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형제 이야기
성경 속 이야기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예지가 깃든 경우가 많다. 그 이야기들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치부하지 않고, 고스란히 대물림하며 두고두고 곱씹어온 유다인들은 오늘날 단연 독보적 ‘지혜의 민족’으로 우뚝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노아의 아들들 이야기다. 노아는 아들이 셋 있었다. 셈, 함, 야펫. 여기서 셈은 유럽 백인, 함은 아프리카 흑인, 야펫은 황색인의 조상이다.
어느 날 함은 노아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잔뜩 취한 나머지 옷을 훌러덩 벗고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 함이 자기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린다.
“얘들아, 얼른 와봐! 아부지가 지금 술 취해서 알몸으로 인사불성이 되었어!”
하지만 셈과 야펫은 함의 기대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셈과 야펫은 겉옷을 집어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알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았다”(창세 9,23).
그 후 노아는 아들들을 모아 놓고 함을 야단친다.
“함, 이 못된 녀석! 내가 아무리 술에 취해 실수했다 하더라도, 네가 그걸 나발 불고 다니면 되겠느냐?”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날 이른바 ‘스캔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잘 가르쳐 준다. 일례로 주변에서 ‘스캔들’이 났다고 치자. 그때 함처럼 소문을 퍼트리며 치부를 까발리는 사람이 있고, 셈과 야펫같이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도 있다. 누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인가? 성경은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답을 제시한다. 고발하지 않고 덮어 주는 사람! 그러면서 배려의 마음을 품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정의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대목이다. 정의는 반드시 필요하되, 그 짝으로 자비와 배려라는 수용의 그릇이 함께 요구된다는 것이다.
사실 누구든지 노아와 같은 허물을 가지고 산다. 그런 것들을 셈과 야펫처럼 덮어 주고 수용해 주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행복의 네 번째 주인공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여기서 ‘의로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히브리어는 ‘체다카’(tzedakah)다. 구약에서 의로움을 뜻하는 ‘체다카’(tzedakah)가 사람에게 요구되는 성품을 가리킬 때, ‘절대적 윤리적 규범’에 대한 인간의 방정한 품행, 즉 적법한 인간 태도를 뜻한다. 한편, ‘주리고’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페이논테스’(peinontes)로서, 이는 먹을 것을 찾아서 목숨을 걸고 구할 정도의 배고픔을 의미한다. ‘굶주림’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겠다. 또한 ‘목마른’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딥손테스’(dipsontes)인데, 이는 극심한 갈증으로 목이 타 들어가고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갈’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
이제 ‘의로움’에 주목해 보자. 앞에 언급된 뜻대로라면, ‘의’는 그 절대적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역사상 그 기준이 한 번에 주어지지는 않았다. 사람의 인식수준과 이해력, 문화의 발달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주어졌다.
우선, 아직 율법이 없던 시절 ‘의’의 기준은 말씀에 대한 순명과 믿음이었다. 이 기준으로 선포된 의인의 대표가 ‘노아’(창세 6,9 참조)와 ‘아브라함’(창세 15,6 참조)이다. 노아가 의롭다고 선언된 것은 그의 ‘그대로 하였다’ 영성, 곧 말씀에 대한 순명 때문이었다. 아브라함 역시 하느님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순명하며 실행에 옮긴 사람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 말씀에 대한 그의 무조건적인 믿음의 태도를 보시고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셨다.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양심’을 통해서 그때그때 주어졌다.
다음으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과 율법이라는 기준을 주셨다. 이때부터 ‘의’의 기준으로 ‘율법’이 자리 잡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예언자의 시대에 들어가면서 이 ‘의’의 적용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아모스 예언자는 사회적 구조악이나 연대감의 결핍을 지적하면서 그 유명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이렇게 구약에서의 ‘의’의 개념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점진적으로 변천했다.
■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고개
‘의’의 개념의 완성은 요셉의 성품을 설명하는 복음서 대목에서 극명하게 이루어진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마리아의 임신을 알게 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과연 의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했을까? 그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는 고소했어야 옳다. 그런데 요셉은 그 반대로 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을까? 이는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공개하지 않고, 마리아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혼장을 써줘서 마리아하고 ‘썸씽’이 있었던 남자와 합법적으로 살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요셉의 ‘의’는 아주 반듯하게 자르는, 두부 자르듯이 자르는 의가 아니고 도와주고 살려주는 의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이런 요셉의 성품을 보시고 ‘너는 참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요셉의 ‘의’가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다. 율법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잘못된 거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는 고개다. 율법의 핵심 정신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사랑으로 명료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의’의 기준이 율법에서 사랑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이제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 당신의 기준을 업그레이드하신다. 구약에서 ‘의’가 ‘단죄하는 의’였다면, 신약에서는 ‘살리는 의’인 것이다. 과거에는 단지 ‘율법의 준수’만 요구하시다가 점점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의인’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초보적인 의는 단죄하고 심판하고 고발하고 처단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진보된 의는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의’의 심오한 뜻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다. 이것이 바로 ‘의’의 진수가 아닌가!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72) 8가지 참 행복 - 의로움의 혁명
‘의’(義),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
발행일 : 2014-06-08 [제2898호, 13면]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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