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님이 하지 말래도
지금으로부터 일곱 해 전쯤이었을 것이다. 모 교구 소공동체 봉사자 월례교육을 위해 지구별로 순회하며 특강을 하고 있었다. 여러 강조점 가운데 ‘아멘’을 특별히 권장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분, ‘아멘’은 입술로 바치는 신앙고백입니다. 속으로만 믿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입술로 ‘아멘’하고 고백해 드릴 때, 주님께서는 더 기뻐하십니다. 특히 강론 내용이 마음에 와 닿을 때 고개로만 끄덕이면 그냥 듣기 좋은 얘기로 끝날 수 있지만, ‘아멘’으로 화답하면 그것이 ‘내 체험’이 되어줍니다. ‘아멘’은 무주공산의 은총을 바로 내가 누리는 은총으로 끌어 당겨 줍니다.”
이런 식의 권면이었다. 그랬는데, 그 다음 주 다른 지역의 강의 쉬는 시간에 어느 자매님이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신부님, 지난 주 신부님 말씀 듣고서 주일 미사 강론 때 ‘아멘’ 했다가 신부님한테 혼났어요. ‘거 자매님, 아멘 좀 그만 하세요. 분심 들어서 강론에 방해가 되잖아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멘’ 해야 할까요?”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성령의 감도에 힘입어 이렇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자매님, 이번 주 주일 미사 강론 때에도 천연덕스럽게 ‘아멘’ 하세요. 신부님께서 또 야단을 치거든, 일단 신부님 말씀에 순명하세요. 그러고선, 미사가 끝날 때 슬그머니 신부님을 뒤쫓아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여쭈세요. ‘신부님, 제가 몰라서 그러니까, 가르쳐 주세요. 예수님은 아멘 하셨나요, 안 하셨나요? 또 성모님은요? 만일 그분들이 아멘 하셨다면, 저는 신부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셔도 아멘 할래요. 만일 안 하셨다면 저도 안 할거구요.”
자매님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나는 이 난제(?)를 진지하게 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매님이 저렇게 해학의 여유를 갖도록 돕는데 만족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과연 ‘아멘’ 하셨을까? 물론이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자주 나오는데 여기서 ‘진실로’가 바로 ‘아멘’의 번역어인 것이다.
■ 통째로 ‘아멘!’
사도신경의 마지막 고백은 ‘아멘’이다.
라틴어 본문의 ‘아멘’(Amen)은 히브리어 ‘아멘’을 빌려다 쓴 단어다. ‘믿는다’의 동사 ‘아만’(aman)의 부사형이다. 이 ‘아멘’은 어떤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는 것으로 ‘옳거니’, ‘확실히’, ‘당연히’, ‘마땅히’의 의미다. 이 시대의 시쳇말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당근입니다!’ 쯤 될 것이다.
이 ‘아멘’은 앞의 “나는 믿나이다”에 대한 종지부로서 ‘아멘’이다. 이 ‘아멘’은 전체를 수용하여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이다. 이는 사도신경 고백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고르지 않고, 통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뉴만 추기경의 말은 옳다.
“진리에 있어서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분만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거짓’에 빠지게 된다.”
그러기에 만약 사도신경 원문에서 하나만 빼도 그것은 거짓이다.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확 빠진다는 뜻이다. ‘성자’를 빼도 문제가 되고, ‘성령’을 빼도 문제가 되고, ‘교회’를 빼도 문제가 된다. 그러니 통째로 ‘아멘’이다.
지금까지 사도신경 전체를 훑어봤다. 그런데 때로 바삐 바치다 보면, 이 모든 내용이 생각나기 어렵다. 그럴 땐 느낌으로, 직감으로, 가슴으로 내려온 것을 받아들여 고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지금까지 익힌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각 구절을 떠올렸을 때 오는 느낌을 확인해 보자.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주 성부’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아버지가 떠오를 것이다. “든든하다”, “빽이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다”와 같은 느낌이 팍팍 올 것이다.
천지의 창조주: ‘창조주’하면,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 이 분에게서 생명이 나온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구원이 느껴지는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죽었다가 살았구나”라는 느낌이 확 들게 마련이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모성애가 느껴지는가? 동정 마리아는 어머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키우신 어머니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답답하고 억울한 느낌이 드는가? 동시에 “어느 놈이 그랬어?” 하고 분노도 느껴지는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어느 놈이 바로 ‘나’일 때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절망스럽고 슬픈 느낌이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비로소 ‘할렐루야’다. 뒤집히지 않았는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으니, 반전이며 역전 만루 홈런이다.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느낌 그대로 ‘영광’이다. 엄위로운 가운데 전권을 갖고 계시니 말이다.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두려운 느낌이 좀 든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은 두렵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설레고 기다려지지 않는가.
성령을 믿으며: 성령은 뜨겁다. 또 성령이라는 협조자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다. 전속 보디가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연대성도 느껴지고, 측은지심도 생기고, 가족애도 느껴진다. 내 곁에 믿어지는 구석이 있으니 이 역시 든든한 느낌이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말 그대로 죄를 용서 받고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희망이다. 죽지 않고 사는 것 아닌가.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영원한 삶은 무엇인가? 그 안에 지복직관, 환희, 기쁨, 평화 이런 것들이 차고 넘친다. 이처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차고 넘치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아멘: 이는 앞에서 마음으로 수용한 모든 것에 대한 고개를 끄덕임이요, 박수의 화답이다.
■ 아멘의 효력
실제로 강남의 어느 가정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결혼식을 막 올리고 신혼여행을 갔다 온 새 신부의 시어머니가 성직자에게 축복기도를 받게 하려고 데려갔다. 시어머니는 성직자에게 아이를 빨리 낳게 해 달라고 축복기도를 청했다.
며느리는 부끄러워 성직자의 힘 있는 축복기도에 ‘아멘’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만 연신 ‘아멘’을 외쳤다. 1년 후, 아이를 낳은 사람은 시어머니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은총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아멘’ 하여 끌어당기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신앙유머일터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59) 아멘의 영성
은총을 내것으로 만들려면, ‘아멘’으로!
발행일 : 2014-03-09 [제2885호, 13면]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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