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마리노 레스트레포 강의

[스크랩] 신앙의 기쁨 - 마리노 레스트레포

김레지나 2017. 5. 29. 21:50





The Joy of Being Faithful



 

이 세상에는 분명히 너무도 많은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 어두움이 종교도 손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갖은 우울한 뉴스가 난무하고, 그러한 어두움과 약함이 때로 우리를 낙심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둡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의 경제가 마지막으로 향하므로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 뿐입니다. 모든 것이 마지막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온 우주, 모든 체계, 인류의 역사, 그리고 모든 영적 전쟁이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거의 마지막 때를 향할 준비가 되어 모든 것이 들끓고 있는 것 같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매우 강도가 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 안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것을 잘 깨닫지 조차 못합니다. 하느님은 완벽하십니다. 그 누구도 시간 밖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위해 준비되어 태어났으므로 미래에 무슨 일을 맞든 놀랄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그것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에 맞서 충분히 힘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악 뿐입니다. 게으르거나, 순종하지 않거나 하는 것들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약하게 만들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모두 앗아 갑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파괴적으로 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을 가동시키지 않아서 모든 것이 약해지고, 놀라고, 살아내도록 방어하지 못하고 그 순간에 유익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위치를 켜지 않기 때문입니다. 켜지 못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책임을 소홀히 하고 게을러져 있음으로 인해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영혼은 뮤지컬 악보의 음계와 같습니다.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이신 하느님의 심포니의 일부가 되어 영혼이 음을 맞추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 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음색을 낼 수 있도록 창조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고 음을 벗어나기로 결정하여 음을 이탈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완벽합니다. 우리가 음을 벗어날 떄마다 성사를 통해 다시 음을 맞출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벗어나고 동정심, 자선, 용서가 없을 때 우리는 음을 이탈합니다. 그럴 때,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요. 음을 벗어나, 감각, 본능, 이성, 모든 것이 꺼져 있다는 것,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낍니다. 평화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음에 맞추어, 켜져 있을 때 모든 것이 제대로 되고, 부드럽게 흐릅니다. 집착이나, 억압, 외로움이나 고뇌, 두려움이나 우울감을 갖지 않고 강해집니다. 그러다가 힘을 잃더라도 힘을 되찾을 곳을 알고 있으므로 다시 전 상태로 금방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샘으로 가서 그것을 되찾는 것이지요. 그것이 신앙의 큰 기쁨인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며 기쁘게 신앙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안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합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그 날과 시간을 아시는 구원의 경제가 끝나는 때를 말합니다. 천년이 걸릴수도 있고 하루 혹은 한주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재림하실 때 우리가 이곳에 있을까요?’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네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육체가 없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뭏튼 이곳에 있을 겁니다.’라고 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자녀들의 회개를 걱정하는 부모에게 하는 말도 같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육체가 없는 상태에서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죽고 말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명확하게 해야 할 한가지는 이 육체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씨가 심어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썩지만, 씨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영혼이지요. 그 영혼은 빛이 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들이며 결국 맨 마지막에는 육체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완벽한 육체일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해 잃어버린 원래의 상태로 완벽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마음 안에 그것을 명확히 하여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굳은 믿음 안에서의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굳은 믿음 안에서의 기쁨은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 보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는 놀라운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삶의 상태가 곧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육체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요. 다시 젊어지고, 다시 이뻐질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무언가 자꾸 부서지고 있구요. ㅎㅎㅎㅎ 날이 가면 갈수록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으악~~~~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일시적인 삶의 모든 수고와 시련이 모두 지나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은, 더 좋고, 더 완벽하고, 영광 안에 있게 될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행복해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긴 여행을 떠났을 때와도 같습니다. 아주 불편한 여행이 있지요. 때로 잠자리가 집처럼 편안하지 않고 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러나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으므로 여행중 모든 불편함을 감수합니다. 괜잖아, 겨우 몇주 일 뿐인데.  ….  그러한 인식이 견뎌낼 힘을 주고 여행을 계속 할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그것이 삶을 견뎌내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삶은 짧은 여행입니다. 그 여행중에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에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이 돌보아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고, 더 이상 죄도 없고, 더 이상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우리는 영원히 해가 뜨는 곳, 영원한 영광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죽을 운명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거의 상상이 안되지요. 이 삶이 끝난 후, 영원히 완벽한 영광 안에 영원히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 눈으로 그것을 보았기에 증거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그런가요? 그런데 제가 그런것입니다. ㅋㅋㅋ 어떻게 그럴수 있었는지 저도 모릅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하느님에 대해 가장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세상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았고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았기에 바뀌어야만 하는 저의 모습으로 바뀐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과는 아주 먼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 저는 매일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이 일시적인 상황은 앞으로 오게 될 상황이 어떤지를 엿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중에 있는 아기가 바깥 세상에 대한 것을 감지하고 느끼지만 확실히 이해는 못하지요. 그러나 곧 바깥 세상으로 태어날 것이므로 이미 바깥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영적세상에 관련된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은 영적세상을 감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감각이 좀 더 발달되었지요. 어떤 아기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대화를 한다거나, 태교등을 통해 좀 더 바깥세상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바깥 세상의 나쁜 것들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도 영적세상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 영혼은 그렇게 육체를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을 완벽하게 본 것은 아닙니다. 완벽하게 보려면 그 곳에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저는 잠시 보고 다시 돌아온 것이죠. ㅎㅎㅎㅎ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돌아가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저를 선택하셨고, 그것이 저의 책임입니다. 사람들이 저의 증언을 믿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망갈 수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마주 대할것이란 것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죽음 후에도 삶은 있습니다. 삶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따라서 그 때 우리가 어떻게 될 지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매우 중요한 것을 상기 시키며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우리의 나중을 결정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행위를 결정해야 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더 이상의 고통도, 죽음도 없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곳에 갈 수 있는 조건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도 조건이 있습니다. 순종해야하고 잘 배워서 시험을 통과해야하지요. 그것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우리가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하느님께서 다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것이 카인과 아벨이지요. 성서에서 나오는 첫 대화가 내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였습니다. 그 이후 하느님께서는 계속 대를 이어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가지고 나타날 때 하느님께서 천둥과 번개와 같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 나와 함께 일하자.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가르치겠다. “그리고 성서는 하루에 한가지 죄로 인해 이만명 이상 죽어갔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시험했고, 간음을 했고, 등등으로 죽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쓸어버리신 것이지요.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신 방법이셨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도 그 교육은 계속 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차이는 인류의 사이클 안에서 다른 시점에 와 있는 우리가 다른 영적 전쟁을 맞고 있는 것 뿐입니다.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몸의 일부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전쟁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히브리인들에게 하신 똑같은 말씀을 오늘도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법이다. 이것에 순종한다면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너를 나의 것으로 창조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원한다면 내 것이 아니도록 택할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계속 상기시키시며 우리가 돌아서는 골목 어귀에서 항상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우리가 돌아 설 때마다 주님께서 안녕?’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신다는 싸인은 삶을 통해 매순간 계속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그 메세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하시는데 우리는 알아 듣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마음 안에 충분히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기쁨 안에 살기 위해서는 충실한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충실한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기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충실한 믿음이 꼭 완벽하게 거룩해야 한다는 것 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충실한 믿음이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대 앞에서 결혼을 할 때 배우자에게 충실할 것을 결심하지요. 그것이 결혼의 기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 내가 당신에게만 충실한 것에 정말 감사해야돼.’ 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상태이지요. 결혼 생활에서 상대에게만 충실한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 보세요. 저는 당신 때문에 죄 짓는 것을 그만 두었어요.” 하며 이제 하느님께 충실하니 모든 것이 순조롭고 정말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떠나서 하느님께 돌아와 순종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금방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다 기대와 같지 않으면 어떻게 된거야? 한참 전에 죄를 떠났는데,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내 삶이 더 나빠졌어.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는 하느님께 충실하고 있는데 어떻게 된거야?” 결과에 의존하는 조건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조건적이라면 진짜가 아닙니다. 순명이 아닌 것이지요. 조건 없이 일할 때만이 순명이 생깁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나 열매에 관심을 두지 않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때  자유로워집니다.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것이 결코 끝이 나지 않는 것이라는 놀라운  믿음으로써의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방시켜 줍니다. 더 이상 조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므로 매우 좋은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참 모습을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영원한 존재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써 죽지 않고 마지막에 변화될 것을 확신하는가 입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평화가 있을 것이고 결코 조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고뇌도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데 왜 일시적인 것을 걱정합니까? 무엇을 위해 조급해 합니까 ? 보통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신앙에 대한 기쁨이 없는 사람들은 매우 비관적입니다. 대부분 잘못될 것을 예상합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온갖 걱정을 합니다. 내면에 불안과 부정적인 생각이 많습니다. 오직 일시적인 삶에 몰두하며 모든 목표가 일시적인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조급해서 무언가를 놓쳤다고 생각되면 죽은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곧 있으면 묻히고 말 죽음의 운명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일시적인 삶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슬을 풀어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운명을 풀어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와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시고, ‘그 과일을 먹으면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죽을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댓가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다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지만 죽지 않습니다. 성 바오로가 원죄 안에 있는 상태에 대해 표현한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죽었으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이전의 죽음으로 돌아가지 말고 살아있으라고 합니다. 죄의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깊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은총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주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 건져내고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시어 성령 안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란 초자연적인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그 은총이 우리의 삶 안에서 매일 드러나야합니다. 결코 희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평화를 가지고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걱정이나 근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일시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항상 확신해야합니다. 모든 수고, 모든 어려움, 고난과 시련,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문 등,  우리의 일시적인 삶을 억누르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이 날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렇게 되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기쁨에 좃점을 맞추어야합니다. 이 삶이 끝나는 것에 촛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요즘 아주 인기있는 것이 지구의 멸망 메세지입니다. 매우 관심을 끕니다. 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삶을 살므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죽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ㅎㅎㅎㅎㅎㅎ 대체 언제 그런일이 일어나는 것야 ?’ …계속 그 날짜를 찾아 아닙니다.  혹시 그 날짜를 아는 사람 있었요?’ㅎㅎㅎㅎ 우리 모두가 같은 날 죽기를 바라는 거지요. ‘ 나는 혼자 죽기 싫어! 다 함께 죽어야 돼.”  ㅎㅎㅎ 행성 같은 것이 지구 위에 떨어져   날려 버리라는 거지요.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예수님이 재림을 안하시는 걸까요?” 그러나 마음 안에 조금이라도 사랑이 있다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지금은 안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니 주님께 지금 당장 오시라고 간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동정이지요.  그 사랑과 동정으로 주님 제발 기다려 주세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지금 오시면 우리는 불타고 말것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 데려다 줄 시간을 주세요.“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바라보면 좀 더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날라가 버리고, 파괴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이 그 가운데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코믹한 동작..ㅎㅎㅎ) 언제 정확하게 별이 지구에 떨어지는 알아야 하고, 어떻게 파괴될거 라는 둥 ㅎㅎㅎㅎ그리고  , 이제 그것을  준비합시다!!!!… 얼굴에는 파괴에 대한 묘한 기쁨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 말씀은 그것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정말 잘 읽어보면 복음말씀은 희망입니다. 동정이고 용서입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이 준비됬고, 죄인들이라면 신물이 나니  회개하거나 말거나주님께서 지금 당장 오시기를 원한다면 내가 무엇을 맞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구원이 아니라 나만의 구원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의 기쁨은 서로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염려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누구란 말입니까?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저는 이와같은 강연을 하기 전에 언제나 주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제게 당신의 사람들에게 줘야 할 사랑을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저를 통해 그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주시기 위해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사랑을 주십시오.” 제가 이곳에 설 때 제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 선 것은 진심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진심으로 여러분이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만이 이유입니다. 몇 명이나 오는지, 혹은 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제가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 입니다. 구원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고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주 많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주 많은 영혼들을 함께 데려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수백만 사람들을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단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희망을 가져야합니다. 저는 지난 십년동안 이 아일랜드에 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한 뉴스등을 듣고서 사람들은 오 아일랜드의 교회는 너무 문제가 많아요.“ 하고 말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런 일들이 생길 때가 진정으로 주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좋은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릎 꿇도록 재촉 하시는 때입니다.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교회가 새롭게 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신실한 신자들이 더욱 무릎 꿇고 낮아지는 때입니다. 제가 어디를 가든 대부분 신실한 신자들이 옵니다. 어느 본당이든 모든 신자들이 믿음이 강한 것은 아니지요. 꼭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태어난 남미를 가보면 매일 미사도 교회가 사람들로 꽉 찹니다. 수백명씩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그 곳에 진심으로  참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오 노단지 종교적인 사람들일 뿐입니다. 여러 모습의 종교가 있을 뿐입니다. 참된 영성? 참된 서약?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참되게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어야 합니다. 본당에 오천 명이 있어서 모두가 교회에 나온다해도 모두 미지근하거나 세상적인, 종교적인 사람들일 뿐 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사 오백명 신자 중에 백명이 참된 신자라면 그것으로도 오히려 충분하지요. 그 사람들만으로도 주님께서는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바래야지요.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도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 한마디로 모두 떠나갔지요. ‘내 뭄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그러자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제자들만 떨며 남아 있었지요. ㅋㅋㅋ 언제나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가 스캔들이 생기면 모두 흩어집니다. 누가 남습니까? 항상 하느님의 사람들, 선택된 사람들, 언제나 믿음을 지키는 신실한 신자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납니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죠. 항상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있어야 할 사람들은 항상 교회 안에서 주님 앞에 무릎꿇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많은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굶주리며 죽어간 그들을 보십시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와 기근으로 죽은) 그 피가 헛되겠습니까? 그 가운데 녹의 발현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  괜잖다. 죽음을 맞아라하늘은 그렇게 말한것입니다. 빵을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참아내어라. 견뎌내라.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이다.” 그러기에 녹의 발현에는 메세지가 없습니다. 완벽한 하느님께서 침묵으로 괜잖다. 내가 주관하고 있으니 겪어 내어라. 그것으로 부터 나오면 모든 것을 설명해 줄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오늘날의 영적전쟁의 터전을 만들어 준것입니다. 이곳의 교회가 그 순교의 피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입니다. 그들은 우리, 여러분을 위해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가톨릭 신자가 될 수도 없었고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며 신앙의 신비에 대해 지금과 같이 묵상할 수 있는 힘도 없었을겁니다. 이제는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할  차례입니다. 꼭 육체적인 순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며 피를 내어 주어야합니다.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죄를 포기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가난의 서약이라고 부르지요. 사람들은 가난을 서약하는 것이 돈을 포기하고 가족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피를 포기해야 합니다. 죄를 포기하고 정욕을 포기해야합니다. 피를 포기하는 것, 그것이 순교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보물, 삶을 하느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것을 원하고, 끌리고, 유혹을 당할 지라도, 그것을 끊어 버리고 변화되어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입니다. 죽음을 맞았을 때, 자신을 영혼 구원을 위해 내어 줄 수 있었는데 너무도 자신만을 위해 삶으로써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보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릅니다. 자신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평생 자신만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것이 자신 만을 위한 것이었던 거죠.  

 

이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깨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삶이 영원한 삶의 한 순간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영혼 구원의 조건은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고 참된 것을 위해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 라고 한번 해보십시오. 오 아주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의 온 몸이  어이구~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인이 된다고?” 자신의 온 육체의 세포가 반항하지요. ㅋㅋ ! ! 성인 같은거 싫어!’ 우리의 영혼은  나는 성인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데, 육체는 나는 아냐! 싫어!’ 이러한 전쟁을 성 바오로는 육체가 영과 싸우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한 존재가 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가 말하지요. ‘성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아. 하는 데 까지는 해보겠지만, 항상 그럴수는 없어!’ ㅎㅎㅎ 육체는 정말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 무언가 조금 남겨놓고 싶지요.  그러나 정말 영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을 가고 수녀원을 가면서도 자신의 피를 그대로 가져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피가 가장 큰 소유물인데요. 어떤 사람은 수도원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고문합니다. 자신이 너무 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도 어떤 사람이 자신의 피로 가득차 있고 아주 커서 인간적인 영역 안에서 자만심으로 가득 차있고, 자신의 온갖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들어 온다면 자리를 크게 차지하지요.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이 어쩔줄을 모릅니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의자도 충분히 크지 않지요. 물 한잔을 줄 때도 적당한 컵이 없습니다. 너무 크고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그것이 우리가 자만심에 의해 몹씨 변형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만심은 영적인 질병입니다. 이 자만심은 영혼을  몹씨 변형시킵니다. 자만심은 원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만심은 사탄인 큰 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뱀은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부터 우리는 벗어날 수 없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좋은 알곡이 함께 뽑힐지도 모르니 그냥 두웠다가 추수 전에 뽑아버리라고 하시지요.   우리 안에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해야할 일에 반대되는 말을 하지요. 이것을 해야하는데 ,, , 나중에 해…’ㅋㅋㅋ 우리는 매일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삶에서 얼마나 뱀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 자신이 뱀의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뱀 안에서 커질 것이냐? 천사의 날개 아래서 성장할 것이냐? 우리는 많은 경우에 뱀의 말을 듣고 넘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고백성사를 주셨지요. 우리는 고백성사를 보러가서 또 뱀의 말을 들었어요.’ 라고 얼마나 많이 고백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까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도 때때로 그렇게 넘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의 은총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하느님은 긍훌과 자비와 용서이시며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깨달아야할 것은 충실한 믿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질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믿음과 신뢰를 갖지 못하는 누군가가 주위에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쁘지 않겠지요. 본성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럴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므로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매번 미사를 참례하고, 신심 활동을 하고, 많은 일을 하여도 하느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없습니다. 대죄 중에 있는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끔찍한 일입니다. 대죄로 인해 미사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지요. 완전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대죄상태에서 교회 안에 있다면 아주 끔찍한 일입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않아서 온 가족이 서로에 대한 배신, 거짓말을 하고 자녀들 또한 속이고, 하는 비참하고 어두운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올바로 하라고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기쁨을 갖을 수 있고, 평화를 가질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을 지키도록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열쇠이다.’ 참된 기쁨을 가지고 산다는것은 감정이나 일시적으로 얻은 것에 대한 기쁨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항상 있으며 평화가 함께 있습니다. 갈바리산을 오르시던 성모님을 생각해 본다면 분명히 아주 끔찍한 고통을 가지셨음을 알수있지요. 그러나 그 분의 마음 안에 항상 있던 기쁨과 평화를 앗아갈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성모님은 그것이 일어나야 했고, 완벽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우리의 삶의 방법입니다. 성모님은 죄가 없으셨으므로 우리와 같은 죄가 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목표로 해야할 것은 이루어 놓으셨고,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따라야합니다. 구원을 향해 가고 있는 길에서 기쁨을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고 싶어 하신다는을 깨달아야합니다. 그것만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하느님과 함께 걸어감으로써 기쁨과 평화를 받는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스테파노 성인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할 때, 순교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무릎 꿇고 돌을 맞으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과 평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를 보면 온 가족이 어머니와 함께 죽지요. 끔찍하게 고문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하느님 안에 믿음을 심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이방인들의 왕에게 믿음을 증거하지요. 그들이 죽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을 따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참된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오늘 우리의 결정과 결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여러분 중에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의 절대적이고 확실한 결심 나는 성인이 되길 원한다. 거룩해지길 원하다라고 말하고 있다면, 아마도 여러분중 많은 사람들이 그럴것입니다만,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의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러한 묵상과 모임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묵상하며 무엇을 해야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뒤돌아 본다면 아마도 하느님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움직이 못한 채 멈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이 하느님께서는 문을 두드리시며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계속 나아가라라고 말씀하시는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종교안에서 속습니다. 많은 종교활동에 참여하며 매우 열심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 종교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삶을 승화시킬 수 있도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영혼을 궁휼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며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길 원하다고, 거룩해 지길 원하다고, 오직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길 원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믿음을 다루는 방법이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며, 삶이 승화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가 거룩함을 향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 곳, 이 상태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잘못한 모든 것이 영원히 인류의 일부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 현재, 일하고 말하며, 대부분 지난 인류의 죄의 행적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의 자국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거룩함의 길을 걸었고 거룩함의 자국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를 뒤돌아 볼 때  많은 성인들이 나왔던 것 같지만, 인류의 인구를 생각해 보면 성인이 많이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몇 명이나 참된 거룩함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주 어려운 길이지요. 우리는 삶이 승화되도록 결정 해야하는 상황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서로를 도와야합니다. 서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이웃에게 자신이 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해 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함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삶이 완전히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백프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저희 공동체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성모님께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까? 무릎 꿇고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저자 매우 정확하게 성모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 줄 수가 없구나라고 하시며 이유를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무언가 정말 잘못하여서 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사탄이 저에게 힘을 가진것이지요. 사탄은 저희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휘젖고 있었습니다. 제가 넘어졌기 때문었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께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구나. 네가 변화되어야한다. 네가 이 문제를 고쳐야 한다. 그러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뀌어야 할 제가, 저의 잘못을 부정하고 성모님의 힘으로 모든 것을 고치려한 것이죠. 저는 매우 슬펐고 정말 힘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약속해야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성모님께 다시 나아갔을 때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시는 걸 알았습니다. 마치 이제 내가 도와줄 수 있다라고 하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모든 잘못된 것, 부정적인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편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편인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선해져야하고 그 분에게 가까이 가서 해야할 일을 한다면, 우리는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전구도 받을 수 있습니다. 단지 성모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어머니라고 해서 성모님의 망토 아래 우리를 두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 성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충실한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성모님의 모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여라. 고백성사를 보아라. 믿음을 가져라. 하느님께 순종하고 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라. 그것 아닙니까? 그렇게 할 때 모든 것이 보살펴질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건들 수도 없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충실하면 사탄이 너희를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도와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도록 해준다면 내가 너희의 삶안에서 큰 일을 할 것이다. 너희는 내가 가르키는 길을 따라 걸으며 빛 안에 서라. 그러면 모든 것이 보살펴질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 안에 서서 나오려 하지 않은 채 도와 달라고만 한다면요.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 안에 산다면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에서 나올 수 있는 날개를 주시는데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숭배하기 때문에 대죄 안에서 삽니다. 사람을 하느님으로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릅니다. 사람에게 집착함으로써 대죄중에 있으니 하느님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며 그 사랑을 하느님께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합니다.  ~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진리인것 처럼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계명을 따르는 것임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밝혀졌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칠종죄는 어떻게 사탄이 십계명을 공격하는가에 대한 좋은 가르침입니다. 칠종죄(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는 십계명을 공격하려는 사탄의 일곱가지 무기입니다. 우리는 각 칠종죄와 각 십계명을 충분히 묵상하여 우리의 상태가 어떤지 보아야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청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원에 대해 물어보면 예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조용히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모든 사람과 나누어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기 있는 말입니다. 나와 십자가를 나누어 지지 않으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지요. 저에게 있어서 가장 힘이 있는 미래지향적인 성모님의 발현 중에 하나가 녹의 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발현이 이제 막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발현이 미래의 영적전쟁의 힘을 공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 교회에 놀라운 힘을 줄 중심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엄청난 영적전쟁을 맞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녹이 중요한 이유는 가장 어려운 영적전쟁 안에서 거룩함의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완벽한 기도도 관상기도가 아닙니까? 영혼의 가장 완벽한 상태는 침묵입니다. 각자의 삶을 지고 가면서 인내해야 할 고통은 남들은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단 둘이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도 그 십자가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기쁨과 평화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바리산을 오르실 때 여인들을 위로하셨죠. 여인들이 울 때.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희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위로를 필요로 한 사람을 위로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침묵입니다. 거룩함의 길을 가고 싶다면  자신의 삶을 침묵하며 짊어지고 가야합니다. 불평하고, 울부짖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십자가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요. 그것이 은총입니까? 그러한 삶을 산다면 부끄러운 일이지요. 거룩한 사람은 이 신비한 삶, 드라마틱한 삶을 은혜롭게 지고 가야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해야합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식을 할 때는 아무도 모르게 하십시오. 슬플 때 슬프지 않은 것처럼 하십시오. 기뻐도 기쁘지 않은 것처럼 하십시오.’  우리가 알수 없는, 드라마틱한  삶을 사랑과 긍훌을 가진 침묵으로 지고 가야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꿈에 대한 철칙을 말하곤 합니다. 악몽을 꿨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뭐하러 사람들에게 전합니까? 어떤 사람은 그 꿈을 전하느라 안달입니다. ‘내가 지난 밤에 악몽을….’ ‘그만!! 듣고 싶지 않아.’  왜 우리가 악몽을 들어어야합니까? ‘내가 구멍에 빠졌는데쥐 두마리가 나타나서나를 잡아 먹으려고…’ ㅎㅎㅎㅎㅎㅎㅎ 듣고 싶지 않지요.  좋은 꿈을 꾸었다면요전하세요.. 안될 거 없지요. 그러나 악몽은 전하지 마세요. 악몽을 꾸었다면 주님께 그것을 잊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된겁니다.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모든 어두움과 부정적인 것들을 따라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십은 독약과 같습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뒷담화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과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뉴스나 부정적인 것, 어두움들을 퍼뜨리지 마십시오. 파멸과 연결되는 것에 집중하고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으로 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침묵하는 것뿐입니다. 삶의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지고가야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삶은 누구도 답해줄 수 없습니다. 답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밝혀졌습니다. 이 삶의 마지막에 밝혀진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도유를 통해 우리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영혼은 아주 현명하며 완벽하게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곱살, 여덟살, 아홉살 아이들이 첫 영성체를 하게 되면 주님의 대전 앞에서 자신의 삶에서의 아주 작은 일들에도 백프로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순진무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에게 완벽한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 전체를 모신다는 것입니다.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즉 완벽한 진리를 모신다는 것이지요. 영혼은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지옥에 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어린 아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어린 아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사회를 보십시오. 특별히 제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에는 여덟, 아홉살 짜리가 교사나 친구를 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입니다. 오늘날에는 더이상 선과 악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악은 땅아래 있고 선은 위로 드러나는 것과 같지 않고, 악이 우리 눈앞에 개방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지요. 트럼펫을 불고 드럼을 치며 퍼레이드를 합니다. “이리와, 우리는 악마들이야, 와서 함께 즐기자….’ 세상 모든 곳에 사탄에 속한 사상들이 있습니다. 거리에는 하느님보다 사탄의 퍼레이드가 더 많이 열립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손을 놓은 채 구경만 하지요.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혼란을 가져오는 사이비 종교가 쉬지않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립니다. 끔찍한 것들을 가르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집 문도 두드리지 않지요. 게이 퍼레이드 뭐다..구경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정말 빛의 등불이 되어야합니다. 정말 빛의 등불이 된다면 사탄의 끔찍한 퍼레이드가 벌어지려는 곳에 있게될 때 그들이 해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빛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지요. 참된 하느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빛의 등불이 되어 사탄은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눈을 뜰수가 없습니다. 달아납니다. 사탄은 성령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 wisdom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출처 :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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