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명예 오블리제의무]
귀족계급의 도덕적의무 책임감을 뜻하는 프랑스어(Noblesse Oblige)이다.
, "지위가 높으면 덕도 높아야된다 ; 명성, 신분에 걸맞게 처신해야된다"
는 프랑스속담에서 유래되었다.
사회 지도층의 책임의식 즉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대를 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일반계층은 그들의 지도를 따르지 않게 되고
사회는 더이상 효과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도층은 또한 상류층이므로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받는 계층이다.
따라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혜택에 수반되는 의무이자 필연적 비용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필요성 ]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미덕은 중세와 근대 사회 에서도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의 표본으로 간주됐다.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면 대중들은 본능적으로 움츠리며 소극적 자세를 취한다.
이를 "방어적 퇴각"(Defensive Retreat)이라고 한다.
이에 지도층이 모범을 보이므로 해서, 대중을 이끌어야 사회는 혼란을
극복하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치인, 고위관료, 부유층 등 사회 지도층의 부패와 의무 불이행을 .
병역비리, 불법 정치자금, 변칙 상속과 증여, 탈세 등
사회 지도층의 극심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있다
지금의 어려운 사회 현실에서는
어느 때보다 높은 지도자의 도덕성이 필요할 것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대한 지도층의 입장 ]
상층 집단이 이런 의무와 덕목을 갖춰 왔던 것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서구 상층은 과거 중세 귀족 신분으로 누려 왔던 특권들이 부분적으로 약화됐더라도
여전히 경제적 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상위 1% 집단이 전체 부의 30% 정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상층의 상층'이라 할 수 있는 1% 집단이 현대판 노블레스를 이루고 있다.
이 상층 집단은 단순히 경제적 부만이 아니라
교육과 연줄망에서 일반 국민과 뚜렷한 차별성을 갖는다.
어느 나라이건 상층 집단은 유명 사립고교와 명문 대학에서 교육받아
강력한 연줄망을 형성해 왔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 집단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통혼 전략을 통해
그 연줄망을 강화해 왔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위세를 독점하는 만큼
이들은 이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노블레스 오블리제란 상층 집단의 바람직한 태도이자 전략이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윤리적 덕목과 부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해 왔으며,
이것이 다름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을 이뤄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상층 집단의 보수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 노블레스 오블리제 - 고대로마제국]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초기 로마의 왕과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초기 로마공화정의 귀족들은 솔선하여
명장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전쟁에
평민들보다 먼저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16년 간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13명의 집정관(Consul)이 전사하였다.
집정관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고위공직자로 귀족계급을 대표하며,
로마의 관리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당시 귀족들의 전시사망률은 평민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았다.
로마의 귀족들은 돈 뿐아니라 피를 흘리는데도 앞장섰던 것이다.
따라서 평민들도 전쟁터에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데 주저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으며
이것이 로마군이 용맹함으로 유명한 이유이다.
이런 로마에 대해 돈주고 산 용병따위로 대항한 카르타고는
아무리 한니발같은 명장이 있었어도 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포에니 전쟁 때에는 전쟁세를 신설,
재산이 많은 원로원들이 더 많은 세금 부담을 감수했다.
그들은 제일 먼저 기부를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수레에 돈을 싣고 국고에 갖다 바쳤다.
이것을 본 평민들도 앞다퉈 세금을 내게 됐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전시국채를 발행,
유산계급과 원로원 의원 및 정부요직에 있는 사람들만 구입토록 했다.
평민들에겐 전비 부담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들여 공공시설을 신축하거나 개보수한 귀족에 대해서
"아무개 건물" "아무개가 이 도로를 보수하다" 이런 식으로 귀족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귀족들은 이를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법을 제안한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법의 이름을 만들었다.
이렇듯 로마의 귀족들은 사회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실천했으며,
나라에서도 장려책을 사용해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었다.
[ 한국사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
우리가 가졌던 정의롭고, 올곧은 선비 정신은 어쩌면 외래어로 포장된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당나라의 군사지원에서 많이 찾지만,
그보다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있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서기 660년 김유신의 동생 흠춘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에게 수세에 몰리자
아들 반굴에세 “지금이 충과 효를 이룰 수 있는 기회”라면서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반굴의 장렬한 전사를 본 장수 품일은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도 같은 행위를
요구했고, 두 장수 아들의 전사는 신라 군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나당전쟁 때
석문전투에서 패전한 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부모님에게 버림받았다.
고려의 승군도 노블레스 오블리제 전통의 산물이다.
문종의 왕자 의천이 승려가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불교국가 고려에서는 승려는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현종 1년(1010년)거란이 침략하자
승장 법언이 9000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싸우는 등
승군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던졌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양반과 유생들이 주도하던 의병이 일어난 데서 볼 수 있듯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지배층에서 살아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양반계층에서는
붕당(지금의 여당,야당 개념)이라는 상호견제를 통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위대한 민족적 업적을 남긴 것도 일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붕괴된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국력이 약해지고 부정부패가 창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전/이후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서 수 많은 독립전쟁이 있었다
물른 여기에서도 양반계층을 참여가 있었다
일제강점이후 수 많은 독립운동에 사회지도자들의 참여가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조성된 냉전과 이승만의 집권은
친일파들을 다시 득세하게 만들었다.
독립 운동가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에게 다시 억압받았다.
친일파 출신의 사회 주류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먼 일이었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