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Fun Fun 교리

[교황청 가톨릭교회 교리서 해설〕원죄: 어째서 ‘원’(原) ‘죄’(罪)인가?

김레지나 2015. 5. 25. 12:34

  나는 악의 근원을 탐구했다. 그러나 출구가 없었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다. 악은 어디로부터 와서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사이 즉 남자와 여자, 세대와 세대, 민족과 민족 사이에 끼어들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아우구스티노는 그분만이 홀로 악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그 답을 얻었다. 그 후 그는 ‘예수’라는 이름,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말한다는 확신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만일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오셨고 그리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모두, 어린이들조차도 그러하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마르 10,14). 그들 역시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께서는 구원하신다”이기를 그리고 그들의 ‘구세주’이기를 원하신다. ‘원죄’(原罪)란 우선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원죄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다”라는 복음 말씀의 ‘다른 측면’이다.

  원죄는 신앙의 신비(神秘)이다. 우리는 오직 계시(啓示)를 통해서만 그것을 알뿐이다. 이성(理性)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악의 수수께끼에 대한 하나의 합리적인 대답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의 진리가 원죄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자세히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원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두루 퍼져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즉 인류역사의 시초에 원조들이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 결과 「성서」말씀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신뢰를 잃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도망을 친다. 내적인 분열, 상호간의 고발 그리고 지배와 욕망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짓는다. 그 결과 죽음이 인류의 역사 속에 들어왔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내용들을 우리는 현실로 매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원’(原) ‘죄’(罪)인가? 어째서 어린이가 원죄의 흠을 갖고 세상에 태어나고 그 때문에 그는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원죄는 하와로부터 난 자손의 개인적인 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오직 성모 마리아만이 그 예외다.)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원조가 그들의 개인적인 죄로 잃어버린 유산처럼 말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갖는 원초적인 신뢰와 그로부터 오는 조화라는 선물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잃어버렸던 아들의 후손들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恩寵)의 옷을 입혀 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또 다시 구원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루카 15,11-32)

  ‘원죄’란 또한 우리가 세례의 은총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은총의 도움을 받으면서 평생동안 악의 경향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이 우리 원조의 유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싸운다면, 그것은 승리할 수 있는 ‘훌륭한 싸움’(2티모 4,7)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