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93)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10) - 인류 최초의 유전공학자 야곱
누가 알았으랴, 목숨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잠깐 고향 집을 떠난 야곱이 20년 객지생활의 신세가 될 줄! 어머니 레베카가 일러 준 대로 외삼촌 라반 집에 당도하여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일단 대환영이다. 그날부터 일손을 도우며 한 식솔이 된 야곱은 외삼촌의 두 딸 가운데 동생 라헬을 더 맘에 들어 한다. 외삼촌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니 7년을 일하는 조건으로 승낙 받는다. 꼬박 날 수를 채워 드디어 신방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웬걸! 첫날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어나 보니 간밤의 신부는 언니 레아다. 외삼촌의 해괴한 설득에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또 다시 7년을 뼈 빠지게 일해 준다. 결국 14년을 바쳐 라헬을 얻지만, 야곱은 여전히 라반 집 머슴살이를 면치 못한다. 이렇게 또 7년을 살면서 꾀돌이 야곱은 삼촌 라반의 한 수 위 잔꾀에 연신 당하기만 한다.
어쩌면 이는 하느님께서 손수 주도하신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이는 정의로운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보속’의 절차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야곱에게는 혹독한 보속이 필요했다. 야곱이 에사우를 꾀어 불콩죽을 주고 장자권을 산 것은 둘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지 이사악까지 속이면서 에사우에게 갈 축복을 가로챈 것은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20여 년 동안 라반의 잔꾀에 치가 떨리도록 시달리게 했던 것이다. 꾀에는 꾀로 당하는 보속, 사기에는 사기로 당하는 보속! 그 통한이 깊어질수록, 똑같은 치사함으로 자신에게 당했던 형 에사우의 심정에 대한 공감도 깊어가지 않았겠는가.
말이 20년이지 야곱은 그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밤마다 기도로 달래지 않았을까.
의로움이신 주님, 제 억울함을 굽어보소서.
7년에 7년에 7년, 해도 해도 이건 잔인합니다.
외삼촌이 되어가지고 잔꾀를 부리다뇨.
장인이라는 사람이 사기를 치다뇨.
병아리 같은 애들의 할애비가 착취를 하다뇨.
의로우신 주님, 제 분을 풀어주소서.
의로움이신 주님, 문득 형 에사우가 그립습니다.
7년에 7년에 7년, 그것도 제겐 쌉니다.
살펴보니, 저는 잔꾀로 장자권을 빼앗은 놈!
짚어보니, 저는 사기로 아버지 축복마저 가로챈 놈!
돌아보니, 저는 외삼촌보다 더한 놈!
의로우신 주님, 제 형 에사우에게 장자권보다 더 큰 은총을 내려주시고,
아버지의 축복 보다 더 큰 풍요를 베풀어 주소서.
■ 유전공학의 탄생
저렇게 20년여! 줄곧 얄궂게 당하기만 했던 야곱은 와신상담 분가를 작심한다. 이윽고 어느 날 라반의 양과 염소 중에서 얼룩지고 점 박히고 검은 것들을 가려내어 그들을 자신의 품삯으로 줄 것을 요구한다(창세 30,32 참조).
얼룩 점박이들의 수효가 흰색의 것들에 비할 때 훨씬 적은 것을 알고 있던 라반은 쾌재를 부르며 이를 허락한다. 그는 여기에 욕심을 더 부려 야곱 몰래 얼룩지고 점 박히고 검은 것들을 숨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야곱은 애당초 현실적으로 ‘불리한’ 제안을 할 때부터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껍질을 벗겨 흰 줄무늬가 난 나뭇가지들을 양들에게 보여 주면서 이른바 ‘시각 태교’를 한다.
“껍질을 벗긴 가지들을 물통에, 곧 양들과 염소들이 물을 먹으러 오는 물구유에 세워, 가축들이 그 가지들을 마주 보게 하였다. 그런데 양들과 염소들은 물을 먹으러 와서 짝짓기를 하였다”(창세 30,38).
하지만 야곱은 아무 양에게나 줄무늬 가지를 보여 주지 않았다. “튼튼한 양들과 염소들이 끼리끼리 짝짓기 할 때마다… 그 가지 앞에서 짝짓기를 하게 하였다”(창세 30,41).
결과는 신기했다. 약한 것들은 ‘흰색’ 새끼들을 낳고, 튼튼한 것들은 ‘얼룩 점박이’ 새끼들을 낳았다. 유전자 변형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리하여 야곱은 인류 최초로 ‘유전공학자’가 되었다. 야곱은 ‘바라봄’을 통하여 동물의 DNA 구조를 바꾸어 냈던 것이다.
■ 바라봄의 비밀
야곱은 어떻게 바라봄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까.
짐작건대, 그 첫 번째 단초는 관찰에서 얻었을 법 하다. 본래 흰색 양들과 염소들만 몇 쌍 키우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보니 그들 사이에서 얼룩 점박이 새끼들이 태어난 것이 아닌가. “거 참 희한하네!” 하고 특히 그놈들이 교미를 할 때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자연적으로 부식과 풍화를 거쳐 흰 줄무늬가 생긴 나무들 근처에서 교미를 한 것들의 새끼가 얼룩 점박이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옳다구나, 바로 이 이치로구나!” 하고 그는 ‘바라봄’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는 변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식융합형 머리를 타고난 야곱은 이 이치와 부모로부터 들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직관한다. 그가 이골이 나도록 들은 바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는 항상 무엇을 보여 주면서 말씀하셨다지 않는가!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땅을 주실 때에도 꼭 가나안 땅과 동서남북을 ‘보게 하신’ 후 그 약속 말씀을 주셨다지 않는가.
물론, 명오를 열어주시어 깨닫도록 지혜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 덕에 야곱에게는 번쩍하고 홀연 깨달음이 왔을 터다.
“바라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태교가 된다? 먼저 바라보게 하시고, 약속된 꿈을 품게 하신다? 아하, 무엇이건 머리에 어떤 상이나 이미지가 각인되면 그것은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이로구나! 그래, 바로 이것이야. 이를 ‘각인 효과’라 이름 붙여보면 어떨까. ‘바라봄의 법칙’이라 불러도 좋겠지.”
야곱의 저 발견은 가히 노벨상의 할아버지 감이다. 혁명적 발견, 아니 창조적 발견이다. 우리시대 사상가 에른스트 블로흐는 나의 이 찬사에 한마디 거든다. “상상에는 신적 창조력이 깃들어 있다.”
야곱은 자신의 초시간적 깨우침을 인류 공유의 유산으로 기꺼이 내어 놓는다.
아이들 버릇없다 나무라지 마라.
들은 대로 말하고, 본대로 행한 것일 뿐이니라.
“그러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니”라고 핀잔주지 마라.
들은 것 보다 본 것이 더 움푹 각인되었을 뿐이니라.
좋은 얘기 이상으로, 좋은 모습 남겨주라.
들은 것의 의식은 쇠하여도, 본 것의 무의식은 뒤끝이 있느니라.
생각하고 생각해 보라.
명절 때 부모 따라 해외여행 떠나는 아이들,
성인이 되면 부모를 잘 모실까.
본대로, 그린대로, 상상한 대로, 꿈꾼 대로,
좋은 것 그대로, 나쁜 것 그대로,
나오는 것도 에누리 없이 그대로니라.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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