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교 시절 책갈피
혜화동 신학교 시절, 생활지도 신부님이 집단 면담시간에 “요즈음 읽고 있는 영성서적을 하나씩 밝히고 그 유익을 나누자”고 제안하셨다. 내 차례가 되었다.
“저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준주성범」을 읽고 있습니다. 신앙의 비장함을 일깨워주고, 깨어 있는 영성을 채찍질해줘서 좋은 것 같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지도 신부님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게다가 한 말씀 보태셨다.
“그 책의 내용은 중세시대의 영성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니, 앞으로 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신부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실은 나도 그 책이 십자가 영성에 대해서는 손색없이 기술하고 있지만, ‘부활’ 내지 ‘기쁨 영성’은 소홀히 다루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지도 신부님이 우려하던 바였다.
오십을 훌쩍 넘긴 지금에 와서 식별해 보니, ‘십자가’ 영성과 ‘부활의 기쁨’ 영성을 균형 있게 다룬 책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상황에 맞는 논리를 위하여 편의상 어느 하나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저자의 입장임에 십분 공감이 가기도 한다. 아무래도 균형과 통합은 독자의 몫인가 보다.
이를 전제로, 당시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의 갈피를 넘기다 머문 대목을 다시 배회해 본다.
“오늘날 예수님의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적다. 예수님께 위로를 청하는 사람은 많지만, 고통을 청하는 사람은 적다.
예수님의 식탁에 와서 앉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과 같이 단식을 하려는 자는 적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당하려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들이 역경이 닥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동안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축복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모습을 감추거나 떠나시면, 그들은 불평하고 크게 낙담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고통과 불행이 와도 큰 위로를 받는 순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찬양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위로 없이도 하느님을 똑같이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어떠한 이기심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그런 사랑이야말로 참으로 강하도다. 언제나 위로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장사꾼보다 나을 게 전혀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위안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문장 한 문장이 게으른 신앙인의 폐부를 찌르는 간곡한 성찰이다. 이 성찰의 출발과 끝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행복이 자리하고 있다. 박해받는 사람이 왜 행복한지를 깨달은 사람은 어떤 박해도 감당할 용의가 있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현재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이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의 주인공이라는 얘기다.
■ 박해받는 사람들의 행복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여덟 번째 행복의 주인공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박해하다’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는 그리스어로는 ‘디오코’(dioko), 히브리어로는 ‘라다프’(radap)다. ‘라다프’는 본디 ‘쫓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이것이 발전하여 ‘박해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박해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단순한 스토킹에서 시작하여, 추적, 착취, 육체적 고통, 정신적 괴롭힘, 나아가 영적 핍박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서 박해를 받는가?
첫째, 의인이 악인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시편 119,161 참조).
의인이 박해받는 자의 대표라고 한다면, 권세가들은 악인의 상징으로서 박해자의 전형이다. 의인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악인들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둘째, 예언자가 반대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예레 15,15 참조).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그 메시지에 불만을 품은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대부분 예언이 기득권층을 향한 비판이거나, 나라의 멸망을 예고하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가난한 자, 궁핍한 자, 마음이 상한 자 등 약자가 권력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시편 109,16 참조).
이는 박해라기보다는 착취에 해당하는 괴롭힘이었다. 권세가들의 권력 남용은 자연히 약자에게는 소외와 고통 그 자체였다.
이런 배경에서 박해는 장차 올 메시아의 운명으로 예언되었다(이사 53,4-5 참조).
신약에 이르러 박해는 그리스도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의인이요 예언자요 약자의 대변인이었으며, 나아가 예고된 메시아였기 때문이다. 박해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된 운명이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예수님 공생활이 절정에 이르러 베드로가 당신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이후, 스스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다(루카 9,22 참조). 예수님의 생애는 이 말씀대로 박해로 점철된 여정이었다.
박해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운명이 된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24,9).
제자는 스승이 간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제자는 예외 없이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는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바로 이런 전후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다. 박해받은 이들이 누리는 축복으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약속되었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순과 고난투성이의 현재에 영적으로 누리는 충일한 임마누엘 하느님의 임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하느님 나라’라는 약속 가운데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며, 여덟 가지 행복의 마침표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80) 8가지 참 행복 -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행복
박해받는 이들이 누리는 축복, ‘하늘나라’
발행일 : 2014-08-03 [제2906호, 15면]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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