고, 죽음의 신비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어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 이해 한다면, 기도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모태 신앙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신자들은 믿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도를 배웁니다. 기도가 자연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영이 충만한 기도는 아닐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기도하더라도 기도는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관련된 것이므로 어두움을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치 무슨 치료를 하 듯 기도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톨릭신자가 아님에도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매우 좋은 에너지, 긍정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상당히 뉴에이지 스타일의 사람들이죠. 순진한 신자들은 그들이 개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뉴에이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죠. 실제로 그런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에너지를 얻는다고 하죠. 어떤 이들은 그것이 괞잖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얺잖게 여겨집니다. 그것이 개종을 이끌수 있을 런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암튼 기도는 매우 중요한 근원이 됩니다. 기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사랑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빈 것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을 하기 떄문입니다. “사랑해요. 보고싶어요. 당신은 나에게 아주 중요해요. 당신이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바래요.” 그러한 말들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면 그 말은 듣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선물이 됩니다. 듣는 사람은 기쁨을 느끼며 고맙다고 하겠지요. 사랑을 느낄겁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바로 기도가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여러분도 하느님 앞에 나아가 진정으로 말을 해야합니다. 그러한 강도와 진지함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그 기도는 진실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기도가 여러분의 삶의 마지막에 진실로 변화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으면서 여러분이 해왔던 기도를 할 때 사탄은 그 주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타 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은 도망가고 말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가 위대한 무기라고 우리는 항상 들어왔습니다. 사탄에 대한 놀라운 무기이죠. 또한 놀라운 평화와 기쁨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가져오기도 하구요. 그것은 성모님의 놀라운 현존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놀라운 예수님의 신비가 현존하기 떄문입니다.
예를 들죠. 제가 페루에 갔을 때입니다. 피정 마지막에 사람들이 기도를 받기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중 한 여성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건 또 누군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여성이 제 앞에 오자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악령이었습니다. 온통 몸을 뒤틀었습니다. 그 여성이 악령에 잡혀있었던것이죠. 그 여성이 욕을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붙들어 끌어내려 하었고 고백성사를 주던 사제들이 고백소에서 뛰어 나왔습니다. 그 악령은 큰 소리를 사람들을 향해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겁이나자 묵주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거의 동시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악령은 큰소리로 웃으며 “하하…믿음도 없으면서..그 묵주기도는 나에게 아무 소용도 없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저도 그 묵주기도가 아주 약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악령은 강하게 웃으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묵주기도는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영적으로 열성적으로 되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제 그 악령은 괴로운 듯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해! 그만해!” 그 악령 자신이 본의 아니게 하느님을 위해 일한 것이 되었죠. 약한 묵주기도를 강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것이 사람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곳에 있던 그 누구도 더이상 묵주기도를 건성으로 약하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오랫동안 그 무서웠던 기억이 남아있었을테니까요.
그리고 예전에는 그것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도의 힘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죽음의 순간에 매우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는 기도문을 기억하려할 때 입을 열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기도는 모두 여러분의 내면 안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내면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오직 피상적인, 기계적으로, 입으로만 하는 기도를 하였고 마음으로, 영적인 기도를 하지 않았었다면,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 그 발음 조차 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영적으로 기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기도가 여러분 내면에 살아 있도록 하기위해 영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체 조배를 하러 성당에 갈 때, 감실앞에서 여러분은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좋은 훈련입니다. 기도가 깊게 내면에 가도록 하지요.
그렇다고 염경기도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분명히 좋은 것이고 사탄은 그 기도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을 달아나게 합니다. 여러분의 집에 평화를 느끼게 하고 싶다면 시편을 큰 소리로 읽으며 걸어 보십시오. 묵주기도를 하며 집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대죄가 없는 한 사탄을 쫒아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은총지위에 있어야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겠지요. 길을 걸으며 기도한다면 길을 깨끗히 하는 것이죠. 사탄은 주위에서 달아날것입니다. 그 기도소리는 사탄을 괴롭히므로 그 소리조차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소리인 것이죠.
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영원안에 현존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성모송을 기도할 때, 그 주위에 있는 악령은 그 신비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여러분의 기도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신비 안에서 그 신비를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신비 안에 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모송을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잉태 , 육화, 엘리사벳 방문 등을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 모든 신비가 그 기도안에 있지요. 그러므로 사탄은 지금 그 신비 안에 있게 되는 겁니다. 그 순간은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곳에 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달아나버리죠. 그것이 현실화 되기위해서는 여러분의 기도가 진실되어야합니다. 여러분이 묵주기도를 할 때 얼마나 그 신비를 생각하며 기도합니까? 성모송을 기도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합니까?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잉태이고 육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합니까? 그것이 여러분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기도는 빈 것입니다. 자신도 무엇을 기도하는지 모르므로 그것은 빈 껍데기 일뿐입니다. 그 의미를 기억조차 못하면서 그저 기억에 의해 반복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을 일깨우지 못합니다. 제가 예를 든 것처럼 누군가에게 진실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마음을 일깨우고 사랑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바로 기도가 그래야 합니다. 기도는 매우 강해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정말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 기도가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기도를 부탁합니다. 정말로 기도를 이해하고 깊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기도는 매우 힘이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영원한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역: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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