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사실 복음을 보면 예수님 때문에 많은 논란과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복음 전체는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그럼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이들, 예수님한테 불림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불림을 받았지만 많은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간 부자 청년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병에서 치유된 반벙어리, 귀머거리, 소경, 앉은뱅이, 중풍병자들과 나병환자 등이 있는가 하면 , 병을 고쳐주러 가셨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나자렛의 고향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함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여전히 어둠 속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에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투덜거리며 떠나간 사람들이 있고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라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있었다.
삼십 팔 년 동안 누워있던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증언한 반면 오히려 그런 일을 하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셨다고 그분을 박해하는 유다인들이 있었다.
매일 정오 때만 되면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가야만했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는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오지 않아도 된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가 하면 오늘도 마시고 마셔도 또 목마르고 그래서 우물가에 또다시 물을 길으러 가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예수님의 영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여전히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오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오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가 있고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들 가운데에는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자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님으로 알아보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한 제자들도 있지만 그 중에는 스승을 배반한 제자도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은 제자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토마도 있었다.
예수님 편에서는 이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미움과 고난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 때문에 출세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서로 갈랐고 논란이 일어났었다.
성 바오로 수도회를 창립하신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님은 "그대는 인류가 어디를 향하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고,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쇄신되는 과정을 통해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막중한 문제를 몇 번이나 자문해 보았는가? 인류는 영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대한 강과도 같다. 과연 인류는 구원받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소멸되고 말 것인가?"라고 자문하셨고 또 우리들도 그런 자문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늘 날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느 정도까지 복음과 일치되고 있는가?
이 같은 생활이 오늘날 세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활화되고 있는가?
그것이 어떤 점에서 부족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의가 얼마나 전파되었는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진실로 기도 드리는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이자 그분의 상속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의 열매인 생명과 은총의 열매들을 맺어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실제적으로 보다 훌륭하게 적용하고 있는가? 실제 행동 속에서 대면하는 어려움과 개선점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우리 자신도 예수님 때문에 서로 갈라진다. 가족이 갈라지고 나라가 갈라졌다. 왜 그럴까?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알기는 알지만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인 진리이신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골베 성인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 하나될 수 있을 것이다.
===========================================================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윤경재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저분은 메시아시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40-53)
성전에서 드러나게 소리쳐 외치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한 마디씩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모세가 예언했던 그 예언자로 받아들이기도 했고, 메시아로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예수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고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어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소화시키기엔 불편한 음식을 삼켜 목구멍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심중을 감추고자 출신성분으로 핑계를 대며 예수를 무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무엇인가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나 놀라운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에게서 자신들의 내면을 휘젓는 위력을 느꼈습니다. 체포 명령을 받은 성전 경비병들조차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수석 사제와 바리사이들은 더 심각했습니다. 예수의 칼끝이 자기들을 겨누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리쳐 외치는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찌 들으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5,19)라는 말씀을 들으면 아닌 것도 같고 헷갈렸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모습과 선언이 자신들의 무의식 세계를 비추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왠지 거북살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한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예수를 통해 감추고 싶었던 치부가 드러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 치부를 더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예수를 무시하고 없애고 싶었습니다. 자기를 무화(無化)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태껏 공들여 쌓고 누려오던 혜택의 단물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두 감정이 지금 부닥치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두려움이 만나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20)라고 하시며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과 무엇인가 잃을까 두려움에 떨면서 꽁꽁 숨으려 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두려움의 본능이 사랑의 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의 힘을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지고 싶지 않은 그 본능을 살짝 바꾸어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군중이 율법을 모른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행동이 율법에 더 어긋나는 것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침착하고 현명한 니코데모가 제대로 된 율법 조항을 대니 이제는 예의 그 출신성분을 핑계거리로 들이대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어서 죄에 빠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하나를 선택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선택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묵상해보는 오늘입니다.
=========================================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유광수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유광수신부님 (0) | 2010.09.26 |
---|---|
부자는 우리, 라자로는 예수님? - 유광수 신부님 - 해석 독특하네요.^^* (0) | 2010.09.26 |
달란트의 비유 - 사랑의 실천 - 유광수신부님 (0) | 2010.08.28 |
포도밭으로 가시오 - 유광수 신부님 (0) | 2010.08.18 |
☆기쁨의 인사 - 마리아와 엘리사벳 - 루카복음은 기쁨 - 유광수신부님 (0) | 2010.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