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신부님들 말씀

불뱀이 곧 구리뱀이다

김레지나 2014. 6. 6. 07:46

 연중 제24주일 (2003-09-14)

독서 : 요한 3,13-17 독서 : 필립 2,6-11 복음 : 민수 21,4ㄴ-9


불뱀이 곧 구리뱀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3-17)
우리의 신앙생활은 은연중에 고통과 불행을 멀리하고 복을 바라는 ‘축액기복’의 경향을 띠고 있다. 나의 삶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이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삶의 위기나 혼돈은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안 될 걸림돌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바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너무나 빈번하게 혼돈의 시간들을 우리에게 떠안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실패나 좌절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우리 삶은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쁜 때가 있고, 성장할 때가 있으면 퇴보할 때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두 차원 중에서 좋은 쪽은 삶의 영광이고 나쁜 쪽은 십자가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영광만을 차지하고 싶고 십자가는 멀리하고 싶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새 노예살이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출애굽의 영광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잠시 돌아가는 길을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잠시 찾아온 실패와 좌절의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패와 좌절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 현실은 불뱀으로 변해 사람들을 물어 죽인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까 불뱀은 구리뱀으로 변해 그들을 치료해 준다.
우리도 가끔 내 삶에서 오는 실패와 좌절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현실이라는 불뱀에 깨물릴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서도 의미를 찾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불뱀은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를 가진 구리뱀으로 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불뱀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안에 구리뱀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김기환 신부(가톨릭 상지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