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에 의미가 있나? ^^* *♥* -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형제 자매님도 지난 한 주간을 행복하게 잘 지내셨나요?
저는 이곳 산격본당으로 와서
첫 주일을 잘 지내고 행복하게 한 주간을 지냈습니다.
곧 어려운 일들도 생기겠지만
아직은 매일매일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신자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신자분들이 훨씬 더 큰 사랑을 주시니 행복할 수밖에요 ^^*
형제 자매님,
이런 말을 들어보셨나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병에 걸렸나?”
우리가 흔히 듣고, 또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부당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제1독서에서 욥도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질병이나 극심한 고통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는데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깨뜨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그들은 질병이나 고통은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신앙심을 더욱 굳세게 단련시키기 위해 보내신
시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인 엘리파즈도
“그분께서는 아프게 하시지만 상처를 싸매 주시고
때리시지만 손수 치유해 주신다네.”(욥 5, 18)라고 욥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앞날을 한탄합니다.
희망이 없는 인생은 참으로 고해(苦海)입니다.
그러니 노예나 고용인처럼 살아가며
빨리 이 삶이 끝나버렸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나타내는 치유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시몬의 장모 곁으로 다가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치유 과정이 좀 특별합니다.
열이 내려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진 후에 열이 내렸다고 합니다.
환자 본인은 그것을 정확하게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은혜에 보답하는 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되는 과정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자신이 겪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해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코는 구세주와의 만남이 참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봉사를 통한 추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저녁에 그 집으로 모여온
다른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셨고 마귀를 쫓아내 주셨지만
그들 중에는 아무도 봉사하거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얻고자 했던 것을 얻었기에 그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병에서 해방되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그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피곤하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다음날 아침 일찍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서 다른 동네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드리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알아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시련은 어떤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어떤 젊은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해초가 많아서 방해가 되었습니다.
화가 난 그는
“독한 약을 써서 해초들을 다 없애버려야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고기잡이를 하던 늙은 어부가
“해초가 없어지면 물고기의 먹이가 없어지고
따라서 자네가 잠을 물고기도 다 없어진다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장애물이 없어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없어지면 장애를 극복하려던 의욕도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계란에 비해서 오리 알이 좀 크고 껍질이 두껍습니다.
그래서 오리가 껍질을 깨고 부화하는 과정은 너무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지켜보던 농부가 껍질을 벗겨서 쉽게 나오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그 오리는 죽어버렸습니다.
부화할 때의 고통을 이겨낸 그 힘이 오리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낼 때 더 위대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간질병과 사형수의 고통이었습니다.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를 일생 동안 대기 발령자로 살아가게 한 평가 절하의 고통이었습니다.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끊임없는 여인들과의 실연과 청신경 마비라는 음악가 최대의 고통이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보여주었듯이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그 고통까지도 작품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더욱 훌륭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고통은 결코 불행이나 불운이 아닙니다.
고통이란 도리어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번제물입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비로소 자아를 불사를 용광로 속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며,
용광로 속에서 하느님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보물로 새롭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우리가 겪는 질병이나 고통은 고통 그 자체만 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쉽게 절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고
기쁘게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모습을 이웃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겪는 고통과 질병은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신앙을 순수한 것으로 정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고통과 질병을 견디고 이겨내는 신앙인다운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내가 겪는 고통과 시련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을 철저히 따른 사도 바오로를 닮게 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산격천주교회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강론 말씀 (가나다순) > 박영봉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을 위한 고통 (0) | 2015.03.03 |
---|---|
나병 환자의 모범 ^^* *♥* - (0) | 2015.02.15 |
전교의 왕도는? ^^* (0) | 2015.01.27 |
신앙의 눈 (0) | 2015.01.27 |
영원한 생명을 믿나요? ^^* (0) | 2015.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