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자신을 위로해주세요 "내 탓이 아니다"라고
한겨레 입력 2016.04.27. 15:19[한겨레][내 삶의 주인 되기] 10대부터 우울증 40살 싱글여성 “친구 사귀기가 힘들어요”
Q. 십대 후반부터 우울증을 앓아온 40살 싱글녀입니다. 제 오랜 고민은 친구를 못 사귀는 것입니다. 저는 여태껏 사람이든 뭐든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어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들까지 오래도록 미워했고, 아주 어려서부터 친구가 없어서 또래들과 수다를 떨며 웃거나 마음속 얘기를 나누거나 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점심시간엔 같이 밥 먹을 애가 없어서 책상에 엎드려 잤어요. 가사시간에 뜨개질을 배우는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친하지도 않은 선생이나 애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게 너무 구차하게 느껴졌어요.
중학생 때 짝인 애가 있었는데 같은 동네에 살았어요. 그땐 집이 한창 지옥 같던 때라 피신하고 싶은 마음에 그애 집에 갔었는데 싫어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린 친구가 아니구나 깨달았어요. 친구가 없으니 갈 데가 없어서 둘째 동생의 친구네 간 적이 있는데 방에 있게 해주더라고요. 그런데 잠시 후 동생이 저를 데리러 와서 저 때문에 창피하다고 욕을 했어요. 그래서 그담부턴 집에서 나오면 길에 주차된 차 뒤나 남의 집 앞 계단이나 골목 구석에 있곤 했어요.
늘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친구를 사귀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고, 우울증으로 힘들어서 사람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사람이 생겨도 오래가질 않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안 하면 상대방도 연락을 안 해서 관계가 끊긴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관계가 이어지는 그 짧은 동안에도 거부당할 게 두렵고 그럴 때마다 구걸하는 거지가 된 듯해 비참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친구를 사귄다고 할 때 생기는 불안이나 두려움은 없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제가 어쩌겠어요. 다행히 지금은 강아지들에게 푹 빠져 살아요. 얘들은 사람들처럼 저를 거부하지 않아요. 온갖 단점을 지적하지도 않고. 얘들과 함께 있으면 눈치가 보이지도 않고 내가 거지처럼 느껴지지도 않고 그냥 나 자신으로 있는 게 창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여전히 단 한번만 진짜 친구랑 있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불가능할 것만 같고 그래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기대 없이 그냥 잠시 좋은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을 해요. 더 나이 들기 전에 재미있게 놀아보고 싶어요. 김보라
A. 이렇게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놔 주셔서 감사해요. 외톨이로 보낸 오랜 시간을 끝내고 싶어하는 당신에게 먼저 격려의 박수부터 보냅니다.
추측건대 님은 어린 시절 무척 내향적이었을 거예요. 부모님은 부부관계에서나 부모자식관계에서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셨을 거고, 가족간의 불화가 있을 때마다 내향적 성향을 가진 님은 더욱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었을 겁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려우셨겠지요. 애초부터 또래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성격유형으로 볼 때 내향적인 사람은 내면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발달해 있지 못합니다. 상처 때문이 아니고 선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향적 성향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누군가 그를 안내할 어른이 필요합니다. 바깥세계가 안전하다고,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속삭여줄 든든하고 안전한 어른 말이지요. 그런데 어린 김보라님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어른이 없었네요.
혼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고 편안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둡고 고독하고 적막했을 겁니다. 나이가 들어 또래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자신과 그들을 비교할 수 있게 됐을 때는 비참하기도 하셨을 거예요.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거지처럼 느껴진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네요. 님은 외부세상과 연결된 길을 찾지 못해, 그저 창을 통해서만 밖을 바라보셨을 겁니다. 어떻게 문밖을 나서 그들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들과 공감하고 나누고 웃을 수 있는지 배우지도, 경험하지도 못하셨기 때문에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된 것이 김보라님의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님은 위로와 지지를 받아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귀 막고 눈 가리고 어두운 곳에 홀로 숨어 잔뜩 웅크리고 있었을 어린 김보라의 내면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보라님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충분히 느끼고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말씀해 주세요. 내 탓이 아니라구요. 그런 자기 위로가 우선되어야 자신감을 갖고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과 만날 힘을 갖게 되실 겁니다.
인간관계는 인간에게 의식주의 본능적 욕구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간이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왜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까>의 저자 매슈 켈리는 ‘관계는 우리가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뛰어들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합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현실을 알게 되고 현실에 발붙이게 된다는 말이지요.
물론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뛰어든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닙니다. 즐거움뿐 아니라 괴로움도 만만치 않지요. 친구관계도 그렇습니다. 따뜻함, 친밀함 같은 좋은 감정도 느낄 수 있지만 반대로 갈등과 고통과 수치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 말씀은, 인간관계에 따르는 필연적인 고통을, 유독 자신에게만 오는 고통이라고 여기며 너무 무거워하거나 움츠러들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남들보다 친구가 많지 않은 것은 당신이 나쁘거나 거지 같아서가 아니라 내향적 성향의 사람들이 가진 독특함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당신의 독특한 정신을 이해해줄 친구를 만날 때까지 관계 맺기를 계속 시도하세요. 관계에도 오랜 훈련이 필요하니까요.
그러나 상대가 좋아할 것 같은 태도를 억지로 만들지는 마세요. 그러면 비참함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상대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나와 상대의 차이점과 공통점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면서 천천히 다가가세요.
인간관계에서 많은 좌절과 고통이 있었음에도 진짜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오래도록 지켜온 당신은 굉장한 저력을 가진 멋진 분입니다. 장담하건대 그 희망이 당신에게 멋진 미래를 선물하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박미라 심리상담가·<천만번 괜찮아> <치유하는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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