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20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열왕기 하2,1.6-14 마태6,1-6.16-18
내적 관상(內的 觀想)의 삶
오늘은 ‘내적 관상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우리가 매일 노래하는 시편 역시 내적 관상의 하느님 체험을 반영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다음 시편 구절도 은혜롭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라.
마음을 굳게 가져라.”(시편31,25).
아무리 가물어도 영혼만은 가뭄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 은총으로 촉촉이 적셔 있어야 합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은총으로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 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분명 하느님을 체험한 시편 관상가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어제의 재미있는 신비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감히 신비체험이라 명명합니다.
어제 로무알도 아빠스 기념일 강론을 수도원 홈페이지에
아빠스의 생몰(生沒) 연대, 950-1027 를 올리고 나면
즉시 태극기와 전화기 그림이 나오는 전화번호로 바뀌는 것입니다.
‘아, 이게 로무알도 아빠스의 천국 전화번호인가’하는
재미있는, 신비스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성인들마다 천국 전화번호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전화통 조용할 날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적 관상의 삶을 깊이 있게 사는 이들은 수시로 천국의 성인들과
내적 통화의 대화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적 관상의 삶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외적 활동에 치우치다보니 날로 거칠어지고 천박해 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외적성장보다는
내적성장과 성숙에 힘을 기울여할 관상의 시대가 도달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의식있는 이들은 '오래된 미래'를 얘기하며
앞으로의 희망은 자급자족의 지속가능한 촌락공동체를 말합니다.
성장이 아니 성장 없는 시대를 얘기합니다.
비현실적 얘기 같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예언적 통찰입니다.
계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다보면
자원의 고갈과 쓰레기의 양산으로 지속가능한 세상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인류종말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장과 더불어 미래인 사람과 자연이 계속 망가져 간다면
그런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재앙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주님은 자선, 기도, 단식의 전통적인 수행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내적 관상의 삶을 촉구하십니다.
실속 없는 외화내빈, 자기 과시의 허영의 공허한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소탈하고 평범한 숨겨진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외적 부자가 아니라 내적 부자 되어,
많은 소유가 아닌 충만한 존재로 살라 하십니다.
오늘 주님의 자선,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외적 삶과 내적 삶이 극명한 대조를 이룸을 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6,3-4).
성철 스님이 두고두고 극찬한 구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6,6).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6,17-18).
이 주옥같은 말씀들은 최고의 관상가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와의 영적통화 후 얻은 통찰일 것입니다.
이래야 순수한 믿음이요, 순수한 희망이요, 순수한 사랑입니다.
영적 삶의 원리가, 내적 관상의 삶의 원리가 그대로 들어납니다.
누가 알아주지, 보아주지 않아도
숨겨진 보물, 하느님 한 분 만으로 행복한 관상가들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진정 내적 자유에 내적 부요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 때 깊은 관상기도를 통해
예언자들처럼 수시로 천국과의 영적 통화도 가능합니다.
비상한 관상가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이들이
진정 무공해, 무오염의 산소 나무 같은 건전하고 건강한 관상가입니다.
이런 관상의 삶에서 샘솟는 참 행복이요
이런 관상의 보편화가 시대의 징표입니다.
엘리야나 그의 후계자 엘리사 역시 하느님의 관상가임이 들어납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가지도 잎도 무성하듯이
엘리야의 치열한 삶에는 깊은 관상의 뿌리가 뒷받침되고 있음을 봅니다.
바로 승천의 장면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깊은 관상의 삶을 살았던 엘리야에게
승천으로 응답하신 주님이십니다.
역시 비상한 승천이 아니라 죽음을 편안히 기쁘게 맞는 이들 역시
지상의 육신의 옷을 버리고 승천했음을 알리는 표지임이 분명합니다.
영안이 열려 주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것을 본 엘리사 역시
깊은 관상가임이 들어납니다.
하느님은 엘리야에 이어 엘리사를 예비해 두셨음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관상기도는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뵙고 당신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를 성화시켜 주시어
예수성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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