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신앙 자료

☆★☆ 김수환 추기경님의 십자가의 길

김레지나 2011. 5. 1. 17:26

김수환 추기경님의 ‘십자가의 길’ 묵상

 

 

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또한 언제나 동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마침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을 위해 당신을 바치셨기 때문이다. 구원되어야 할 영혼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그치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 매일같이 고통을 받고 죽어 가는 그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는 계속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성부에게 제헌하신다.

‘십자가의 길’은 ‘생명의 길’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내일, 모레 혹은 10년 후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1. 예수, 사형 선고를 받다.

 

  주여,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불의(不義)를 거스려 당신은 너무 지나치게 말씀하셨고, 너무나 과감히 싸우셨습니다. 거지, 죄소, 문둥이, 앉은뱅이, 절름발이, 밤거리의 여인 등 비천한 사람들이 천당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시며, 점잖고 멀쩡한 신사 양반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독사의 무리들’이라고 하셨으니 그게 될 말입니까? 그러니 율법만은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 명망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속이 편할 리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을 저주까지 하셨으니!

  역설도 분수가 있지, 왜 ‘말째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말째가 된다’고 하셨습니까? 왜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더 힘들다느니, ‘주여,주여’하는 자마다 모두 천국에 들어가진 못한다느니, 가난한 이는 ‘진복자(眞福者)라느니 하셨습니까? 그러기에 비웃음, 저주, 증오, 뭇사람의 손가락질,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뿌린 씨의 대가인 것입니다. 당신은 무고죄와 선동죄로 고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택한 당신을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아! 너무나도 어리석으신 주 예수여!

   이젠 입을 다무셔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온 세상이 당신께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당신 몫은 오직 십자가의 어리석음, 그것뿐입니다.

 

 

 

2. 예수, 십자가를 지다.

 

  주여! 당신의 십자가가 여기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의 십자가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지실 운명을 자초하셨습니다. 스스로 지은 죄 없이 대죄인처럼 자신을 낮추셨으니, 허리를 굽혀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 똑바로 걸어가십시오.

  주여, 여기선 전진뿐입니다. 후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 어차피 당신이 져야 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저 형리들의 포악한 고함소리, 당신을 내려치는 채찍소리, 군중의 아우성, 히히덕거리는 웃음소리를 침묵으로 삭이며, 온 인류, 온 누리가 살기 위해 당신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거기 못 박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여, 당신은 묵묵히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수난의 고갯길을 걸어 오르셔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  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읽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카 9,23-24)

 

 

3. 예수, 기진하여 첫 번째 넘어지다.

 

  주여, 어찌된 일입니까? 왜 이리 비틀거리십니까?

  아! 당신은… 드디어… 주께서 기진하여 넘어지셨다. 하느님이 땅바닥에 넘어지셨다.

  주여, 어느 용사인들 갈증과 허기진 몸에다가 편태로써 시뻘겋게 터진 어깨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탱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여, 일어나소서. 여기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림으로 휘청거리는 당신 형제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나소서. 전진을 가능케 하는 푸른 신호가 없어, 세상의 비정(非情)과 현기증에 취해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당신 형제들의 지친 몸을 지고 일어나소서. 당신은 이 현실 사회에서 추방되어 인생 종착역 같은 행려자 수용소에 가 있는 당신 형제들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주여, 나를 온전히 당신께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확신하던 나, 마음속의 잔잔한 파도, 나를 거슬러 오는 작은 바람에도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벌써 수없이 넘어집니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 거짓으로만 보였습니다.

  당신의 종 바오로의 말씀같이, 암만 해도 다른 법칙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이 나약한 육신과 지조 없는 마음은 당신을 떠나고 나의 십자가를 그만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뒤에 방황하는 이 영혼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좀먹듯이 파고드는 공허뿐입니다.

  “주여, 일어나소서. 우리 육신이 땅에 붙사오니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하소서.” (시편44,23-26) 당신 종의 빈 마음을 지고 일어나소서. 버려두고 온 나의 십자가 를 다시 지도록 나의 마음과 정신에 힘을 주소서. 주여, 나와 실의에 찬 당신 형제 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여 주소서.

 

 

4. 예수, 길에서 성모를 만나다.

 

  주여, 너무나도 가련한 당신 어머니가 저기 보입니다. 당신과 함께 이 고난의 길을 허겁지겁 뒤따라가십니다. 아우성치는 잡다한 군중 속에 끼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십니다.

  성모님의 눈은 당신의 기진맥진한 몰골, 온몸의 상처, 진땀, 휘청거리는 걸음, 당신만을 응시하십니다. 당신의 그 어느 것도, 몸과 마음, 당신의 털끝 하나도 성모님의 눈은 놓치지 않으려 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당신께 근접도, 당신 피땀을 씻어 주지도 못하십니다. 어머니로서 한마디 위로의 말도 당신께 건네지 못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고통은 비수가 되어 그 심장을 오려내듯 어머니의 마음을 애통케 합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은 아십니다. 이 통고(痛苦)의 어머니께서 당신의 뒤를 따라 당신과 함께 온 세상을 구해 가심을!

  주여! 저도 이 어머니의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가끔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의 고통의 길을 뒤따라 가보지만, 거듭되는 새로운 불행, 새로운 불의와 죄악을 견디지 못해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습니다. 내게는 형제도 친척도 부모도 처자도, 아는 사람들도 없기를 얼마나 자주 바랐는지요. 주여, 저에게도 이렇게 묵묵히 모든 형제들과 고생을 같이 하면서 괴로워할 수 있는 사랑을 주소서. 먼발치에서나마 당신만을 응시하며, 어머니처럼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을 구하는 작은 제물 되게 하소서.

 

 

5.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지다.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올라오다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병 사들은 그를 붙들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마르 15,21)

  주여, 이제까지는 남을 도우신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병자를 낫게 하시고, 굶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시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신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바다의 폭풍우조차 당신의 한 말씀에 금시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그 위대하심은 어디 갔습니까? 어찌하여 당신은 이렇듯이 비참한 존재로 떨어져 만인의 치욕이 되셨습니까? 왜 이렇게 처참히 홀로 수난의 길을 가시게 되었습니까? 생사를 함께 하겠노라 장담하던 당신의 벗들은 또 어찌 되었습니까?

  그러나 주여, 여기 시몬이 있습니다. 시몬이 당신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못해서였습니다. 그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배고프고 피곤한 몸이었습니다. 그는 당신 옆을 따르는 그 살기등등한 군인이나 바리사이 중 누구를 도우라고 했어도 순순히 따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위와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당신은 노예와 같이 참혹히 피땀에 젖은 당신은….

  시몬이 당신을 알 리 없습니다. 그의 눈에는 지금의 당신은 한 사형수에 불과합니다. 멸시와 저주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도우라는 데는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고프고 피곤해서만도 아닙니다.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도 시몬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이 내게 맡기신 사람들, 형제와 같이 특별히 사랑하라고 부탁하신 사람들, 그들은 나를 피곤하게 합니다. 빈곤, 질병, 실업, 인간과 사회의 비참 자체인 이들에게 나는 염증을 느낄 뿐입니다. 생각만 해도 내게 구차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 하나하나를 형제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마태25,31-36)

  주여, 나를 책하소서. 오늘 다시 세상 물정과 외양 따라 당신과 당신 형제들을 천대한 이 죄인을 책하소서. 내 어두운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받는 이들 안에 십자가 지신 당신 모습 보게 하소서. 그들이 이 시대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당신임을 알게 하소서.

 

 

6. 성녀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씻어드리다

 

  주여, 베로니카의 용기와 사랑에 깊이 감동됩니다. 저주와 멸시, 형리들의 횡포와 채찍, 이런 살벌함 속에 고독하게 버려진 당신, 그 얼굴의 피땀을 누가 감히 나서서 닦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신 사랑의 위대하심입니다.

  보통 인간이면 하찮은 고통 속에서도 남의 친절을 친절로 갚기란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당신과 같이 기진한 상태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죽기보다 더한 그 큰 고통 중에 베로니카의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셨습니다. 베로니카는 그 수건뿐 아니라 마음 깊이, 존재 깊이까지 당신 수난의 모습을 새겨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구원이었습니다.

  위대하신 주의 마음이여! 굳세면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마음이여!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홀로 균형을 잃지 않는 광대한 사랑의 주인공이신 주여, 나에게도 이 마음의 넓이를 주소서! 성세(聖洗) 때, 당신은 나에게 당신 모습 깊이 새겨 주셨으니, 나의 삶은 당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진실과 용기의 부족으로 오히려 찢어진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육신의 작은 고통에도 곧 마음까지 피로를 느끼며 주위의 사람들, 그들의 친절까지도 귀찮게만 생각하였습니다.

  주여, 당신의 현존을 어둡게 한 이 눈을, 이 부정한 마음을, 이 안일만을 찾는 육신을 용서하소서. 피땀에 젖은 당신 모습을 새긴 베로니카의 성포(聖布)가 내 생활 갱신의 지표 되게 하소서. 쇄신을 구하는 오늘의 교회가 그것을 거울과 기치(旗幟)로 삼게 하소서. 하여, 주이신 당신을 참되이 드려내는 교회 되게 하소서.

 

 

7. 기력이 쇠한 예수, 두 번째 넘어지다.

 

  예수께서 다시 넘어지셨다. 억지로나마 그를 잠시 도왔던 시몬마저 어느새 도망치고 없다. 짓밟히고 버림받은 사람, 예수는 그렇게 배신의 채찍을 맞고 또다시 비탄에 쓰러졌다. 십자가의 온 무게가 예수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다. 아니, 우리 모두의 죄가 그를 기진케 하고 다시 쓰러지게 하였다. 그는 우리 죄를 대신해 우리의 십자가를 지셨으니.

  주여,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쓰러졌습니다. 이젠 한 발자국도 더 옮길 수 없습니다. 나도 힘껏 싸웠습니다. 내 옆에 당신이 지켜 서 계시고, 나를 알뜰히 보살피심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삽시간에 폭풍우처럼 나를 휘몰아쳤을 때… 모든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외면했고, 같은 순간 이 구렁텅이에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는 일, 유혹하는 사람은 어느새 바람과 같이 사라지도 없습니다. 수치와 자학에 젖어 나는 빈손에 허무만을 움켜잡고 퍼져 앉은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 주여! 내 소유로 남은 것이 이제 무엇입니까? 이 죄뿐입니다. 아니, 죄는 나보다도 더 힘껏 나를 제 손아귀에 움켜잡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 면전에 서기조차 이제는 두렵고, 무엇보다 당신의 그 눈이 두렵습니다. 너무나도 맑고 깊은 사랑에 가득 찬 눈이기에 나는 오히려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응시하지 마옵소서! 헐벗고 찢어지고 더렵혀진 나를 그렇게 자꾸만 보지 마옵소서.

그러나 주여, 당신은 좋으시고 인자하시니 나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소서. 이 몸 구렁에서 건져 주시고, 나의 모든 나약과 죄와 가난을 지고 다시 일어서신 당신 따라 이 고난의 길, 생명의 길을 나도 같이 계속 가게 하소서.

 

 

8. 예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다.

 

  주여, 예루살렘의 부녀들은 당신을 보고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거룩한 말씀과 숱한 기적을 듣고 보며, 당신을 위대한 예언자로 숭배하였습니다. 당신이야말로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이민족의 압박에서 해방시키고 이스라엘 왕국을 이 지상에 이룩해 줄 구원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처참한 당신의 모습, 비극적인 당신의 말로를 보고 어찌 그들이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여, 진정 그들은 당신을 몰랐습니다. 그 부녀들, 그리고 우리의 죄가 당신께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했음을 그들이 알 리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오히려 당신들과 당신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하셨습니다.

  주여, 어느새 저 부인들 틈에 끼어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지금 내가 그들과 하나 되어 우는 것도 한 인간의 존경조차 받지 못한 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치욕을 당하는 당신을 뵙는 까닭입니다. 당신께 걸었던 모든 희망이 무너짐을 보는 까닭입니다.

  나는 지금껏 남과 사회와 세상만을 탓하고 원망하였습니다. 남들의 죄, 사회와 정치의 부패가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드는 것같이 비난하였습니다. 나 자신이 죄인이며, 내 과오와 비정이 남을 괴롭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 수난의 원인이 되고, 그 죽음의 고초를 더욱 재촉한 것이 나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주여, 이제는 나로 하여금 당신 수난의 원인이 된 내 죄를 먼저 울게 하소서. 보게 하소서. 죄에 물든 스스로의 모습을 진실히 보게 하소서.

 

 

9. 예수, 세 번째 넘어지다.

 

  연거푸 두 번이나 넘어졌던 예수님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몇 걸음도 못 가서 다시 세 번째 쓰러졌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기실 인간의 힘으로 어찌 더 이상 지탱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사력을 다하여 다시 일어선다. 피와 진땀과 먼지에 뒤범벅이 된 그 얼굴! 숫제 그는 눈을 감고 내려치는 채찍을 따라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주여, 왜 다시 일어섰습니까? 굳이 일어서야만 하겠습니까? 그대로 숨지는 것이 당신에게는 차라리 해방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상의 죽음, 당신 살과 뼈를 꿰뚫고 부수는 참혹한 죽음만이 당신을 기다리는 줄 모르십니까? 하거늘 주여, 왜 다시 일어셨습니까?

  아! 어리석으신 주여!

  그러나 주님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이 땅 위 어느 한 구석,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그리스도는 기진하여 거듭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그의 고난의 길을 계속 걸어야 했던 것이다. 깊은 밤, 만상이 잠든 적막한 거리를 그는 홀로 깨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터덕터덕 걸어간다. 이 불행한 인생 모두를 구원하고 싶은 가슴 터지는 사랑의 고뇌에 잠겨….

  주여, 사랑에 미친 이여! 사랑에 눈 먼 이여! 신앙과 의지에 약한 나로 하여금 이 사랑에 불타게 하소서. 기진하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 사랑의 힘을 주소서. 그리하여 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밤이건 낮이건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땅 끝까지 나의 나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르게 하소서!

 

 

10. 악당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하다.

 

  여기 주님은 알몸으로 뭇 인간이 퍼붓는 조소와 멸시의 눈초리에 둘러싸인 채 홀로 서 있다. 아무런 항변도 저항도 없이….

  이보다 더 큰 모독이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능욕이 있겠는가?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신 주여, 이제 당신께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뿐입니다. 당신의 살과 뼈를 꿰뚫을 십자가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것을 묵묵히 감내하며, 그 이상의 것을 원치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을 닮이 모든 것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소서. 알몸의 가난도, 그 때문에 받는 세상의 멸시와 천대도 다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러나 주여, 당신께 향한 나의 길을 막고, 내 눈을 가리우는 것은 명예나 지위와 재물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것이 이 육신입니다. 온갖 욕정에 사로잡힌 나약한 인간성입니다. 몸에 걸친 옷처럼 쉽게 벗어 치울 수도 없는 이 ‘묵은 인간’입니다. 주여, 어떻게 하면 이 ‘묵은 인간’을 벗고 당신을, ‘새 인간’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나로 하여금 일체를 잃은 영점(零點)의 상태가 은총임을 깨닫게 하소서. 내게도 오직 필요한 것은 ‘나’를 못 박는 십자가뿐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스도여, 나에게 청빈을, 자아(自我)마저 벗은 무아(無我)의 청빈을 가르쳐 주소서. 또한 당신과 같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못 박힌 북한의 침묵의 교회를 기억하소서.

 

 

11.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다.

 

  여기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인간이 하느님 안에 하나로 못 박혔다. 그 죄목은 사랑, 남을 위해 온전히 당신을 바치시는 그 사랑!

  주여, 이제 당신은 사지를 뻗고, 아득한 하늘을 우러러 십자가 위에 누웠습니다. 당신 소원의 십자가! 성부께서 마련하시고 그의 뜻이 이루어질 이 제단 위에 순결한 어린 양이 되어 누웠습니다. 마지막 남은 목숨,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세상을 위해 흘리기 위해서입니다.

  형리들은 무자비하게 당신을 못 박습니다.

  ‘쾅! 쾅!’ 지옥의 심연까지 울려 퍼질 저 둔탁한 망치소리, 쇠못은 경련을 일으키는 당신의 손발을 꿰뚫었습니다. 선혈이 샘솟듯 흘러내립니다. 우리 죄를 씻고, 온 땅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피가 흘러내립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여, 당신의 이 지극한 고통의 원인이 된 나를 용서하소서. 당신과 함께 못 박히게 하여 주소서. 주께서 나를 위해 먼저 고통을 받으셨으니, 나 어찌 주를 위해 내 고통을 바칠 수 없겠습니까? 매일 매시간, 매순간에 나의 십자가에 나를 온전히 못박히게 하소서.

 

 

12. 예수, 십자가에 죽다.

 

  주여, 이제 당신은 허공에 드높이 매달렸습니다. 사지를 찢어내는 죽음의 고통이 서서히, 그러나 정확히 당신 심장으로 몰려듭니다.

  그런데 주여, 이 극한상황에서까지 당신은 어쩌면 당신을 못 박고 희롱하는 원수들까지 사랑하실 수 있습니까?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카23,24)어찌하여 ‘이(齒)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불칼을 내려치게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 고난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제자 요한이 슬피 울며 서 있습니다. 그들을 위로해 주신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이 두 사람의 사랑과 위로마저 끊으셨습니다. 진정 아무도 지금 당신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당신 아닌, 어느 누구도 지극히 의로우신 성부 대전에 우리를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27,46)

  주여, 성부마저 당신을 버리셨습니까? 아담에서 비롯하여 세말(世末)에 이르는 모든 인간의 죄악과 저주를 지고, 그 보속의 죽음 앞에 당신은 홀로 외로이 서 있어야 합니까? 순간이 억겁으로 통하는 이 임종의 고통 가운데, 주여, 당신은 세 시간, 아니 이 세상이 마치는 날까지 그렇게 버려져 있어야 합니까? 그러나 주여, 당신의 사랑이 모든 것을 참아 가십니다. 성부께 대한 사랑과, 우리를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구하시려는 그 사랑이 당신 심장의 숨결까지 불태워 갑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19,30)

  아! 하늘이 찢어지는 이 외마디 부르짖음!

  마쳤다. 모든 것은 끝났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주여, 당신은 이기셨습니다. 죄악과 죽음을 쳐 이기셨습니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승리…. 새 새명, 새 인류, 새 역사가 여기 당신의 죽음에서부터 탄생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여,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며 당신을 위해 죽게 하소서. 온 세상을 위해 죽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 나와 나의 형제들이 영원히 살게 하소서.

 

 

13. 제자들이 예수의 성시(聖屍)를 십자가에서 내리다.

 

  핏빛 노을이 서산마루에 타고, 십자가의 그늘이 길게 언덕 아래로 뻗쳤다. 형리 하나가 이미 숨진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요한19,34) 이제 남은 일은 그를 안장하는 것뿐이다. 성모님이 아드님의 시체를 품에 받아 안았다. 어머니는 만신창이가 되어 숨진 외아들을 다시는 놓지 않을 듯 꼭 감싸 안았다. 나자렛 시절의 그 씩씩하고 명랑하던 소년 예수, 언제나 젊은 생명이 넘쳐흐르던 청년 예수, 이젠 불러도 불러도 답할 리 없는 차디찬 시체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단장(斷腸)의 오열 속에서도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고백했던 그 첫날의 신앙과 기도로 모든 고통을 다 감내했다.

  이 가련한 모자(母子) 주위에 요한, 마리아 막달레나, 요셉 아리마태아와 그 외 몇 사람의 제자들이 흐느껴 울며 둘러 서 있다. 그러나 숨진 예수의 모습에는 티끌만한 어두운 그늘도 볼 수 없다. 어머니 품안에 고이 잠든 어린 아기와 같이 밝고 평화스럽다.

  고요히 숨진 얼굴을 보라! 이 평화로이 감은 눈은 우리에게 세상의 어떤 철학도 사상도 밝힐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의미를 말해 주고 있다. 하느님의 끝없는 자비를 보여주는 이 맑은 얼굴, 그것은 바로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의 결정(結晶)이다.

  주여, 이제 편히 쉬소서. 어머니 품속에 고이 잠드소서. 당신 일은 끝났습니다. 성부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에는 보람이 있고, 비록 나날의 삶이 가난과 병고, 슬픔과 서러움에 가득 차 있을지라도 당신이 우리의 위로와 희망입니다. 성모여, 이 밤에 나로 하여금 주의 평화 안에 잠들게 하소서. 내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간 나의 임종의 날, 주와 함께 깊은 평화 안에 쉬게 하소서. 이제와 죽을 때에 이 죄인을 위하여 빌으시고, 내 영혼을 당신 품에 받아 안아 주소서.

  어두움이 죽음의 계속에 서서히 덮일 무렵, 예수님의 시체는 요셉 아리마태아가 마련한 새 무덤에 안장되었다. 큰 바위를 굴려 무덤 문을 막았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실신한 듯 앉아 있다.(마태27,57-61 참조).

  이제 일은 끝났다. 성모님과 몇몇 가까운 친지들이 아직도 영영 돌아설 길 없는 미련에 주저앉아 있을 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갔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사건은 이로써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과연 유대인들에게 피소(被訴)되어 빌라도의 사형 언도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수난사는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묻히셨던 그 무덤의 자리가 바로 부활의 자리임을 상기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오늘 이 시간,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여, 모든 십자가의 길 끝에 영생의 부활이 온다는 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복된 사실이오니, 나로 하여금 이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소서. 모든 고통도 축복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죽음이 곧 당신을 믿고 바라는 이에게는 새 생명의 씨앗 됨을 깨닫게 하소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주여, 당신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나이다. 우리의 소망이시요 사랑이시나이다. 이제 내 안에는 오직 당신만이 살게 하소서.

   

                  김수환 추기경님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