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중에서 옮깁니다.
김 신부님의 소개로 나를 뉴욕까지 데려다 줄 신자분이 한 분 오셨다. 단아한 인상의 젊은 교포 여성이었다. 그분을 K라고 하자. 뉴튼을 떠나기 전 점심을 먹고 잠시 겨울의 따스한 햇볕 속에서 함께 산책을 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K가 내게 물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지만 겨우 성당 미사에 참석하고 있어요. 하느님이 너무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져요. 사는 게 너무 건조하고 무의미해요.”
신앙심도 없는 나에게 가끔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털어놓는다.
“..... 힘들겠군요.”
내가 말하자, 뜻밖에도 K는 약간 목이 멘 소리로 대답했다.
“고통스러워요.”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은 실은 애쓰고 있는 것이다. 제일 무서운 것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애쓰는 사람의 편을 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그녀가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
“고통 받는다는 건 성장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성장하기 싫어요. 그냥 고통스럽지 않고 싶어요.”
내가 웃었다. K가 ‘모처럼 꺼낸 고백인데 웃다니‘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몇 년 전의 나를 보는 거 같아서 그래요. 반항했지요. 고통은 싫다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말했지요. ‘그냥 절 좀 내버려 두세요. 고통 받으면 성장하는 거 저도 알아요. 다 안다고요! 그런데 왜 성장해야 해요? 그냥 이대로 조용히 살고 싶다고요. 조용히요.’ 그분은 끊임없이 저를 바람 부는 벌판으로 밀어내시고 심지어 문을 잠가 버리셨어요. 친구가 어느 날 다가와 독일의 어떤 동화를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친구의 동화는 이랬어요.
“옛날에 어떤 농부가 가을에 새로 맺힌 씨앗을 받아 씨앗 저장소에 놓아두었대. 그곳에는 씨앗이 씨앗일 수 있게 하는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지. 온도, 습도, 서늘한 어둠까지. 그리고 옆에는 친구도 많았어. 씨앗은 행복했어. 그런데 봄이 오자 농부는 그 씨앗을 꺼내어 밭에 뿌리고 흙으로 덮었대. 흠뻑 물도 뿌리고, 씨앗은 난생 처음 어둠에 갇혔고 움직일 수도 없었고 숨이 막혔어. 게다가 스며든 차가운 물은 씨앗의 살갗을 불려터지게 만들었지. 씨앗 곁에는 아무도 없고 말이야. 씨앗이 소리쳤대. 대체 제게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제 행복을 빼앗아 가시는 이유가 머죠? 저를 여기서 꺼내 예전으로 되돌려 주세요! 여기는 너무 춥고 어둡고 내 살갗은 터져 피 흘리고 있어요. 제 친구들을 어디로 데려가 버리신 거죠? 전 외롭고 아파요.”
나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K의 어깨가 순간 굳어지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친구는 덧붙였죠.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햇볕이 따스한 겨울날이었다. K의 가슴속에서 일고 있을 파도에 내가 다 마음이 시렸다.
“그냥 성당 안 나가는 주일도 많아요. 의미가 없이 느껴지고....”
“안 돼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커지고 말았다. 내가 그녀의 생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잠시였지만 ‘내가 또’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이루어질 거라고 믿자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발바닥으로 성당에 가는 거, 너무 중요해요. 제가 18년을 떠나 있어봐서 잘 알아요.”
K가 고개를 떨구었다.
“물론 가기는 가요. 그러나 맘도 없이 미사 내내 딴 생각하며 앉아 있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요.”
“그러면 어때요? 친구가 생일 초대했을 때 가기 싫은 적 얼마나 많아요. 그래도 가는 게 결국 좋았잖아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를 내 생일에 초대했는데 친구가 ‘내가 가도 널 축하만 해주고 있지 않고 머릿속으로는 딴생각할 거 같아 못 가겠어”하는 게 낫겠어요? 그래도 와서 있어 주는 게 좋겠어요? 결국 ’진심이 아니면 가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 속에는 신앙이, 교회가, 아니 어쩌면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취미일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 그래요. 이건 아주 중요해요. 내 영혼의 구원이 취미인지 아닌지.“
K가 웃었다.
“그런 생각은 못해봤어요.”
“그리고..... 이런 말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안 오면 너무 서운해 하세요. 정말이에요.”
아마도 내가 정색을 했던 것 같다. K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어떨지 모르지만, 제 경험을 말해 줄까요?”
내가 입을 열었다. 입을 여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그가 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돕고 싶었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 그는 애쓰는 사람, 어쩌면 나의 동족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하던 그 무렵이었다. 목소리는 길을 걷다가도 그리고 내가 슈퍼마켓에서 계산대로 카트를 밀고 가는 순간에도 울렸다.
“마리아야, 넌 아직도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다 믿지 않는구나.”
그러면 슈퍼마켓 계산대 앞으로 가며 내가 대답했다
“네, 못 믿어요.”
어떤 날은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쯤 00이 네게 전화를 할 거다. 그러면 그의 말을 들어 주거라. 그리고 이제 그만 지난 일을 잊어라. 용서를 하면 더 좋고.”
흥! 용서를 하든 잊든 내 마음이고, 오호라. 좋은 기회가 왔다 싶었다. 몇 년 동안이나 전화를 하지 않던 사람에게 전화가 온다니, 그것도 내일 온다니, 내 마음속에서 울려오는 이 목소리가 진짜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다음 날 그 사람으로부터 몇 년 만에 전화가 걸겨 왔다. 오, 하느님, 당신이 정말 하느님이셨군요. 무릎을 꿇었다가 한 시간쯤 후에는 ‘아냐, 우연일 수도 있어. 내가 미친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비로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받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늘 궁금했는데 내가 딱 그런 꼴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연’이라는 아주 좋은 단어가 ‘심리적으로’,‘무의식적으로’라는 단어들과 함께 떠올라 왔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내 승용차가 아닌 큰 승합차를 가지고 좁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지난번에도 그 차를 가지고 그 주차장을 들어가다가 몇 군데 스크래치를 남겼던 것이다. 그날 아침부터 그 일이 맘이 걸렸다. 좁은 주차장의 나선형 입구를 통화할 일이 걱정이 되어서 나는 주차장 입구에 이르러 기도했다.
“이 차가 너무 크고 제 차가 아니라 잘 운전할 줄 몰라요. 지하 주차장 통로는 너무 좁고 가팔라요. 차를 긁기라도 할까 봐 겁나요. 도와주세요.”
그리고 나는 지하주차장의 나선형 통로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분의 목소리가 내 마음속에서 들려왔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그렇지 조금만 더 운전대를 틀어. 아이고, 잘하는구나. 그래, 그렇게 하면 돼. 겁낼 거 하나도 없다고. 옳지, 옳지, 조금만 더 돌려 봐. 그럼, 그럼, 아이쿠, 잘하는구나. 그럼,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래그래, 마리아, 참 잘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조심해 가자.”
운전을 하는 와중에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냥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냥 가볍게 한 기도였다. 낭떠러지도 아니고 지하주차장에서 차 표면을 조금 긁힌 들 뭐 그렇게 큰일이 있겠는가. 폭탄을 실은 것도 아니고 그 차가 설사 거기서 부딪쳐 쿵쿵거린들 무슨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내 운전 경력은 그때 이미 이십 년이 다 되어 가고 있는데. 그리고 그 기도도 그냥 해 본 적이었는데. 그런데 이분은 내 옆에 바싹 붙어서, 마치 내가 정말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라도 되는 듯,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며, 전능하신 분이 나의 창조자가, 이 세상의 주인이, 우주의 경영자가, 세상의 전쟁을 보고 가슴 아파하기에도 벅찰 그분이, 그 지하주차장 가는 일이 무슨 나라를 구하러 가는 일이라도 되는 듯.
지하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나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우러러 보았다.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만족한 듯했다. 그리고 내가 장한 일이라도 끝마친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계신 듯 느껴졌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도왔다는 것을 기뻐하시는 듯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이건 내가 지어낸 내 마음속의 내 말이 아니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 나는 어떤 누구를 두고 이렇게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이렇게까지 사랑한 적도 없고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행위, 이런 단어를 이런 상황에서 뱉은 것은 내가 아닌 게 너무도 분명했다. 이건 사랑이었다. 누가 봐도 그랬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구나. 그 사랑은 구체적이구나. 아아, 사랑이라는 게, 사랑을 한다는 게, 사랑을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K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랍죠? 나도 놀랐어요, 많이 놀랐어요. 어릴 때 성당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배웠고, ‘그렇지 뭐, 당연히 사랑이시겠지’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아닌 거예요. 사랑은 놀랍도록 구체적이었어요. 더 놀라운 일 이야기해 드릴까요?”
K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명동성당에서 자선단체 후원 미사를 갔다가 성령기도라는 것을 받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많이 힘든 중에 생애 처음으로 시간을 정해 새벽이면 기도하곤 하던 때였어요. 처음으로 성모님에 대한 신심도 생겨나서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던 때였어요.”
그러던 때였다. 나는 무릎을 꿇었고 예언 기도를 하는 은사를 받은 수녀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성령 기도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말로 흘러나왔다.
“어머니를 통해 네가 나에게 바치는 기도를 잘 듣고 있단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 세례명이 마리아이지만 성모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그 무렵에 처음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 언급하고 기도는 시작되었다. 수녀님은 생전 처음 보는 분, 그분이 내 사정을 알 리가 전혀 없었다.
“마리아야, 네가 요즘처럼 내게 기도하니 정말 기쁘단다. 네가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를 내가 얼마나 기쁘게 받고 있는지 네가 알아주었으면 한단다. 그런데 막상 네가 그렇게 아침마다 나와 만나게 되자 나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단다. 요즘은 아침에 날이 밝으면 설마 오늘은 네가 날 떠나는 건 아니겠지. 저번처럼 가서 다시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실은 두렵단다. 네가 또 한마디 말없이 나를 떠날까 봐. 떠나지 말아다오. 다시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다오."
뒤이어 다른 기도의 말이 울렸지만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쿵’하고 내려앉았다. 어떤 동네 총각도 이렇게 내게 사랑을 고백한 적은 없었다. 어떤 연인도 내게 이런 두려움을 솔직히 말한 적이 없었다.
쏟아져 내린 눈물은 성당을 나와 집으로 운전을 하고 오는 중에도 이어졌다. 그때처럼 많이 운 적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대체 왜 나같이 죄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랑이 거센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거센 비가 아니다. 그건 폭포수였다.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 내가 어떻게 그를 배신했고, 그리고 지금도 배신하고 있으며 앞으로 또 그렇든, 그는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막을 수 없는 거센 빗줄기 같은 사랑을 맞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바보 하느님, 멍청이 하느님!”
그러자 요한 1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7)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사랑, 그 사랑의 본질은 같은 것, 우리가 하는 사랑은 그로부터 왔기에 그것은 둘이 아닌 것이었다. 비로소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이 얼마나 인격적인 것인지 실감 났다.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은 둘이 아니기에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할 때 가지는 기쁨과 설렘과 고통과 질투와 혹여 그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가지고 계신 것이었다.(나중에 바로 이런 것들을 프랑수아 마리용 신부의 저서 <오직 사랑이신 하느님>에서 나는 확인했다. 다시 한 번 전율이 나를 지나갔다. 아니 그 책은 전율 그 자체였다.) 사랑이 크니 두려움도 고통도 더 클 것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얼마나 불성실한 연인인가.
내 눈의 눈물을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것은 내 비참함, 내 절망들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날을 아무에게도 결국은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에서 헤맸던가. 그 공포로 인해 얼마나 더 공격적이 되었던가. 그 두려움에서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될까 두려워 사랑을 망치고 나 자신을 망치던 나날이었던가. 그런데 여기 우주에서 가장 큰 분이 나를 향해 사랑을 호소하고 계셨다. 나 때문에,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배신하고 그분을 떠나 있을 때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보여 주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은 사랑하는 나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계신 거였다. 내가 말했다.
“제가 처음에 말했었죠. 저를 다 봉헌하겠다고. 그러니 책임지세요. 저를 맡으세요. 다시는 저를 놓치지 마세요. 제가 가려고 하면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저를 잡으세요. 그리니 이제부터 내가 당신을 떠나면 그건 당신 책임이에요.”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의 충격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 레너드 라루 선장이 마리너스 수사가 되어 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 어떤 것보다 더 큰 모험입니다.”라는 말이 어쩌면 그래서 더 이해가 갔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 나는 내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분의 것인지 아닌지 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이 그분의 소리가 아니라 내 소리라고 해도 괜찮았다. 어쨌든 그 소리로 인해 내가 더 성장하고 내가 더 평화로워지고 내가 더 하느님과 진리를 알고 싶어 하고 내가 더 그분 가까이 가고 싶어 하고 작은 글귀에도 감동받아 울컥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튼 그 기도 때문인지 하느님은 그 후 가끔 내 다리를 분지르셨다.
겨울바람이 우리 사이를 불어 가고 있었다. 나는 K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더니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공 작가님, 왜 이런 이야기를 책에 쓰지 않으세요?”
내가 정색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써요? 이상하잖아요. 이런 건 그냥......”
그건 겉으로 겸손한 척하며 하는 말이고 마음속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여성 작가들 중에서 논리도 좀 되고 나름 비판적이고 지성적인 소설가에요. 이건 좀 이상하잖아요.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다 그러는 것 같잖아요..
그러자 K가 다시 말했다.
“가슴이 뜨거워져요. 무언가 힘이 솟아나는 거 같아요. 다시 하느님께 다가가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이런 걸 써주시면 두고 보고 읽으면서 제가 식어 내릴 때마다 뜨거워질 수 있을 거에요. 꼭 써주세요. 꼭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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