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신앙 유산
하창호 – 군종교구 삼위일체 본당 신자
서해안에서 지휘관으로 야간 해안 순찰을 하던 중 간병인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상태가 안 좋으시니 다녀갔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심각하거나 위독한 상황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떤 생각에 이끌려 간병인 아주머니께 “어머니 귀에 휴대전화를 대어 달라”고 했다. 침묵 중에 숨만 쉬고 누워 계신 지 6개월, 내 말을 알아들으시리라는 믿음은 없었지만 꼭 들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어머니께 말씀을 올렸다. 그 동안 군인이라는 이유로, 지휘관이라는 핑계로 어머니께 너무 소홀했던 저를 용서해 주시라고, 죄송하다고⋯. 그리고 돌아오는 토요일 11시까지 병원으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짧지 않은 불효자의 고해성사가 끝났지만,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작은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를 마치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복받치는 무엇에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너무했다는 미안함이 나를 어쩔 수 없게 했다. 차량 내부, 둘만의 공간에서 침묵으로 운전을 한 운전병에게도 미안했다.
우리 어머니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어머니는 일본인들에겐 아버지를 잃었고, 공산주의자들에겐 언니와 동생을 잃었다. 어머니 시대는 누구나 같은 환경이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그것도 전쟁으로 중단했다.
처녀 시절,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착한 심성과 아름다운 용모로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곳에 주둔한 군부대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전쟁 통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슬픔이 가득했던 시기, 내 아버지는 황해도 해주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부모를 잃고 월남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고향을 되찾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로 군에 지원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어머니에게 반한 아버지는 자주 어머니 집안을 도왔고 그것이 가난한 집안 딸의 운명이 되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만남. 부부로 살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두 분의 만남은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했다. 부모를 잃은 슬픔과 분노로 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했고, 내면의 분노를 어머니에게 발산했다. 밤마다 어머니는 두려움에 떨었다. 가난한 가정에 자식이 많다고 두 분 사이에 5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둘은 어머니 배 속에서 죽었다. 내 밑의 동생도 어머니의 용기와 헌신이 없었으면 세상을 볼 수 없을 뻔 했다. 어머니는 죽은 두 동생을 생각하며 평생을 속죄하셨다. 어머니는 늘 묵주 기도를 바치셨는데 그 기도 지향은 두 자식의 영혼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과 남은 우리 자식의 앞길을 축복하고 기원하는 것이었다.
행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우리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든든한 울타리요. 희망이었다. 아버지의 술에 취한 행동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몇 번씩 집을 나갈 생각을 하셨지만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고 회고하셨다. 나는 시골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 고등학교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차마 아버지에게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어느 날 어머니께 내 뜻을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내 눈을 한동안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리곤 아무 말씀 없이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셨다. 어느 날, 평소 아버지 앞에서 말도 잘 못 하시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나를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내야 한다고 조리 있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놀란 기억이 있다. 몇 번의 큰 소리가 집안을 긴장시킨 후, 나는 원하던 고등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탈출! 내게는 그것이 그런 의미로 다가왔지만, 내가 떠난 후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인고의 삶을 어머니 혼자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서야 나는 깨달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평범한 시골 학생이 세상에 대한 꿈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태몽 이야기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낙심하거나 나태해질 때마다 “너는 태어날 때 성모님께서 축복해주셨다. 큰 사명을 네게 주셨으니 믿음을 굳게 하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하셨다. 어머니의 이 말씀은 어린 내게 세상에 대한 사명감을 인식시켜 주었고, 젊은 시절 많은 유혹과 나태함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큰 병에 걸렸다. 당시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마재에 살았는데 서울 청량리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바오로병원에 입원했다. 병 상태가 약화되던 어느 날, 옆 병상에 아주머니가 내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하시자 어머니는 곧장 성당으로 달려가셨다. 그리곤 눈물로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그날 새벽 갑자기 수녀님이 내 병실에 들어오셨고, 내 이상 상태를 발견하곤 의료진을 비상 소집하셨다. 그날 아침, 아주 특별한 수술이 진행되었고 나는 다시 살아났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편안함을 포기하셨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능했던 내 고등학교 유학, 그 행복한 기간이 중반에 접어들던 2학년 1학기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뜯어보니 거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쓰여 있었다. ‘.... 집안 사정이 더 기울어서 기숙사 비를 포함한 유학비를 지원할 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와서 주변에 있는 학교를 다니든지, 일을 하면서 야간에 공부를 하든지 하라’는 내용이었다. 청천벽력! 절망에 빠진 내게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평소 먼 길을 떠나보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 몇 번의 시외버스를 바꿔 타며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위로한 후 바로 교무실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셨다. 선생님을 만나신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아들을 도와달라고 애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선생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나를 위해 어머니는 당신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셨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내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어머니는 노년에 나와 함께 살길 원하셨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대답을 피했다. 어머니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군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를 모실 형편이 못 된다고 어머니를 사설 요양원에 맡겼다. 어머니를 맡기고 돌아서는 나를 어머니는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길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평생을 어머니는 내 입장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처절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을 사랑하셨던 어머니가 지금 저렇게 누워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데, 그 아들인 나는 몇 달째 어머니를 잊고 살았던 것이다.
토요일 아침, 나는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올라가면서도 어머니께 말씀드린 ‘11시’라는 시간 약속에 대해 마음 깊이 새기지 않았다. 그래서 12시 즈음 도착할 예상으로 그 정도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운전 중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운전하는 나를 대신하여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엄마가 11시 정각에 세상을 떠났다.” 가슴이 먹먹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이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아! 어머니, 이렇게 떠나시면 안되는데... 아직 나는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입관 때 어머니의 몸을 보면서 너무 미안했다. 지금까지 저런 몸으로 어떻게 살아계셨을까? 누구를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신 것일까? 무심한 아들을 저렇게 기다렸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죄송했다. 이런 무심한 자식이 뭐가 그리 소중해서.....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곳에 다 계실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글이 생각났다. 그랬다.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신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셨다. 그래서 평생을 사랑으로 사셨고, 떠나시면서 당신의 그 한없는 사랑을 세상에 남기셨다. 며칠 전 어머니를 모신 납골 묘원에 다녀왔다. 몇 달 만에 찾아간 길이라 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늦게 왔음을 꾸중하실 것 같아 겨우 바라보았는데 웃고 계셨다. “괜찮다. 네 입장을 다 이해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나를 신앙으로 이끄신 분이다. 나에게 유아 세례를 시키셨고, 성당 복사는 물론, 견진성사까지 시키셨다. 어머니를 통해서 얻게 된 가톨릭 신앙은 어머니와 나의 삶을 가치있게 이끌어 주셨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알게 하셨고 그것을 위해 속세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내적인 용기를 전해주셨다.
나는 안중근(토마스) 장군을 존경한다. 그분은 평화를 사랑했고 국민 계몽을 통해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길 원하신 참 군인이셨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신앙을 지니신 참 신앙인이셨다. 특히 그분이 그러한 참 군인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조 마리아께서 물려주신 신앙의 힘 때문이었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은, 그분의 참된 신앙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군인은 국민과 국가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위태로울 땐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 신앙은 군인인 내게, 어머니 최수산나가 물려주신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가톨릭 신앙은 나와 아내를 살리고, 내 아이들을 살렸다.
부족함 투성이인 나를 무조건 사랑해주신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이 지니신 참 신앙을 생각한다. 그 신앙을 이 땅에 전해주신 신앙 선조들께도 감사한다. 이벽(세례자요한), 이승훈(베드로), 권철신(암브로시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정하상(바오로) 등과 수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께도 감사와 존경을 올린다.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내게 신앙의 믿음을 굳건히 할 선물을 주고 떠나신 어머니, 어머니의 소중한 유산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어머니 최수산나가 천국에서 하느님과 성모님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사시길 기도드린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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