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하시죠? ^^* ♥♡*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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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시죠? ^^* ♥♡*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부활절은 기쁘게 잘 지내셨나요?
지금도 여전히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계시죠?
자연도 부활의 기쁨을 맘껏 노래하고 있었는데
물러갔던 동장군이 심술이 났는지
다시 추워진다고 하니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피었던 꽃들이 다 얼어버리면 어쩌나 하고요. ^^*
형제 자매님,
지금 행복하십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원래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작품이든 마지막 말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도 이 마지막 말씀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배경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요?
사도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가놓고 집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며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함께 성령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난 못 구멍을 보고 손가락을 넣어봐야 믿을 수 있다고,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도들이나 그들의 후계자들을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있는
우리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 자매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복음을 믿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는 그 후 다행스럽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한 사도가 되도록
예수님께서 특별히 불러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막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자
너무나 강한 인상을 받은 나머지,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서도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도 말한 적이 없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형제 자매님,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 곁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사도들과 꼭 같은 체험을 할 수가 있고
토마스와 같이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고자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을 직접 뵈었던 사람들보다
우리가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수가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다시 오늘 복음에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처음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왜 다시 모였겠습니까?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즉 다시 모인 사람들은 한 주일이 지나고 다시 주일이 되어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바로 매 주일마다 주일 미사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토마스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사도들의 후계자 곧 교회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받은 사람,
믿기는 하지만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토마스요 나 자신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오늘의 복음은 그런 사람이
교회의 전례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례 특히 미사성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곧 그분의 파스카 제사를 성사적으로 보여주고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뵐 수 있었던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축복은 결코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아버지께로 떠나시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자리에서 우리들도 기억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요한 17,20-21)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형제 자매님,
마태오 복음에서는 여덟 가지 행복을 선언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면서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바로 서로 간의 사랑을 살 때 우리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형제 자매님,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셨다면 예수님의 이 약속이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신생활 면에서 진보해 나가기 위해
의지할 대상을 찾거나 표적을 구하지 말고,
부활하신 당신께서 우리의 생활 안에 현존하심을 의심치 말라고
호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가 실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신비를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사랑을 살 때,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그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 또 다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으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계명을 실천하면서
행복하게 한 주간을 잘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대구 신학교 하양 신학관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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