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이수철 신부님

★☆ 진리와 자유 - 진리는 사랑입니다.

김레지나 2012. 4. 11. 21:29

2012.3.28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다니3,14-20.91-92.95 요한8,31-42

 

진리와 자유


오늘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늘 들어도 좋고 가슴 설레게 하는 진리와 자유란 말마디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이 각인 된 두 단어가 진리와 자유입니다.

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모든 이에게 내재한

진리와 자유에 대한 갈망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입니다.

고원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추상적 진리가 아닙니다.
깨달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있는 진리들이며

이 진리를 체험하여 깨달아 살아갈 때 자유요 행복입니다.


저에겐 어제의 평범한 체험 역시 그대로 진리의 체험이었습니다.

“어디서든 살면 됩니다.”
 

오랜만에 만난 수도형제의 화두 같은 말에

저는 즉시 다음 말로 화답하고 만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소와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앞에서 수도자로 살면 됩니다.”
바로 이게 진리의 체험입니다.

비상한 진리 체험이 아니라

삶에서 오는 이런 평범한 깨달음이 바로 진리 체험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앞에서 사는 자가 수도자요

이런 수도자는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또 어제 아주 사소한 체험도 저에게 진리 체험이었습니다.

수도형제들과 함께 본원에 회의 차 가는 도중 잠시 휴게소에 멈췄고

저는 피곤도 하고 할 일도 있어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원장님, 호두과자 잡수십시오. 배 즙도 여기 있습니다.”

이어 한 형제가 초콜릿을 권해 또 먹었습니다.

자신이 사서는 먹지 않았을 것이며 먹어도 별 감동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는 달랐습니다.

받아먹으니 참 고맙고 좋았습니다.
이 또한 저에겐 진리 체험이었습니다.

진리는 바로 사랑이구나,

사랑 체험이 바로 진리체험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사랑이 빠진 진리는 죽은 진리, 껍데기 진리입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 바로 진리를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랑의 사람, 진리의 사람들은

매사 총체적으로 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의 소화 데레사 시성 이유에 새삼 공감이 갔습니다.

“성녀는 가장 평범하고도 작은 일에 큰 사랑을 담아 실천하셨고

  바로 이게 시성이유입니다.”
요지의 말씀이셨습니다.


일상의 작은 일에 큰 정성과 사랑을 쏟을 때 살아있는 진리를 체험합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이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명쾌하게 해명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나 자유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주석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고 참된 생명을 가져다주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을 한데 결합시키는 하느님의 실재이다.

  이 진리는 예수님에게서 드러나고 
  그분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 예수님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물러 진리이신 예수님과 깊은 친교의 사랑을 나눌 때
주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리도 자유도 바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에서만 수차례 언급되는 진리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바로 진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그분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자체이신 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분을 닮아갈 때 거룩해지고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진리 없는 세상의 자유는

거짓 자유이자 궁극에는 우리를 노예화합니다.  


자유에 대한 주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도 아니고,

  현인이 인간 현실에 대한 숙고의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내적 자유도 아니다. 
  이 자유는
성부와 성자와 일치를 이루면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주는 능력이다. 
  이런 자유는 종말론적인 자유이며

  예수님에게 받은 진리와 관련되는 선물이다.’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살 때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고 더불어 선사되는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다.

 사랑-진리-자유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공허한 가짜 진리요,

진리 없는 자유 역시 공허한 가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말씀이 좋은 보완이 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은

바로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 것이냐 아드님의 자유인으로 살 것이냐는

순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진리이신 주님과의 친교를 깊이 해 갈 때

주님의 은총으로 이뤄지는 자유인의 삶입니다. 

진리에 충만한 자유인의 삶을 상징하는 게

오늘 1독서의 타오르는 불가마 속의 세 청년입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거닐고 있는 이들을 본 바빌론 임금은

기절초풍하여 묻습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참 통쾌한 장면입니다.

타오르는 불가마가 상징하는 바

생존경쟁 치열한 연옥과도 같은 공동체이자 세상이요

신의 아들이 상징하는바 주님이십니다.

진리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연옥 같은 세상에서도

몸과 마음 하나 다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음을 봅니다. 

사실 우리는 진리로 자유롭게 된 믿음의 사람들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주목할 것은

다니엘서에 빠진 부분(다니3,21-90)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 성무일도 때 마다 부르는 다니엘 찬미가는

바로 이 세 청년이 불가마 속에서 불렀던 찬미가입니다. 
우리 역시 사랑과 진리로 충만하여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끊임없이 바칠 때

주님은 연옥 같은 세상에서도
우리 모두 자유롭게 살게 하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진리 자체이신 당신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