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게 읽는 족보
모름지기 가톨릭 신자라면 “성경 한 번은 읽었다”고 체면치레할 요량으로, 크게 그리고 단단히 작심하고 창세기를 펼쳐 읽다가 그만 몇 장 넘기다 멈추고 만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걸림돌은 다름 아닌 ‘족보’다.
창세기 5장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족보! 일견 도무지 왜 읽어야 하는지 뜬금없게 보이기만 한다. 그러나 그 기능은 심오하다. 그리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눈이 열리면, 그 대목이 외려 더 재미있게 읽혀진다. 족보는 역사의 계승, 곧 연속성을 드러낸다. 모든 것에는 대물림이 있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해서, 족보는 후대의 어떤 사건이나 사태를,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원인론적으로 규명해 준다.
그렇다면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가계를 소상히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의 족보는 무엇을 원인론적으로 밝히려 했을까. 한마디로, 노아시대의 사회적 적폐, 곧 죄의 창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해명하고 있다. 아담의 10대손 노아가 살던 시대에는 벌써 죄가 세상에 만연했다.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창세 6,5)졌고,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창세 6,11).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을까. 그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족보다. 노아에서 출발하여 족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아담과 하와의 원죄까지 소급된다. 족보는 오르막으로 읽을 수도 있고 내리막으로 읽을 수도 있다. 다시 아담에서부터 족보를 내리막으로 읽어보면, 아담과 하와의 죄는 곧바로 카인과 아벨 사이의 살인으로 이어진다. 점점 죄가 악독하게 확산된다. 이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노아 시대의 무법천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하늘을 찌른 역겨움
내친김에 노아 시대에 만연했던 죄의 심각성에 주목해 보자. 이는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창세 6,2 참조)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 ‘하느님’은 거룩한 분을 가리키고 ‘사람’은 거룩하지 않은 존재를 말한다. 이러한 대조에 두 번째 대조가 추가된다. 즉, 고대문명의 배경에서 ‘아들’은 귀하고 ‘딸’은 비천하다는 구별이 가세된다. 이렇게 ‘사람에다 딸’이니 얼마나 문제인가. 결국 이런 수사학적인 대조법은 ‘하느님의 아들들’로 묘사된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신앙인)이 ‘사람의 딸들’로 표현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비신앙인)에게 홀려서 결혼을 하여 신앙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폭로하고 있다. 이리하여 신앙이 비신앙에 묻히고, 화평이 폭력에 짓밟히고, 하느님의 지혜가 세상의 지식에 능멸당하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역겨움의 오사리잡탕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저러함에 하느님은 크게 후회하시며(창세 6,6-7 참조) 홍수로서 판갈이 하기로 계획하신다. 이리하여 전개된 노아의 방주와 홍수, 그리고 무지개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굳이 장황한 재탕은 필요치 않으리라.
■ ‘그대로’
여하튼 하느님은 방주를 손수 기획하시고, ‘남을 자’로 노아 일가를 선택하셨다. 노아는 하느님 눈에 쏙 들었던 인물이었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창세 6,9).
어떻게 하면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그대로’에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난데없이 방주를 만들라 지시하셨을 때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보면 금세 드러난다.
“노아는 그대로 하였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창세 6,22).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창세 7,5).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창세 7,9).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문장들은 노아가 주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노아가 하느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결정적 이유였다. 순명!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순명하되,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설계도에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실행하였다. 심지어는 창문의 위치와 크기까지도 분부하신 대로 따랐다. 그대로!
어려움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기 시작하자 세상 사람들은 나이가 600살이나 되어 노망하였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로 비웃고 조롱하였다. 하지만 노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지시에만 순명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방주에 오를 때도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올 때도 오로지 하느님의 명령대로 따랐다. 노아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받았을 때(창세 7,1 참조) 들어갔고, 이미 땅이 말랐음을 확인하고도 두 달이 넘어서 “방주에서 나와라”(창세 8,16 참조)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인류는 무지개 약속을 받게 되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창세 9,13).
노아는 증언한다.
나는 무지렁이, 왕따 인생.
사람들은 나를 등신, 쪼다, 멍청이라고 불렀소.
앞뒤가 꽉막힌 밥통, 옹고집이라고도 불렀소.
그러거나 말거나 내겐 ‘그대로’가 생존철학이었소.
허허, 그대들은 아시오, ‘그대로’가 나를 살렸소.
분부하신 ‘그대로’ 행했더니, 우뚝하니 방주가 되었소.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따랐더니, 이윽고 홍수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소.
나는 보았네. 죄와 타락의 세상 위에 떠서 하늘로 뻗쳐 있는 7색 휘어짐.
또 보았네. 저녁 위에 떠서 새 아침에로 이어진 그 자비의 오로라.
단지 ‘그대로’ 좇았을 뿐인데, 쏟아진 축복은 차고 넘쳤네.
그대로! 쉬워 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그대로! 어려워 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
■ 향내 나는 제사
홍수가 지나가고 노아가 땅으로 나와 첫 번째로 한 행동은 ‘곧바로’ 제사를 드린 것이었다(창세 8,20 참조). 거기서 ‘향내’가 났다(창세 8,20-21 참조). 향내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 자주 나오는 말인데, 예언서에서는 거꾸로 ‘역겨운’ 제사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이렇듯 제사에는 ‘역겨운 제사’가 있고 ‘향내 나는 제사’가 있다. 무엇이 향내 나는 제사인가? 노아를 대신하여 호세아 예언자가 답한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 다오”(호세 6,6: 공동번역).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노아가 바쳤던 것은 온 사랑이었던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87)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4) - 노아의 ‘그대로 영성’
분부하신 ‘그대로’ 따랐더니, 무지개가 떴소!
발행일 : 2014-10-12 [제291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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