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신앙 자료

성모 발현 성지 ‘루르드’

김레지나 2015. 11. 6. 21:21

3·끝〉 성모 발현 성지 ‘루르드’

“불치병 치유 효과” 풍문에 침수 순례객들 발길 쇄도
“눈에 보이는 기적보다는 내면으로 치유받고 복귀”

“온몸이 물속에 푹 잠기도록 다시 한 번 침수했으면 좋겠습니다.”

프랑스 남부 가톨릭 성지(聖地)인 성모 발현(發顯)의 마을 루르드(Lourdes). 이곳 침수처에서 침수를 마친 이들의 유쾌한 음성들이 들렸다. 욕조에 입수하기 전의 설렘과 두려움은 상하의를 탈의한 채 서로를 마주보는 침수 대기자들의 멋쩍은 모습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찬물에 침수한 결과는 단순명료했다. “쿨(cool), 시원하다.”

성모 발현 이후 유명해진 프랑스 루르드 동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순례객들.
지난달 18일(현지시간) 찾은 루르드 성지 곳곳에서는 ‘기적의 샘물’을 긷는 사람들, 침수를 받기 위해 줄을 늘어선 순례객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또 루르드 성지 내 로자리오 대성당 측벽과 침수처 벽에 “Go drink at the spring and bathe in its waters(샘에 가서 마시고 씻으라)”는 구절도 선명하게 보인다. 지난해 한국에서는 3만5000명이 이곳을 찾았다. 전 세계적으로는 해마다 600만명, 매주 10만명에 이르는 이곳 순례객 상당수가 침수 의식을 치른다. ‘기적의 샘물’도 마시고 몇 리터씩 담아가기도 한다.

이런 행위의 기원을 따라가면 베르나데트 수비루가 성모 마리아를 접한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한국인 순례자들을 위해 지난 8월부터 성지 가이드를 맡은 예수성심시녀회의 이 마리스텔라(45) 수녀의 안내로 베르나데트 박물관을 둘러봤다. 곳곳에 즐비한 성화와 사진, 자료들이 성모 발현의 역사를 현대적으로 재현했다.

1858년 2월11일부터 7월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의 가브 강변 마사비엘동굴에서 14살의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베르나데트 앞에 매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소녀를 향해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됐다”고 했다. 이후에도 다시 발현해 소녀에게 “샘에 가서 마시고 씻으라”고 했고, 이 물을 마신 이들 가운데 불치병 등을 치유하는 효과가 나타나면서 ‘기적의 샘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까지 153년간 끊김 없이 하루 14만ℓ의 물이 흘러 순례객들의 목을 적신다. 마리아의 발현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 앞에서 흙탕물을 마시고 잡풀까지 뜯어먹는 박물관 내 모자이크화 속의 그 샘물이다. 그렇게 베르나데트는 모두 18차례 성모 발현을 경험했다. 성모 발현 이후 수난도 당했지만 신심을 잃지 않고 수녀원에 들어가 조용히 살다가 35세에 임종했다. 1862년 교황청이 성모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했음을 공인함에 따라 루르드는 ‘기적의 땅, 치유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기에, 불치병이 낫는다는 영험한 효과가 있다기에”라는 풍문에 귀가 솔깃한 순례객들이다. 그렇다면 순례객들은 성모 마리아를 ‘치유의 여신’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이정주 신부는 “가톨릭은 성모 마리아를 성인(聖人)을 공경하는 ‘공경지례’보다 높은 ‘상경지례’로, 신앙의 전구자로서 받드는 것이지 신앙의 대상은 아니다”고 했다. 실제로 과거에는 성모 발현 동굴 위에는 목발이 무수히 많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치유의 징표로서 말이다. 성모 발현 이후 루르드에서는 7000여건의 기적의 치유 사례가 보고됐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공식인정한 기적은 모두 67건에 불과하다.

루르드 성지 내 광장에 세워진 한국어 ‘주님의 기도’
루르드 순례는 눈에 보이는 치유에 있지 않다. 주교회의 신성근 신부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을 바란다기보다는 회심과 치유의 영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마리스텔라 수녀는 “루르드는 한 번은 청원하러 오고, 또 한 번은 감사드리러 오는 곳”이라고 했다.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성모 마리아 발현지로 계시가 인정된 8곳 가운데 유독 루르드로 순례객들의 발길이 모아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굳이 144㎝의 작은 키에 찢어지게 가난하고 병약했던 베르나데트에게 성모가 던진 메시지는 신앙을 잃어가는 시대에 회개를 촉구하고 신앙의 불꽃을 지피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해 지식층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빈번했던 그 시기에 말이다. 물질주의와 화려한 겉모습에 치우친 나머지 영성을 잃어가는 오늘날 교회에 성모 마리아는 언제 다시 발현할는지….

오늘도, 내일도 순례객들은 루르드를 찾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증명하지 못한다 해도 내면으로 치유받아 돌아간다”고.

루르드(프랑스)=글·사진 신동주 기자 range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