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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채널 e- 칼레의 여섯 명의 시민 -

김레지나 2011. 2. 6. 19:39

 

 

 

 

 

 

 

 

 

 

 Auguste Rodin (French, 1840–1917) - The Burghers of Calais 1889
 Bronze , 217 x 255 x 177 cm

Musee Rodin , Paris

 

 

 

 Saint Pierre

 

 

  

 Jean De Fiennes

 

  

 Jean d'Aire

 

  

 

 Jacques de Wissant

 

 

  

 Andrieu d'Andres

 

  

 

 Pierre de Wissant.

 

 

 

 [ 칼레 시민 이야기]

 

 

칼레시민들은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1개월 동안 잘 버티었다.

그러나 마침내 성안의 식량과물자가 소진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칼레 시민들은 마침내 항복하기로 하고 영국왕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칼레 군의 사자가 백기를 들고 영국 왕 앞에 나아가

시민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1년여의 피곤한 공격에 화가 단단히 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몰살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저항을 계속하는 시에 굴욕적인 항복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칼레시의 존경받는 시민대표 여섯 명이

모자와 신발을 벗고,겉옷만 걸친 채 몸을 밧줄로 서로 묶어

영국 왕에게로가서 도시 성벽의 열쇠를 바치고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는 최후통첩이었다.

 

항복 조건을 들은 칼레 시민중에서

가장 부유하기로 소문 난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일어나 말했다.

  

"여러분, 이런 비극적인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마당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서 굶어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먼저 이 한 목숨을 바쳐 영국왕께 용서와 자비를 구하겠습니다.

기꺼이 홑옷과 맨발에 맨머리로 목에 밧줄을 두르고 나가 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그러자 또 다른 부유하고 존경받는 시민인 장 데르가 일어서서 동참하고

세번째는 자크 드 비쌍이라는 사업가도 동참하였다.

그 역시 상속받은 재산뿐 아니라 사업으로 벌어들인 재산이 상당한 자였다.

 

그 옆에 있던 사촌 피에르 드 비쌍도 선뜻 따라 나섰고,

다른 두 사람,즉, 장 드 핀네와 앙드리외 당드르도 용감 하게 목숨을 내어 놓겠다고 나섰다.

 다른 시민들을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칠 것을 자원하였다.

 결국 여섯명이면 되는데 일곱명이 지원한 것이었다.

 

어떻게 한명을 제외시킬 것인가를 의논한 결과 먼저 제비뽑기로 의견을 내었으나,

제비뽑기를 하게 되면 마음속으로 혹시 내가 제외되어 살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내일 아침 제일 늦게 오는 한 사람을 제외시키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6명의 사람들이 먼저 약속한 장소에 나왔다.

마지막 한 사람이 아직 안 나왔다. 그는 처음에 자원한 생 피에르였다.

6명의 사람들은 생피에르에게 당신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생피에르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생피에르는 자기집에서 이미 자살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6명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 였다.

이것을 본 6명의 사람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영국왕에게 나갔다.

 

 

이 들이 목에 밧줄을 건 채 에드워드 3세의 진영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 왕비는 그 영웅적 태도에 감명을 받았는데, 마침 왕비가 임신 중이었으므로

남편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청원하자 영국왕은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취소하고,

칼레 시의 봉쇄도 풀고 철수 했다고 한다.

  

로댕은 칼레시의 주문으로 영국군 진영으로 가는 6명을 조각하였다.

주문자 칼레시는 6명을 죽음을 초월한 영웅으로 표현하길 원했으나,

로댕은 고뇌에 가득 찬 사람들의 행진,

우울하고,심지어는 죽음의 공포에 떠는 묘사도 하여,

비극적이고 장엄한 우울한 행진으로 표현하였다.

  그들의 제스쳐는 영웅적이 아니고

인간적이기 때문에 작품의 진실함으로 더 감동적이다

 

        

 

[노블레스명예  오블리제의무]

 

 

귀족계급의 도덕적의무 책임감을 뜻하는 프랑스어(Noblesse Oblige)이다.

, "지위가 높으면 덕도 높아야된다 ; 명성, 신분에 걸맞게 처신해야된다"

프랑스속담에서 유래되었다.

 

사회 지도층의 책임의식 즉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대를 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일반계층은 그들의 지도를 따르지 않게 되고

사회는 더이상 효과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도층은 또한 상류층이므로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받는 계층이다.

따라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혜택에 수반되는 의무이자 필연적 비용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필요성 ]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미덕은 중세와 근대 사회 에서도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의 표본으로 간주됐다.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면 대중들은 본능적으로 움츠리며 소극적 자세를 취한다.

이를 "방어적 퇴각"(Defensive Retreat)이라고 한다.

 

이에 지도층이 모범을 보이므로 해서, 대중을 이끌어야 사회는 혼란을

극복하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치인, 고위관료, 부유층 등 사회 지도층의 부패와 의무 불이행을 .

병역비리, 불법 정치자금, 변칙 상속과 증여, 탈세 등

사회 지도층의 극심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있다

 

지금의 어려운 사회 현실에서는

어느 때보다 높은 지도자의 도덕성이 필요할 것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대한 지도층의 입장 ]

 

상층 집단이 이런 의무와 덕목을 갖춰 왔던 것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서구 상층은 과거 중세 귀족 신분으로  누려 왔던 특권들이 부분적으로 약화됐더라도

여전히 경제적 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상위 1% 집단이 전체 부의 30% 정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상층의 상층'이라 할 수 있는 1% 집단이 현대판  노블레스를 이루고 있다.

 

이 상층 집단은 단순히 경제적 부만이 아니라

교육과 연줄망에서 일반 국민과 뚜렷한 차별성을 갖는다.

어느 나라이건 상층 집단은 유명 사립고교와 명문 대학에서 교육받아

강력한 연줄망을 형성해 왔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 집단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통혼 전략을 통해

그 연줄망을 강화해 왔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위세를 독점하는 만큼

이들은 이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노블레스 오블리제란 상층 집단의 바람직한 태도이자 전략이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윤리적 덕목과 부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해 왔으며,

이것이 다름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을 이뤄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상층 집단의 보수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 노블레스 오블리제 - 고대로마제국]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초기 로마의 왕과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초기 로마공화정의 귀족들은 솔선하여

명장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전쟁에

평민들보다 먼저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16년 간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13명의 집정관(Consul)이 전사하였다.

집정관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고위공직자로 귀족계급을 대표하며,

로마의 관리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당시 귀족들의 전시사망률은 평민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았다.

로마의 귀족들은 돈 뿐아니라 피를 흘리는데도 앞장섰던 것이다. 

 

따라서 평민들도 전쟁터에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데 주저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으며

이것이 로마군이 용맹함으로 유명한 이유이다.

 

이런 로마에 대해 돈주고 산 용병따위로 대항한 카르타고는

아무리 한니발같은 명장이 있었어도 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포에니 전쟁 때에는 전쟁세를 신설,

재산이 많은 원로원들이 더 많은 세금 부담을 감수했다.

그들은 제일 먼저 기부를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수레에 돈을 싣고 국고에 갖다 바쳤다.

 

이것을 본 평민들도 앞다퉈 세금을 내게 됐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전시국채를 발행,

유산계급과 원로원 의원 및 정부요직에 있는 사람들만 구입토록 했다.

평민들에겐 전비 부담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들여 공공시설을 신축하거나 개보수한 귀족에 대해서

"아무개 건물" "아무개가 이 도로를 보수하다" 이런 식으로 귀족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귀족들은 이를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법을 제안한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법의 이름을 만들었다.

 

이렇듯 로마의 귀족들은 사회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실천했으며,

나라에서도 장려책을 사용해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었다.

 

  

[ 한국사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

 

우리가 가졌던 정의롭고, 올곧은 선비 정신은 어쩌면 외래어로 포장된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당나라의 군사지원에서 많이 찾지만,

그보다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있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서기 660년 김유신의 동생 흠춘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에게 수세에 몰리자

아들 반굴에세 “지금이 충과 효를 이룰 수 있는 기회”라면서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반굴의 장렬한 전사를 본 장수 품일은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도 같은 행위를

요구했고, 두 장수 아들의 전사는 신라 군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나당전쟁 때

석문전투에서 패전한 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부모님에게 버림받았다.

 

고려의 승군도 노블레스 오블리제 전통의 산물이다.

문종의 왕자 의천이 승려가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불교국가 고려에서는 승려는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현종 1년(1010년)거란이 침략하자

승장 법언이 9000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싸우는 등

승군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던졌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양반과 유생들이 주도하던 의병이 일어난 데서 볼 수 있듯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지배층에서 살아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양반계층에서는

붕당(지금의 여당,야당 개념)이라는 상호견제를 통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위대한 민족적 업적을 남긴 것도 일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붕괴된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국력이 약해지고 부정부패가 창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전/이후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서 수 많은 독립전쟁이 있었다

물른 여기에서도 양반계층을 참여가 있었다

 

일제강점이후 수 많은 독립운동에 사회지도자들의 참여가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조성된 냉전과 이승만의 집권은

친일파들을 다시 득세하게 만들었다.

독립 운동가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에게 다시 억압받았다.

친일파 출신의 사회 주류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먼 일이었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