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ystery of Our Life - Marino Restrepo
성령께서 저를 밝혀주시길 청하며 오늘의 묵상을 나누겠습니다. 저는 미리 강연준비를 하지 않지만 분명히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실 말씀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 안에서 커다란 신비가 일어나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매우 큰 무엇의 일부가 되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구약을 통해 본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고 주님께서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지식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와서 큰 책과 같은 것을 가져다 먹게 하는, 생각을 초월하는 비젼에 대해 말하지요. 그와 같은 신비가 성체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빵을 먹이시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빵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예언자이고, 제사장이며, 우리 각자가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신비를 살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다는 신비를 알고 있지만 이성적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도 없습니다. 실제로 처음에 예수님께서 그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하고 떠나 갔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체를 아무렇게나 대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너무 늦게 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자신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매우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성체가 무엇이고, 어떤 목적이며, 핵심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알고 몹씨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르고 행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셨던 것과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물으실 것입니다. 대죄에는 세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것도 하느님의 법입니다. 같은 죄가 어떤 사람은 죄인지 모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알고도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 지도 책임 져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인식을 해야하고, 그 책임을 져야합니다. 가톨릭 신자가 성체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하늘이 크게 슬퍼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물질화 되고 하느님에 대해 무관심하고 멀어져 있음으로써 하느님과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신앙의 모든 신비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매일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심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고, 묵주기도를 이십단씩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순례여행을 하고, 많은 영성서적을 읽고, 기도회를 참석하고, 하느님을 알고, 느끼고, 하느님 체험을 하며 혼자서 자기만족에 빠져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천국으로 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끌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온갖 종교적인 체험으로 만족감을 얻지만 자신의 종교생활이 주위의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리사이파와 같을 뿐입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아주 종교적이었지만 그들의 표본을 보고 아무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증언에 누구도 감동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길을 잃게 했을 뿐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 시급하다고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우리의 의무와 사명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 신앙의 신비를 더욱 깊게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요즘의 교회 안에는 멋진 설교도 많고, 큰 행사들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며 큰 일들을 치룹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거의 변화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알아야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만을 찾아 다님으로써 종교가 일종의 편이시설과 같이 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만 위해 치유를 찾아 다니고, 구마를 찾습니다. 세상의 회개나 평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데려다 주는 것,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종교가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지워진 책임을 이해해야합니다. 우리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할 책임이 지워졌습니다. 누가 참된 신자인지가 아니라, 내가 참된 신자인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자기가 지켜보았던 사람이나 판단한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톰이나 루시아에 대해 물어 보지 않으시고 “나는 너에게 책임을 주었는데 어떻게 하였느냐? 무엇을 하였는지 보여달라”고 하실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 누군가에 대하여 불평을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네 무릎을 꿇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는 정말 끔찍한 인간이다. 못된 인간이다. 그래 그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지.’ 라고 절대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 누구에 대해서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조금 밖에 하지 못했는지를 자신에게 불평해야합니다. 조금 밖에 하지 못한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수 있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요일 미사에만 나가지만, 평일임에도 이곳에 모인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평일미사를 나올 수 있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일요일 미사에만 나오는 신자 이상의 단계에 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주셔서 좀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잔치의 어떤 부분을 받아들인 것이므로, 그 받은 만큼의 열매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잔치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을 더 원치 않거나,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각자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잔치가 영원한 것임을 깨닫고 잔치에 자주 온다는 것은,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한 응답을 했다는 것이며 그 만큼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그것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것을 가지고 자신이 커지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군사로서의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교회가 매우 약해졌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전쟁중인 군사들의 교회입니다. 아주 긴급하고 시간을 다투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사막으로 달려가는 교회입니다. 요한 묵시록 12장에서와 같이 순례의 교회로서 사막으로 달려가 하느님의 배 안에 영혼들을 계속 태우고 하느님의 안전한 항구를 향해 나아 가야합니다. 끊임없는 전쟁이지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시간이 다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할 할 일을 아주 재빠르게 해야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 안에서 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이 끝나면 회계장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자신이 한 일을 보여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간다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참된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의 신앙의 은총을 깨닫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가르침은 항상 준비하라는 것임을 알것입니다.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오늘 준비하여야합니다. 사실 준비되었다는 것은 정확히 맞지는 않습니다.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맞지요. 많은 사람들이 준비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는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실까요? 왜 빨리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바꾸시지 않나요? 빨리 오셔서 좀 바꿔주시면 좋곘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만일 하느님께 청할수 있다면 더 많은 영혼들이 구원 될 수 있도록 시간을 더 달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늘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저라면 ‘주님 시간을 더 주십시오. 더욱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오늘 세상을 멸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준비 되어 있지 않은데 마지막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 신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깊이 바라본다면 분명히 우리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알것입니다. 그러므로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오늘 밤에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데려가신다면 ‘네’ 라고 받아들여야지요. 우리의 삶의 주인은 그분이시고, 그분이 원하실 때 언제라도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정말로 더 많은 것이 변화되어야하고 많을 것을 보속할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어요.’ 라며 모든 준비가 된 척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누구도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위대한 성인도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 바오로는 ‘나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여러분과 더 머물러 더 많은 영혼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진심으로 자신의 영혼과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것만이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염려하므로 자신의 구원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좀 더 깊이 들어가 하느님을 좀 더 앎으로써 다른이들에게 하느님을 좀 더 나눌 수 있기 위한 것입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의 신비가 우리에게 스며들게 되면 하느님을 향해 더욱 깊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혼한 커플이 서로 사랑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아내나 남편 중 한 사람을 보아도 그 안에서 그 배우자를 보지요. 그 둘은 매우 가까워서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방도 나타냅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좋은 결혼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내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지혜, 굳셈, 온유와 사랑, 동정심을 드러내시며, 바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휼륭한 스승으로써 언제나 제자들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셨습니다. 잠자거나 게으른 삶을 살도록 두지 않으시고 항상 나아가 더 나누도록 재촉하셨습니다. 조심해라! 시험을 통과해야한다. 게으름과 미소한 자신의 인간적인 이유로 물러서지 말고 계속 더 나아가 나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눔이란 꼭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 더욱 거룩해지는 것, 그것이 최상의 나눔입니다. 내가 더욱 거룩해질수록 내 안에 더욱 하느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볼 수있게 되어 하느님에 대해 더욱 많이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나눔입니다. 거룩함이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삶에 하느님을 모셔와서 자신 안에서 하느님이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자신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성령은 단순히 독실한 종교인이나, 감정적인 신앙안에 머무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영입니다. 그 변화는 분명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변화된 사람은 모든 행동과 행위에서 그것이 나타납니다. 완전히 변화되어 몸짓이나 풍기는 것, 눈빛 조차도 바뀝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명의 빵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성혈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빵과 피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이 성체와 성혈을 더욱 많이 모실수록 더욱 변화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시고도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모시겠습니까? 생명을 주지 않는다면 왜 생명의 빵을 먹어야합니까? 자신이 먹고 있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먹고도 죽음을 삽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을 받아 먹고서도 나가서는 즉시 죽음의 일을 한다면 예수님이 슬퍼하십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하느님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의 삶을 통해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너무 어둡고 사악하며 희망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도 세상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이 사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매우 어둡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왕은 사탄이므로 이 세상은 밝아질 수 없을겁니다. 성 요한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탄의 손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 이 땅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지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을 말합니다. 물질세계의 영, 일시적인 삶의 영, 죽음의 영, 탐욕의 영, 야망, 그 안에 하느님이 없는 것, 그러한 영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영은 사탄의 영입니다. 자연의 영이라고도 부를수 있지요. 하느님의 창조물인 이 땅 자체는 좋은 것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 세상의 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영에 갇혀, 어두움의 혼돈 안으로 잠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일시적인 삶이 씨앗과 같은, 놀라운 기회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씨는 모두 땅에 심어졌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땅에 심어진 씨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죽지 않고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가 건강해지도록 돌보아야 헙니다. 어떤 씨는 건강하지 못해 꽃을 피우지 못하거나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씨에 영양을 주어야 하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엄청난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이 삶이라는 은총 안에 있는 육체를 가지고 그 씨에 영양을 주는 방법은 오직 참된 사랑,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성체를 모시고,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한 삶을 산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며,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대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찾는 방법입니다. 구원은 모든 인류에 대한 것입니다. 정글에 사는 원주민이나 그리스도인, 불교인, 힌두교인, 이슬람교인, 유대인, 무신론자 할 것없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해야만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인,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영양을 주기 위해서는 서로를 참되게 사랑해야합니다. 결코 사람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모든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구원되었더라도, 그것을 배우기 위해 오랫동안 연옥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곳에서 그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기회가 있습니다. 마음을 넓혀서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터치하십시오. 모르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입니다. 특히 우리를 좋아하지 않고, 사랑하지않고, 무시하고 대적하는 사람을 그렇게 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바로 재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셨지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오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라고 말하지요. 그러기에 유대인과 이슬람인 사이에는 결코 평화가 없습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는 모세율법에 근거하며 아직 구원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이슬람교인에게 어떤 않좋은 일을 헀다면 모세율법에 의해 복수당합니다. 유일한 방법인,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용서에 대해 배우지 않는 한, 메시아,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까지 서로 떨어지지 못하고 서로를 죽이는 복수가 결코 끝나지 않고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신비를 깨닫는다면, 구원이 모든 사람에 대한 것임을 이해하여야 할 큰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것입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의 삶이 사랑의 학교라는 삶의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지상은 삶의 시작입니다. 이 곳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여정이 이곳에서 시작하여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하느님과 함께 갈 때 그렇습니다. 그것을 올바로 깨달을 때, 죽음처럼 보이는 마지막에 우리가 변화되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죽는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것임을 이해할 때 영원한 삶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죽음의 운명, 일시적인 삶을 극복하게 되어 많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워 지는것입니다. 복음은 그것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복음의 초대는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나, 그 외 주님의 제자들이 서간으로 남겨놓은 복음은 결국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존재로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존재로서 믿음과 함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존재이므로 세상일로 급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달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시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복음이 어디로 간건가요? 그토록 죽음의 운명만을 가지고 사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수가 있나요? 주름살을 바라보며 남은 시간을 세고, 주름살을 발견할 때마다 겁을 먹는다면요. 죽지 않을 운명임을 깨닫으라는 것이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렇게 고백해야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가장 큰 은총을 주신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성령으로 도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죽음의 운명인 것 처럼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죽지 않는 것으로 도유하셨고, 영원한 삶이라는 초자연적인 은총을 주셨는데도 저는 단순한 일시적인 인간처럼 행동합니다. 너무도 두려움에 차있고, 이 일시적인 삶을 너무도 사랑하여서 죽음에 매여있고 지나가고 말 작은 일에 집착하며 나의 안전만을 구합니다. 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말 것들에 붙들려있습니다. 삶은 지나가고 있고 모든 것들이 죽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애착을 갖는 모든 것들은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여전히 그것에 매여있고, 죽음에 매여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을 흩어버리고 진리를 붙잡기 위해서는 그것들과 일대일로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죽지 않을 운명을 붙들고 생명을 붙들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의 등불, 빛의 기둥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고 자신 안에 빛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죽음의 운명으로서만 살아간다면 모든 일시적인 삶의 사건을 두려워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을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러한 존재가 된다면 모든 빛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의 희망이 될것입니다.
또한 비록 죽지 않을 운명일지라도 일시적인 삶으로 인해 여전히 깨지기 쉽고, 약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성바오로가 주님께 가시를 없애달라고 청할 때, 그 가시는 그를 고문하기 위해 사탄이 보낸 것으로, 하느님께서 그것을 없애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은총은 너에게 넉넉하다. 너의 약함 안에서 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성바오로는 이 육체를 일시적인 지상 천막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 지상 천막집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죽지 않을 놀라운 영혼이 그 안에 있었지만, 또한 그것이 아주 큰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약하고 깨지기 쉬운 육체 조각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성바오로와 같은 성령을 가지고서 이 약하디 약한 육체를 다루어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주님 고쳐주십시오. 주님, 제발 고쳐주십시오. 이 육체의 가시를 가져가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노, 노... 그대로 가지고 있어라. 그대로 비참하게 가지고 있어라.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지 못하는 완벽한 제자를 나는 원치 않는다. 겸손하게 그대로 가지고 있어라. ‘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함과 약함, 우리의 비참함을 어떻게 다룰지만 안다면, 그것은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문이 되는 우리의 비참함은 유익이 됩니다. 그 고문이 치유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요즘 가장 인기있는 크리스챤들의 설교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길 원하다. 치유되길 원한다. 풍족하길 원하다. 삶에서 하는 모든 일에 성공하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가장 좋은 삶을 주기 위해 너희를 구하러 왔다. ‘ 알렐루야!”. 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들으려고 큰 스태디움을 꽉 채웁니다. 그러나 복음의 초대는 매우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일시적인 삶은 지나가는것, 애착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 삶이 완벽해 질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고통이 기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련과 고난이 좋은 시험임을 알아야합니다. 성 야고보는 사랑으로 시련을 인내하는 사람은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시험을 지나도록 하십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 우리의 올바른 모양을 만드십니다. 우리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모양을 만들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찾아다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왔을 때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고통을 피하는 것들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기에 쉽게 이혼하고, 때로 부모자식 간에도 등을 돌립니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보다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유익만을 찾고 편안함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만 찾지요. 그러나 고통과 시련이 커다란 치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가끔 과보호 되어 살아온 사람이 버릇이 잘못 들여져 매우 약하고 삶에서 작은 위기가 올 때마다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방법도 모르고, 방어 할 줄도 모르고, 영적 면역성도 없어서 모든 종류의 힘이 바닥이 납니다. 지나치게 과보호를 받아서 시련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품 안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아주 큰 영적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영적 싸움이 무엇인지, 어떻게 싸워야할 지 조차 모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주님께서 백인대장을 통해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도 이러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고 말씀하시지요. 이방인인 로마 백인대장이 유대인 보다도 더 큰 믿음을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치유시켜 주시고, 그를 매우 휼륭한 사람으로 제시하시며, 그의 믿음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이 귀절에서 주는 가르침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행적은 오직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즉 구원은 모든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이지 못하고 단지 종교적일 뿐일 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들은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가장 큰 위험은 죄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위험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에 의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종교를 통해 주어진 책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큰 어려움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하느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종교 안에 있는 하느님의 군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큰 어려움을 맞을 것입니다.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책임을 갖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책임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에서 한 일들과 행위에 대해 심판을 빋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 위헤 종교가 더해집니다. 힌두교인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하느님께서는 힌두교에 대해 묻지 않으십니다. 힌두교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그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힌두교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한 일을 보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외의 종교도 무엇을 믿었건 종교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에 대해 무엇을 했는지 물으실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종교가 무엇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우리 신자들이 점점 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성체를 모실 때 보면 그렇습니다. 저는 아주 끔찍한 고통을 느낍니다. 믿음도 없고 성체 안에 실제로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에 대한 인식도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 모시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책임이 주어지는 건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고 나면 빛이 나와 모든 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 지위에 있지 않아서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채 성체를 모신다면 성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단죄하는 것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들에게 줄 빛을 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대죄 중에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십니다. 그리고 빵을 포도주에 적셔 유다의 입에 넣어 주시고 “가서 할일을 하라’ 라고 말씀하시지요. 성서는 그 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려는 계획을 가졌으므로 대죄 상태에서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곳을 떠나면 잘못된 일을 하려 계획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대죄가 있는 채로) 이곳에서 성체를 모시고 나가면 잘못된 일을 하러 가는 겁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예수님을 거스르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지요. 성체가 예수님의 몸인데 어떻게 성체를 모실 때 사탄이 들어가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아주 나쁜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것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체를 모시고 사탄을 위해 일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가 자신을 반대하여 증거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는 아주 놀라운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인류의 영혼들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영혼들에게 영양을 주고 관리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는 단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성체를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진 적이 있을 겁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하고 생각할겁니다. 영원함에 대한 비젼이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요. 지금 살고 있는 이시간 뿐만 아니라 계속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지요. 그의 영혼이 육체에서 나오는 순간 즉시 예수님 앞에 있게 됩니다. 그 사람과 예수님뿐입니다. 그 사람이 지상의 삶에서 예수님을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며 십계명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하느님을 모른다해도, 태어날 때 그 사람 안에 이미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예수님을 뵙는 순간, 그 분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항상 주(님) 권을 사랑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그를 살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성서를 일시적인 상황 안에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 종파들이 은총을 잃음으로 해서 성서를 잘못 해석합니다. 그들은 구원이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있다고 말합니다. 죽기 전에 세례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지요. 이슬람교인들이 그들만이 천국에 가고 나머지는 모두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구원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한가지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n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루 24시간 항상 살아 있어야합니다. 단지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할 때, 미사에 참례할 때, 순례 할 때, 종교영화를 볼 때, 혹은 영적 대화를 할 때는 아주 하느님과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외 나머지 시간에는 전혀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가깝고 마음안에 하느님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백프로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과 함께 해야합니다. 사탄은 백프로 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사탄과 싸울 수 있습니까? 오직 백프로 선을 가져야만 싸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하므로 백프로 선이 불가능하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악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백프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백프로 입니다. 우리는 빛을 향해 완전하게 움직여야합니다. 요즘은 이런 종류의 설교를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너무 근본주의적이라거나 극단적, 혹은 광신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성서를 씌여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에 맞추어 편리하게 바꿉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진리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백프로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 속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는 선한 편이야’라고 말하지만, 복음말씀에 의한 대답은 선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선한 편이라는 것은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편이라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명확하게 해야합니다. 때로 그것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죄인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죄를 지으며 살아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와전함과 죄없음을 위해 노력하며 불완전과 죄를 철저히 미워해야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상관없이 나의 목표가 오직 그것이라면 나는 거룩함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완전한 육체, 불완전한 창조물 안에 있는 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금 당장 완벽해지고 거룩해지기를 기대하며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오직 거룩함과 완전함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예를 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험을 보려는 자녀를 가진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는 그 자녀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희생하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결국 아이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슬픔과 죄절로 집에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공정하고 선한 사람이라면 그 부모의 마음에는 그 아이가 시험에 통과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아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통과하고 학위를 따는 것을 지켜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시험에 통과하는 것, 오직 정말 잘 하려는 것, 그것만을 보십니다. 그런데 간혹 아주 위험한 설교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불완전하고 죄를 짓는 것이 괜잖은 것으로 믿게끔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고 그런 우리를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설교입니다. 올바른 설교는 우리는 불완전하고 죄인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완전함과 죄없음이라는 것입니다. 위 두가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네, 나는 나의 죄많은 본성을 알고 있습니다. 불완전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혐오합니다. 나는 그것을 극복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께서 직접 ‘나의 아버지가 거룩한 것처럼 너도 거룩해져라’ 라고 저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내가 너에게 가르쳐준 것을 이해한다면 거룩하고 완전해질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거룩함과 완벽함임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직 그것을 결심해야합니다. 그래야만 24시간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24시간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계속 묵주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일곱번씩 미사를 참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해지려는 결심을 가지고 하느님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느끼든, 생각하든, 그렇게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계획하든 그렇게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과거든 현재든, 어디를 가든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하든 거룩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죽기전에는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지거나 완벽해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원한다면 이 삶의 마지막에는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 삶이 끝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연옥이라고 불리우는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연옥에서 그것만을 배우고 있는 수 백만의 연옥영혼들을 볼 수 있다면 지금 그것을 배우기 위해 서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 그것을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백프로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백프로 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 그러한 결심을 한다면 결코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평화와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무릎꿇고 주님께 말씀하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완전함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것만이 오직 앞으로 삶면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저에게 어떤 부도 주지 마십시오. 건강조차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직 거룩함과 완전함만을 주십시오. 그것만을 원합니다. “마음으로 부터 진심으로 그러한 결심을 한다면 생전 처음으로 여러분은 깨어난것입니다. 그러한 결심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꺼져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참된 믿음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 외 무엇도 여러분의 종교를 영적으로 바꾸어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종교에 대해 놀라운 일을 한다 해도,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고,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그들은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모든 종류의 믿음의 깊은 곳까지 두드리며 많은 기도와 많은 것들을 하지만, 그들이 꺼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이 아닌 종교적인 많은 것들로만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오직 자신이 성인이 되기를 결심했을 때만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영적으로 되지 못합니다. 벡프로 거룩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영적으로 되곘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제가 과장한다고 말합니다. 광신적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보장합니다. 이것은 절대 진리입니다. 성서를 읽어보십시오. 그와 다른것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흑과 백입니다. ‘내게 속하든지, 사탄에게 속하든지. 선택하여라. 나를 따르려거든 뒤돌아 보지 말아라. 나와 함께 걸어라.”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요즘 현대신학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도 믾은 혼동을 하고 있으며 많은 이상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진리를 바꾸어 사람들의 지성을 지배합니다.
지성은 우리의 가장 큰 약점중에 하나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의 지성을 통해서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한 천사를 취했습니다. 타락한 천사이이지요. 여러분은 아마도 천사들이 얼마나 지를 가지고 있는지 알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지배하는 천사는 사이비 주술입니다. 로마의 구마사제로 유명한 가브리엘 아모스 신부의 말에 의하면 북부 이탈리아에서 온 사탄교 제사장을 구마할 때보다도 여호와의 증인신자에게 있는 깊은 사탄을 구마할 때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가브리엘 신부가 여호와의 증인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남성을 구마하는데 수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추락한 천사가 정신을 사로잡은 것이죠. 아주 지적이어서 인류과학을 통해 그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미궁과 같은 그곳에서 그가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몹씨 힘들었던 것입니다. 지성이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인 이유는 원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지 말아야 할 과일을 먹었습니다. 그로인해 우리가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아져서 자신은 죽으라’고 하십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알려고 합니다. 가장 큰 병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은 하느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과학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과학을 숭배할 때, 즉 그 지성의 근원을 무시한 채 인간의 지성을 숭배할 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신론자가 나오고, 너무 세상적이어서 전혀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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