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선물
정 석 – 서울 수서동 본당 신자
1) 1988년 가을
“덩, 덩, 덩더궁따, 덩, 덩더궁따” 사물놀이패의 풍악 소리가 파란 가을 하늘 위로 퍼져 올라갔다. 1998년 가을 어느 주일날 오후, 모처럼 부모님이 게시는 전주에 내려가 부모님과 주일 미사를 드린 뒤 서당 바자회가 열리는 학교 운동장에 갔다.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장터에 앉아 막걸리도 두어 잔 마시고 일어나니 술기운이 살짝 오르는 게 기분이 좋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징과 장구, 쇠와 북소리가 어우러져 파도치듯 밀려오는 농악 소리가 내 귀와 가슴으로 파고든다. “지잉~”하며 꼬리를 물고 퍼지는 징소리가 하늘로 흩어졌고, 그 꼬리를 따라 올려다본 하는은 더할 수 없을 만큼 파랬다. “참 좋다.” 혼잣말을 내뱉었을 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폴더를 열어 보니 ‘마님’ 헬레나였다. 헬레나의 목소리가 휴대 전화 너머에서 조금 떨리듯 건너온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반응성 애착 장애(5세 이전에 시작되는, 아동과 양육자 관계에서의 애착 문제가 아동의 다양한 발달을 지연시키는 장애)라네. 그러니까 말하자면 조금 경미한 자폐 증세라나 봐⋯.”파랗던 하늘이 순간 노랗게 변했고, 하늘로 피어오르던 흥겨운 사물 가락이 뒤엉켜 천둥처럼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전원이 끊어진 것 같은 멍한 충격에 휘청거리는 나를 겨우 붙잡고 이를 악물며 하늘을 향해 외마디를 뱉었다. “주님, 또 입니까?”
둘째 아이가 발달 장애로 판정됐다는 검사 결과는 내겐 날벼락 같은 충격이었다. 아기 때부터 생글생글 잘 웃고 뭐든 주는 대로 잘 받아먹던 아이였다. 엄마라는 말도 곧잘 따라하고, 텔레비전에 나와 소화제를 광고하던 개그맨이 “나 소화 다 됐어요”하는 것을 흉내 내어 “아 아 띠아오”하며 너스레를 떨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말수가 줄고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겠거니 하다가도 이상하다 싶어 검사를 받았는 데 결국 발달 장애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너무하신다 싶어 야속했다. 하느님이 미웠고 울컥 화가 솟구쳐 올랐다. “어찌, 두 아이 모두 이렇게 주십니까?”
2)1992년 겨울
1991년 12월 초 나는 헬레나와 결혼했고, 얼마 후 첫아이를 가진 것을 알았을 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는 9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아내 배가 점점 불러왔고, 엄마 배속에서 쿵쿵 발길질하는 아이를 손으로, 귀로 가만가만 느껴 보며 우리 부부는 서울 삼선동 작은 신혼집에서 매일매일 기도를 바치며 첫아이를 기다렸다. 예정일을 며칠 넘겨 산통이 시작되었고 동대문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첫아이를 낳았다. 분만실에 들어간 지 12시간을 넘겨서야 헬레나는 3.8킬로그램이나 되는 우량아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나오는 헬레나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짠했고 혼자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많이 미안했지만,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보며 웃는 헬레나가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산통이 워낙 심해서였는지 헬레나는 한동안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 간호사가 부를 때마다 절룩거리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왔지만, 그때마다 헬레나의 부은 얼굴에는 봄볕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했다. 건강한 아이를 주셔서, 또 고생이 컸지만 헬레나가 힘든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셔서, 오랜 시간 우리 부부가 매일매일 드린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져서.
첫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 간호사실에서 나를 찾았다. 헬레나를 병실에 두고 간호사실에 갔는데, 아이 아빠가 맞느냐고 확인하더니 이렇게 묻는다. “아이 다리를 보셨나요?” “아니요”하고 대답을 하는데 무언가가 ‘쿵’하며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불안한 예감이 온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간호사를 따라 신생아실에 들어가니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와, 새근새근 잠이 든 아기의 포대기를 풀어 다리를 보여 주며 말한다. “아이 다리가 클럽풋(내반족)이에요, 발목이 정상 아이들과 달리 안으로 굽은 상태입니다.”
커다란 망치로 사정없이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정신을 차리고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내일 아이를 데리고 정형외과에 가서 검진을 받으라고 한다. “예, 잘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신생아실을 나왔다.
바로 헬레나가 있는 병실로 갈 수가 없었다.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 병원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 몇 대를 연거푸 피웠다.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이게 꿈이었으면⋯‘하는 기대를 하다가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받아들이자. 하느님께서 무언가 뜻이 있으셔서 이런 일을 내게 주셨을 거야. 내가 지금 무너지면 안 돼. 난 아빠잖아. 헬레나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남편이잖아.”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난 뒤에야 병실에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우리 아이의 다리 이야기를 헬레나에게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헬레나는 아직도 퉁퉁 부은 얼굴의 환자였으니까.
다음 날 아침 신생아실에서 우리 아이를 받아 안고 긴 복도를 지나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 아이를 받아 눕히고 포대기를 펼쳐 다리를 살피더니, “우와. 이렇게 심한 녀석은 처음 보네” 하신다.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많이 심한 편인가요?” 물었더니 그렇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하며 남의 일처럼 대답한다. 그러고는 바로 첫 번째 석고 붕대 교정을 시작한다.
세상에 태어나 꼭 하루를 보낸 우리 아이가 새근새근 자더니 잠을 깼는지 입을 삐죽삐죽하기 시작한다. 의사 선생님이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니 금방 울음을 터트린다. 석고 붕대를 발목에 감고 심하게 비틀어 고정시키니 아이는 이제 자지러지게 운다. 그렇게 왼발, 오른발에 석고 붕대를 감아 고정시키는 동안 아이는 쉬지 않고 울었다. 옆에서 아이를 붙잡아 주던 나도 함께 울었다. “주님, 왜? 왜, 저에게 이런 일을 주십니까?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태어난 지 이틀째부터 두 발에 하얀 석고 붕대를 감아 교정을 시작했던 우리 아이. 그렇게 시작한 석고 붕대 교정은 처음엔 일주일, 그 후론 이 주일 간격으로 쉼 없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우리 아이는 태어난 다음 날부터 예쁜 하얀 장화를 늘 신고 살았다. 기저귀를 갈 때나, 옷을 입힐 때나, 목욕을 시킬 때마다 하얀 장화는 늘 거추장스러웠다. 무거운 하얀 장화를 번쩍번쩍 들며 해맑게 웃는 걸 보며 우리도 함께 따라 웃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엔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가끔 단단한 장화를 느닷없이 번쩍 드는 바람에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다. 석고 붕대를 교환하러 병원에 가는 날은 집에서 미리 석고 붕대를 풀고 가야 하는 까닭에 아이와 우리가 붕대를 푸느라 한바탕 씨름을 하곤 했다. 천사처럼 해맑은 얼굴의 우리 아이는 하얀 장화를 신고, 벗고, 또 신으며 쑥쑥 자랐다. 우리도 아이와 함께 자랐다.
3) 1993년 봄
아이가 태어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옮겨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 다리를 이러저리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은 대뜸 수술을 하자고 하신다. ‘아아. 수술이라⋯’ 가능하면 수술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제 갓 6개월 된 아기한테 수술이라니⋯.
1993년 5월초 어느 날, 우리 세 식구는 보따리를 싸서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소아정형외과 입원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방실방실 웃는 아이를 보며 헬레나와 난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려 애를 썼다. “그래, 받아들이자. 어차피 해야 할 수술이라면 해야지. 아이와 우리 부부가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겪어야지. 그래서 우리 아이가 씻은 듯이 낫는 다면, 그러면 됐지 않은가?”
수술 전날, 의사의 금식 지시에 아이는 젖을 먹지도 못한 채 링거 주사 바늘을 꽂느라 한 시간을 넘게 울어댔다. 손목, 발목 어느 곳도 혈관을 찾기가 어려워 결국엔 머리에 주사 바늘을 꽂았고, 아이는 밤새 배고픔에 울면서 날을 샜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서 부르는 대로 아이를 데리고 수술실로 갔다. 초록색 수술 가운을 입은 키가 큰 레지던트 선생님이 아이를 두 팔에 안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잘 참아 왔던 헬레나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만큼 오랜 시간을 불안하고 초조함 속에 기다리다가, 대기실 안내판에 아이 이름이 켜진 걸 보고 수술실로 내려갔다. 퉁퉁 부은 얼굴의 아이가 엄마를 알아보고 이내 울음을 터트린다. 수술을 한 부위에서 흘러내린 빨간 피가 하얀 석고 붕대에 배어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수술 후 빠른 회복을 위해선 가래를 뱉어 내야 하는데 어린아이는 울리는 수밖에 없다며 간호사는 나더러 아이 가슴을 자주 때려 주란다. 살살 때리면 아무 소용없으니 아프게 세게 때려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한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칠 때마다 채 여설 달도 안 된 어린아이는 아프다는 눈짓으로 아빠를 보며 운다. 참는다고 참는데도, 아들 가슴을 때리는 내 눈앞이 자꾸만 먹먹해진다. 그날 밤 40도 가까이 열이 오른 탓에 얼음찜질과 가슴 때리기로 우리 모두 꼬박 밤을 지새웠다.
첫 수술과 십여 일 동안의 입원 생활을 통해 우리 부부는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입원실의 아이들 가운데 우리 아이는 가장 경미한 경우였다. 척추를 수술한 아이, 고관절이 탈구된 아이, 사고나 선천적으로 성장판에 문제가 있어 뼈를 계속 자른 뒤 늘려 주어야 하는 아이, 그밖에도 많은 아이가 훨씬 더 심각한 증세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아이들 부모 역시 우리 부부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오랫동안 이겨 내고 있었다.
그 아이들과 또 그 부모들과 함께 병실에서 지내면서 우리만이 가장 힘든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와 똑같은, 아니 우리보다 훨씬 더한 고통을 세상의 많은 사람이 겪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왜 우리 아이에게, 왜 이 아이들에게, 또 우리 부모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실까?’
4)1996년 겨울
첫 수술을 무사히 마친 뒤에도 우리 아이는 몇 차례 더 석고 붕대 교정을 해야 했고, 고정된 신발이 달린 보조기를 신은 채 1~2년을 보냈다. 첫돌이 지나고 걸음을 걷기 시작할 무렵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금씩 안으로 걷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보조기와 훈련을 통해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안방에서 부엌까지 바닥에 스티커로 발자국 모양을 오려 붙이고 그 위를 따라 걷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고, 학교 운동장에 데려가 평균대 위를 걷게 하면서 걸음이 반듯해지기를 하루 하루 기도했다.
큰 아이가 그렇게 열심히 교정 훈련을 하며 쑥쑥 자라고 있을 무렵 우리 집엔 식구가 하나 늘었다. 1995년 11월 18일에 둘째가 태어나 우린 아들을 둘 가진 부자가 되었다. 둘째가 태어나던 날, 아이 다리부터 유심히 살피던 내 모습이 애처로워 혼자서 피식 웃던 생각이 난다.
보조기와 걸음 연습의 보람도 없이 큰아이가 다섯 살이던 1996년 12월에 두 번째 수술을 하게 되었다. 첫 수술 때야 달랑 세 식구여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번엔 겨우 돌 지난 둘째 아이를 어떻게 하고 입원해야 할지가 큰 문제였다. 할 수 없이 둘째를 전주 할아버지 댁에 맡기고 12월 16일 입원해서, 19일에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두 번째 겪는 일이라 조금은 담담했지만 다섯 살배기 어린 자식을 수술실에 보내는 일은 여전히 가슴 아린 일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부쩍 자란 우리 아이가 잘 견디어 냈고, 배속에 셋째를 가진 채 거뜬히 견디어 낸 헬레나와, 본인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가족과 떨어져 할아버지 집에서 열흘을 견디어 낸 둘째 아이 덕에 두 번째 수술도 무사히 지나갔다.
의사 선생님도 이제 더 이상 수술은 없을 것이라 했고, 보조기 착용과 반듯하게 걷는 연습을 꾸준히 한다면 아마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했다. 병원에서도 이젠 1년에 한 번 정도만 와서 체크하면 된다고 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겠지만 이제야 힘든 한 고비를 넘겼구나 싶었다.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주님, 당신께서 우리 아이를 통해 주신 선물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5) 1997년 여름
두 번의 수술을 마친 뒤에도 보조기 착용은 계속되었다. 잘 때는 물론, 걸을 때에도 무릎까지 올라오는 보조기를 차야 해서 싫다며 떼를 쓸 때도 있었지만 잘 참아 주었고, 걷는 연습도 열심히 하였다. 유치원에 들어갈 만큼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둘째도 무탈하게 잘 자랐다. 아무런 이상 없이 태어난 둘째 아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1997년 여름에는 셋째가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셋을 둔 대가족이 되었고, 세 아이로 북적대는 우리 집은 더없이 행복했다. 셋째가 태어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난 아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여러 이야기를 틈틈이 적어 내 홈페이지에 올렸다. 기저귀를 접던 이야기, 세 아이를 골고루 사랑하기, 아이들의 말 배우기, 막내의 재롱 이야기까지 모두 스무 편의 아빠 일기를 썼다.
그때만 해도 아빠가 육아 일기를 쓰는 게 흔하지 않아서인지, 신문사에서 우리 집에 취재를 와서 대문짝만하게 기사로 내보낸 적도 있었다. 아빠 일기의 한 부분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큰아이가 깜짝 놀라며 교과서를 펴 보여 주기도 하였다. 힘들기도 했고, 늘 번잡했지만 참 행복했다. 셋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고 학교에 보내 가르칠 일을 생각하면 까마득하고 더럭 겁이 나기도 했지만,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시겠지’ 하는 배짱으로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오늘 하루에 충실하자 마음먹었다.
6)다시 1998년 가을
1998년 봄, 큰아이는 유치원 최고 학년이 되었고, 둘째는 네 살, 막내는 두 살이 되었다. 막내는 말이 두 살이지 아직 돌도 되지 않았고, 둘째도 두 돌이 막 지난 어린아이였다. 수술을 두 번씩 했던 형과 갓 태어난 어린 동생 틈바구니에서 둘째는 아무래도 관심을 덜 받았던 것 같다. 태어날 때도, 또 자라면서도 늘 순둥잉서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지 않은 착한 아이였다.
그런데 두 돌이 지날 무렵부터 조금씩 이상 행동을 보였다. 우선 떼가 많이 늘었다. 순둥이가 아니라 떼보로 변신을 했다. 엄마가 막내를 안고 있으면 달려와 자기를 업어달라고 울어댄다. 집안 곳곳을 뒤지며 쏟고, 엎고, 붓고 해서 온통 엉망을 만든다. 잠시 조용하다 싶어 가 보면 화장대 서랍을 연 뒤, 딛고 올라가 화장대 위 엄마 로션을 꺼내 뚜껑을 열어 이곳저곳에 쏟아 붓고 있다. 식구들이 낮잠을 자는 틈에 온 집 안에 베이비파우더를 뿌려 눈 바다를 만드는가 하면, 제 형이 아직 풀지도 않은 학습지를 찢어 형한테 얻어맞곤 했다.
친구네 가족들과 자연 휴양림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저녁 해가 질 무렵 다들 끼리끼리 모여 앉아 놀고 있는데, 이 녀석만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혼자서 어둑어둑한 계단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어 다들 깜짝 놀랐다. 바닷가에 놀러갔을 때도 그랬다. 다른 아이들은 모래성도 쌓고, 파도를 피해 깡충깡충 뛰며 노는데 둘째만 저만치서 혼자 우두커니 서서 바닷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결이 다가와 발을 적셔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마냥 서 있는 걸 보고 다들 사색형 어린이라며 웃고 넘겼는데, 뭔가, 뭔가 불안한 느낌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해 가을 둘째는 몇 번의 검사를 받았고, 결국 우리 둘째가 발달 장애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심한 자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열심히 치료하고 훈련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언어 치료를 시작했고, 놀이 치료, 미술 치료가 이어졌다.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기도드렸다. “하느님, 우리 아이를 씻은 듯이 낫게 해 주세요.”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바라던 응답을 얻지 못했다.
7) 2001년, 그리고 그 후 10여 년
2001년 1월,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 하나를 또 받았다. 아들만 셋이던 우리 집에 예쁜 공주님이 태어났으니 참 귀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큰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둘째는 유치원 최고 학년, 셋째는 다섯 살, 그리고 막내 공주님이 한 살, 정말이지 아이들로 가득한 집, 대가족이 되었다.
그 무렵 헬레나는 ‘기쁨터’라는 작은 모임에 들어갔다. 1998년 말 발달 장애 아이를 둔 엄마들이 처음 기도 모임을 시작했고, 이듬해 봄 일산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활동을 시작한 단체다. 발달 장애 아이를 둔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고 힘을 모아, 발달 장애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된 뒤에도 사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처음엔 낯설기도 했고, 장애 아이를 둔 가족 모임의 일원이 된다는 게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했지만, 지난 10년을 헬레나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기쁨터의 구성원으로서, 한 가족으로서 그들과 함께 살아오고 있다. 기쁨터 식구가 된 뒤, 번쩍 정신이 났던 순간이 있었다. 기쁨터 홈페이지에서 아래 글을 처음 읽을 때였다.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HOLLAND)
나는 종종 장애아를 키우는 경험에 대해 얘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과연 장애아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아기를 갖게 될 때, 그것은 마치 이탈리아로의 멋진 여행을 계획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한 뭉치의 안내 책자를 사고, 굉장한 계획을 세우지요, 원형 경기장도 가 보자, 미켈란젤로의 그림도 봐야지, 베네치아의 곤돌라는 또 얼마나 좋을까⋯. 또 당신은 이탈리아에서 써 먹을 몇 개의 간단한 문장도 연습을 하겠지요. 이 모든 것은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몇 달의 간절한 기다림 끝에 출발의 날이 옵니다. 당신은 가방을 싸서 출발을 하지요. 몇 시간 후, 비행기가 착륙을 합니다. 여승무원이 말합니다.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네덜란드라고요?!? 지금 네덜란드라고 했어요? 나는 분명히 이탈리아에 간다고 예약을 했는데, 나는 지금 이탈리아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내가 이탈리아에 가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고대해왔느데!” 그러나 비행 계획에 변화가 생겨서 네덜란드로 온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끔찍하고 혐오스럽거나 더러운 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근, 질병으로 가득한 곳도 아니고요, 그저 다른 곳일 뿐이지요. 당신은 이제 나가서 새로운 안내 책자를 사야 하고, 전혀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하고, 이전에 전혀 만나 보지 못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됩니다.
그러나 ⋯ 여기는 단지 다른 곳일 뿐입니다. 이탈리아처럼 현란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모든 것이 이탈리아보다는 천천히 진행되지만, 얼마만 지나고 나면 당신은 한숨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게 됩니다. 그러면 네덜란드는 풍차가 있고, 튤립이 있고,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있는 아름다운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은 다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와서는 잘난 체를 하고, 자기들이 거기서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냈는지를 자랑합니다. 여생 동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요. 나도 거기를 가려고 했어요. 그렇게 계획을 했지요.” 그리고 그 아픔은 잘 없어지지가 않지요. 이탈리아로 가는 꿈을 못 이룬 것은 아주 큰 상실감이거든요. 하지만 당신이 이탈리아로 못간 것을 계속 슬퍼하기만 하면, 당신은 매우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아름다운 네덜란드 말이에요.
- 에밀리 펄 킹슬리(Emily Perl kingsley)의 글 중에서
이 아주 짧은 글은 둘째아이를, 또 첫째아이를 내 기대, 내 소망과는 조금 다르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깨우침을 주었다. “내 계획과 하느님의 계획은 다르구나.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셔서 내게 이런 선물을 주셨구나.”
기쁨터 가족들은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두 아이 모두 발달 장애아로 받은 부모에게서 나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안고 가는 힘겨움을 본다. 장애를 가진 형제나 자매를 둔 기쁨터 아이들과 매년 여름 캠프를 하면서, 엄마 아빠의 관심을 온통 형에게, 오빠에게, 동생에거 뺏기고 자란 소년소녀들의 텅 빈 가슴을 보게 된다. 깊어가는 가을 저녁 여의도 KBS홀에서 열리는 조이 콘서트의 합창 무대에 설 때마다 기쁨터 가족들의 하나된 마음과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터 친구들의 연대감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아이의 장애를 발견하고 슬픔과 절망으로 무너졌던 엄마들, 돌봄이 필요한 발달 장애아를 세상에 남겨 두고 먼저 가는 것이 가장 두려워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죽는 것’이 소망이라는 엄마들이 하나 둘 모여 작은 기도 모음으로 시작해서 함께 꿈꾸고 키워 오고 있는 기쁨터가 말 그대로 기쁨이 가득한 공동체로 자라고 있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다. 장애 아이들이 부모들의 돌봄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고 이루는 데 나도, 우리 가족도 함께 참여하게 되어 기쁘고 도 감사하다. 기대했던 이탈리아는 아니지만, 참하고 아름다운 나라 네덜란드로 초대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8) 2012년 봄
2012년 나는 우리 나이로 51세가 되었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숫자만큼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의 삶부터가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었다. 아직 그 끝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태어나고 자라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맞은 뜻밖의 사건들, 고통과 좌절의 순간들을 그땐 이해할 수 없어 원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기르고 단련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안주하지 말고 한걸음 더 내딛어 새로운 세상을 보고, 당신께서 바라시는 그 세상을 이루는 데 함께하라는 이끌어 주심이었다. 사랑하는 배우자 헬레나를 만난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이었다. 우리 부부에게 네 아이를 주신 것은 더 큰 선물이었고. 내게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본다.
“너만, 네 가족만 생각하지 마라. 세상의 이웃들, 힘든 이웃들도 생각하라.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나누며 함께 살아라. 내가 바라는 참 좋은 세상을 이루는 일에 함께 참여하라.”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이 모든 삶, 또 앞으로 나를 이끌고, 보여 주시며, 함께해 주실 모든 삶까지 그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다.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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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뵌 후의 작은 변화들 / 유희석_서울 명동 주교좌 본당 신자 (0) | 2015.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