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삼위일체 대축일 - 내어줌과 삼위일체
1300년 성녀 리타로 유명한 카시아(Cascia)지역에서 있었던 성체기적 이야기입니다.
한 사제는 서품 받을 때의 첫 신앙이 메말라서 그냥 일상적으로 성당 직무들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중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제가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보통은 성체를 성합에 넣고 목에 거는 주머니 안에 넣어서 모셔 가는데, 그는 급한 나머지 성체를 자신의 성무일도 사이에 끼어 넣고 병자성사를 주러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 주고 성체를 영해주기 위해 자신의 성무일도를 펴 보았더니, 성체는 사라지고 성무일도 양쪽 페이지에 둥그런 핏자국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두 장 중 하나는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한 장은 카시아의 한 성당에 모셔져 있는데, 더 신기한 것은 둥그렇게 된 성체모양의 핏자국 안에는 그리스도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있어야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은 아드님입니다. 아드님은 아버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치 성무일도가 그냥 썩어버릴 종이에 불과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드님께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체가 종이와 하나가 될 수 없기에 성체는 종이에 흡수될 수 있는 물질인 ‘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피가 성령님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아드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적에 당신의 모든 것을 성령님께 맡겨드려 성령님을 통해서 아들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길은 하느님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종이와 피로 하나 되어 종이를 보는 것이 곧 성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삼위일체 신비를 너무나 명확하게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해 밀떡 모양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이 밀떡 모양의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것, 즉 성령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한 몸이 되는 삼위일체 신비를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삶을 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미국을 방문하고 계셨습니다. 한 여인이 마더 데레사를 만나기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외모로만 보아도 많이 배우고 돈 많고 부족함 없어 보이는 외모까지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이렇게 하소연하였습니다.
“저의 삶은 너무 권태롭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제가 있는 곳에 오면 제가 진정한 삶을 드릴게요. 죽기 전에 한 번 꼭 방문해 주세요.”
“아니요, 이젠 고민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 오시면 삶을 드리겠다.’는 의미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녀는 바로 20년간 봉직하던 학교를 떠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만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되돌아가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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