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수녀님의 구약노트 1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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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혜윤수녀님 의 구약노트
1강
이번에 제가 준비한 프로그램은 구약노트라는 제목입니다. 제 책 중에 ‘구약성경 통권노트’ 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경이 굉장히 분량이 많은데 또 시대적인 편차도 너무나 크고, 예를 들어서 신약성경 같은 경우는 신약성경전체가 27권인데요, 50년 안에 이 27권이 다 쓰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기록된 것만 1000년이예요. 그런데 그전에 이미 내용들은 제작이 되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는 제작기간을 2000년 혹은 3000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요약노트를 준비 했었던 건데요,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26시간입니다.
이 방대한 분량을 일반적으로 4파트로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 해당되는 책들을 모세 오경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그룹에 해당되는 책들을 역사서.
세 번째 그룹은 시서와 지혜서,
네 번째 그룹은 예언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4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6시간씩 할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분류
1 모세오경
2 역사서
3 시서,지혜서
4 예언서
그래서 모두 24시간을 쓰게 되구요. 나머지 두 시간은 성경여행스케치 수정 증보판 중에서 꼭 필요하겠다 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하는 것으로 진행하고자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과 다음 주 두 시간은 구약노트 들어가기 이전의 준비작업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라는 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명제인데 이것이 추구하는 바를 저희가 잘 살아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것을 다시 한번 짚어보는 것으로 오늘 시간 진행을 할 겁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저는 두 가지 주제를 따로 보겠습니다. 생명이라는 주제와 말씀이라는 주제가 되겠습니다.
먼저 생명에 대한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요즘 대세어가 무엇입니까? 하고 말씀을 드리면 거의98프로에 해당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힐링이요’ 이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몇 년 전만 해도 같이 더불어 잘 살자 라는 느낌의 웰빙이라는 단어가 대세어였는데요. 힐링 이라는 건요, 아주 구체적으로 이 상처를 요걸 집어서 이걸 낫게 해주세요. 이런 거거든요.
제가 볼 때는 한 십 년 동안 계속 이렇게 바뀌는 대세 말고 부동의 1위로 등장하는 대세어가 있습니다. 저는 그걸 자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자꾸 피하려고 하는데요. 오히려 힐링이나 치유나 테라피나 이런 것 보다 더 훨씬 더 우리주변에 심각하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세대가 가장 갈구하고 해결해야 되는 문제가 뭘까, '생명'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됬습니다. 누구나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원래 생명이라든가 힐링 이라든가 이런 단어들은요 종교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했었던 단어 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점차적으로 세속화되고 종교의 기능이 무기력화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대세어는 종교의 간판어휘들을 가지고 와서 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렇게 생명에 대한 갈구, 또 그게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자살문제 이런 일들이 왜 발생을 하나 한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가장 용서 못하는 사람들이 있대요. 그게 어떤 사람이냐?, 무능한 사람이랍니다.
사회가 나름대로 결정한 능력에 적합하면 유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되죠. 그래서 자기는 이걸 잘하는데 세상은 다른걸 원하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어지는 겁니다. 계속 사회의 기준과 조건에 맞추다 보니까 내가 상실되는, 내가 없어지는 일들이 발생하는 거죠. 사회가 만들어내는 규격화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나는 없어지는 이런 상황이 되는 건데요.
두 번째로 또 용서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조직에서 튀는 사람입니다. 개성 이라던가 자기 나름대로의 캐릭터를 정직하게 살고자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맘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만 자유롭게 하니까 감시망이 ‘너는 왜 그렇게 하는데?’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나를 계속 죽이다 보니 나중에는 죽일 나조차도 없게 되 버리는 거죠.
시청자들이나 방청객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화가 나거나 아니면 무기력하고 힘이 드는지..사실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조직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살려냄으로써 사회는 움직이지만 그 안에 구체적인 일원들은 대부분 이렇게 병 들어가는 상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에서 제가 여성의 입장으로 말씀 드리면, 여자가 튀면 더 많이 혼나지요. 여자가 왜 이렇게 튀냐 그러니 여성분들은 사실은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으시게 되는 겁니다.
니체는 ‘인간에 대한 모든 규제는 삶에 대한 강렬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하는데 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삶의 감각들, 생명들 이런 것들을 규제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변사람들이 무기력할 때 기득권자들이 더 마음대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러다 보니까 어떤 일들이 벌어지냐 하면 나를 억압하고 더 많이 노력을 하고 사회가 인정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는데 잘 안되고, 이러면서 대부분 무기력해지고. 무기력해지니까 사람들은 더 불안할 수밖에 없죠.
더 불안한데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이 불안한 민생들을 구원해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들을 원하게 됩니다. 그런 지도자들을 우리가 뽑는 거예요. 근데 그 지도자들이 뽑히게 되면 무기력한 상황에서 자기가 최고 통수권을 갖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것은 대부분 강한 독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체제가 무너질 거 같은 느낌이 들면 강한 사람들은 더욱더 강하게 사회를 규제하게 되죠. 이래서 나오게 되는 증상들이 있습니다.
부정적 증상으로 두 가지 정리가 됩니다.
첫 번째는 내가 다 그냥 감싸 안고 나만 죽으면 되지, 이래서 아버님들 자살율이 참 많다고 합니다. oecd국가들중에서 자살율이 제일 높다 라는 걸 아주 잘 아실 거 구요. 남성들의 자살율이 여성보다 두 배가 높다고 합니다. 그냥 아빠가 다 짊어지고 없어지면 되쟎아.. 너무 어려우신 거죠.
두 번째는요, 좀 부족한 사람들의 행태인데요.
자기가 강한 세력한테 인정받지 못하고 억압을 당하니까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게 폭력이죠. 여성들을 폭행한다거나 아니면 애기들, 근데 이건 남성들만이 아니라 엄마들도요,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들은 애기들이거든요.그니까 결국 억압의 대상이 가장 사랑을 줘야 되는 엄마가 되기 때문에 심지어는 아주 강력한 사건들도 벌어지죠. 고등학생이 엄마에게 대들거나 혹은 아주 극단적인 사건이죠. 그런 것들도 벌어집니다.
근데 그 고등학생이나 엄마의 문제이기 전에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사회전체가 구조적으로 한번 봐야 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볼 때는 제일 약한 존재로 지금 대한민국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여자이면서 아기인 우리 초등학생 딸들이죠.
그래서 그런 범죄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건 죽어도 있을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 범인들도 자기가 잘못했고 죄 지은걸 아니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애기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제들이 점점 더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갈구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왜 이런 일이 발생 하는지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해봤는데요. 그냥 단순히 나쁜 사람들이 더 이상 범행을 못하도록 무섭게 제도적으로 형벌을 줘야 된다, 이런 거 이전에 조금 더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조금 식상한 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그 방법을 신앙밖에는 길이 없다 라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그래, 이렇게 부조리하고 부패하고 모든 것이 정당하지 못하고 이런 거를 그냥 신앙으로 승화해서 참고 견디면 되라는 그런 옛날부터 들어왔던 식상한 말을 지금 다시 하는 거냐! 그래서 무기력한 우리를 더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자 여기에서요, 필요한 것은 체험입니다. 저희가 신앙으로는 이런 문제들 이렇게 처리합니다라고 이론적으로 소개를 해드리는 거거든요. 근데 그걸 우리를 더 무력하게 만드는 안 좋은 이론인지 여부는 본인들이 체험을 통해서 인식하시면 그게 그분의 지식이 되는 겁니다. 나는 여러 방법 중에서 결국 가톨릭교회가 얘기하는 이 신앙의 방법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다. 그런 가르침도 받았고 내가 체험을 통해서 확인한바 나는 그 가치관으로 살 것이다. 이게 여러분들의 응답이 되셔야 되는 거겠죠.
신앙이라는 게 뭐냐 면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여기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런 일 안에서 하느님이 추구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그분의 뜻을 파악하시고 그 뜻을 파악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2012년10월11일부터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해를 지내고 있죠
근데 신앙의 해 라는 게 뭐냐 하면요. 이미 신앙을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그 신앙을 살지 못하는 그분들을 위한 새 복음화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의 해의 아주 본질적인 대상은 바로 세례 받은 우리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신앙의 해와 함께 교황청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제안하신 부분이 뭐냐 하면 2차 바티칸공의회의 여러 문헌들에 대한 종합 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서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라는 책인데요.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이 책이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으로 살아야 하는지 이론적인 부분에서 최대한 정리하고 있으니 이걸 한번 다시 보자 이런 제안을 바티칸에서 하고 계십니다.
가톨릭 교리서 26항에 나와있는 신앙에 대한 정의를 제가 다시 한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신앙이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내어 주시며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왜 이렇게 세상을 끌어가고 있는지 그 의미와 가치,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저희에게 알려주신다는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신다는 거고 그 뜻을 파악해서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이자세가 신앙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왜 이렇게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느냐? 교회가 이야기하는 첫 번째 원인은요,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거죠.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안 좋은 사건들,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악을 허락하시는가 그런데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기본원칙은 뭐냐 하면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 발생한 사건은 하느님이 없어서 고통의 사건으로 나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하느님은 악도 선을 위해서 이용하신 다는 거예요. 지금 이 고통이 굉장히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나에게 악이죠. 근데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로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악도 컨트롤 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강대국들 의 침입을 받거든요. 그리고 끊임없이 너무나 안 좋은 조건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근데 그런걸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아주 궁극적인 진실이 있다 라는 거죠. 그 진리가 있다 라는 거고 그 뜻을 파악했을 때 이제 나는 정말 생명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건 우리주변에 혹은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는 겁니다. 왜 이런 사건을 주셨는지,
얼마 전에 있었던 이야기인데요. 가톨릭교회 안에서 진행이 되었던 세미나인데 제목이 뭐였냐 하면요. 하느님의 뜻 식별세미나 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사실은 약간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파악한다 라는 게 몇 가지 테크닉적인 내용을 배움으로써 하느님 뜻을 식별하는 거라면 그 세미나만 들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있는거죠.
그런데 그런 몇 가지 조항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뜻이 식별되지 않습니다. 각자 다르게 하느님 뜻이 적용이 되고 각자 다르게 발생하고 그래서 하느님 뜻을 파악 하는 게 너무나 어렵거든요. 영성의 대가를 찾아가신다 하더라도 하느님 뜻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본인과 하느님과 만이 하실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 처절한 탄원과 찾음과 갈구, 갈망을 통해서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시는거죠. 그걸 알았을 때는 이제 더 이상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 악은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선물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주제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그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이라는 겁니다. 하느님이 이미 다 말씀해주셨다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 기록해 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저는 이렇게 소개해드립니다. 제가 볼 때 성경은 어떤 책이냐 하면요,
하느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 읽는 책입니다. 어찌해야 될지 모를 때 , 영성의 대가를 찾아가도 내가 답을 못 얻을 때 하느님 뜻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읽으셔야 할 책이 바로 성경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말씀해서 기록해놓으셨는데 그게 생명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은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한 책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기서 말씀에 대한 개념을 조금 정립 하셔야 되는데 말, 말씀하면 소리의 조합 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데요. 성경에서 얘기하는 말씀은요, 히브리말을 좀 쓰겠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다바르라고 되어있고 신약성경에는 로고스라고 되어있는데요. 둘 다 한국말로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장14절에 보면 이 말씀이 그냥 소리의 조합 이상의 것임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계신데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즉 이 로고스나 다바르 라는 이 말씀개념은 말씀이 곧 사람 이시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에만 있는 게 아니라 플러스 알파로 우리가운데 사셨다 라는거. 삶이 동반이 됩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말씀은 구체적인 현장성을 가지고 있어요. 삶으로 구현되는 거. 그래서 말씀 전파한다, 말씀 선포한다 이러시는데요, 말빨로만 선포하는 거는 뭐 앞으로 수 억년을 한다고 해도 복음화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구체적인 내 삶에 육화 되어야 하고 그런 구체적인 현실성과 실제성과 현장성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삶으로 전파하는 거 이게 말씀선포입니다.
만약에 ‘말은 소리다.’ 이렇게만 생각을 하시면 나오게 되는 문제가 뭐냐 하면 신앙이나 신학이나 교리 따로 삶 따로 이런 게 되는 거예요. 말씀은 좋은데 삶은 안 되는.. 그래서 저희 신학에서 보면 제도교회 현장교회 이런 말들이 있는데 저는 이것도 약간 모순이라고 봅니다. 교회가 두 개일 수 없거든요. 제도는 현장을 제대로 살게끔 하기 위해서 교회가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은 장치입니다. 근데 제도교회는 무지무지 화려하고 현장에서는 사람들과 제대로 연대하지 못하고 이런 것들 문제가 되죠.
하느님은 한 분 이시고 말씀도 하나이고 이 말씀은 곧 우리의 삶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뜻을 알게 되는데요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또 한가지 고민이 생기실 수 있는데요. “성경이 그렇게 두꺼운데 그 많은 것 중에서 내가 어떻게 지금 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인지 그거를 뽑아냅니까?”
네, 이런 고민들도 또한 있으셔서 교회가 미리 다 준비를 해드렸어요.
오늘이 연중 몇 주일이면 뭘 읽어야 한다, 이런 약속들이 교회역사 안에서 계속 있어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매일 적어도 두 개의 말씀 본문을 저희에게 배당을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가 말씀을 생명의 양식이라고도 하거든요. 양식. 그 말씀으로 오늘을 먹고 살아라 이겁니다.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즉, 말씀이 우리에게 양식이 된다라는 거죠. 사람이 밥을 안 먹으면 죽쟎아요. 그죠? 근데 말씀도 양식으로 배식이 되기 때문에 이걸 안 먹으면 저희도 죽을 수 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두 개의 본문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배식이 되냐 하면 미사 중에 전달됩니다. 독서에서 하나 읽으시고 복음에서 또 하나 읽으시쟎아요. 그래서 그 말씀으로 나는 생명을 되찾는 것이고 그것으로 살아가라 라는 것이기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면요, 저희가 힐링센터 안가두요. 사실은 가장 본질적인 힐링은, 치유는 아주 온 마음을 다해서 잘 준비된 미사 안에서 충분히 발휘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생명의 양식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누굴 만나봐도 답이 없고 그런데 그냥 뭐라고 할까요
절절한 그런 심정으로 처절한 독서를 하는 겁니다.
미사 가서 봉독자들이 읽으시게 되는데 그걸 보면서, 그걸 들으면서 ‘저 말이야말로 내가 파악해야 되는 내가 정말 인식해야 되는 하느님 뜻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요, 그 순간 더 이상의 치유는 필요 없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미사만으로도 충분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체사리오라는 교부와 암부로시오 교부말씀을 제가 소개해 드리려고하는데요
체사리오성인 “그리스도의말씀은 그리스도의 몸보다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게 성체성사거든요. 빵을 주면서 그 빵으로 생명의 빵을 먹는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 빵보다 말씀이 덜 중요한 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거예요.
암부로시오성인도 “우리가 성찬의 잔으로부터 성혈을 마시듯이 성경의 잔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체성사만 중요하고 말씀은 그냥 무슨 말씀을 읽었는지 뭘 어떻게 했는지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저희가 성체를 영할 때 이렇게 가루가 떨어질 때가 있어요 조각이 떨어진다거나..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다 드셔야 되죠. 왜냐하면 그 조각도 축성된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떨어뜨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이 말씀도 우리가 그 빵 조각 떨어지면 큰일나는 것처럼 말씀도 그냥 흘려버리고 땅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야말로 미사의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와 함께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나, 내가 왜 이렇게 이기적인가, 내가 왜 이렇게 못 됬나,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내나, 자 이런 부분은 뭔가 지금 소통이 안 된다는 거거든요. 대부분 화가 나는 이유는 하느님하고 소통이 안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 거든요. 하느님하고 소통이 되면 옆에서 아무리 화를 내고 자극을 주더라도 문제가 안됩니다.
요즘에 맨날 불통의 시대 많이 얘기하시는데요. 소통이 안 된다는 거죠. 제가 볼 때는 사람들하고 소통하려고 해 봤자 소통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을까? 내 안에 하느님과 소통하시는 방법 말고는 없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자극하고 나를 거슬리게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반응 안 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소통을 해야 되나? 많은 분들이 ‘아 이 부분에서 이 단어가 나에게 참 다가온다. 이 말씀 참 좋다.’ 자,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그 단어나 내용에 집중을 하시는데 우선 기본적인 원칙을 말씀 드리면 이 두 개의 본문은 서로 유리된 본문이 아닙니다.
오늘은 독서에서 여호수아기를 읽었고 복음에서는 마르코복음을 읽었고 이랬을 때 그냥 어쩌다가 두 개를 배치해놓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기가 막히게 연관성이 있는 본문들만을 교회가 선별해서 여러분들에게 양식으로 전해드리고 있는 겁니다.
근데 언뜻 보기에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런데 이 두 개의 본문 안에서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오늘말씀의 주제인 거예요.그래서 그것을 파악해내셔야 되는 겁니다.
저희가 하느님의 뜻이 교회 내에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공식적으로 들어온다 라고 보고요. 성경만큼 중요하게 하느님 뜻이 전달된다. 라고 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성전입니다. 성전. 교회의 전통도 하느님 뜻이 아주 굉장히 적극적으로 완벽하게 들어가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교회가 전통적으로 오늘은 이 복음과 이 독서를 읽습니다 했을 때 이게 그냥 교회가 만든 전통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 계시되어 있는 계시의 어떤 결과물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연적이다 라고 보시면 안됩니다.
신앙 안에서는 우연 이라는 게 없죠. 모든 것은 하느님 뜻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돌아가는 거 쟎아요. 그래서 이 두 개의 본문 사이에 연관성을 보셔야 되는데 저부터도, 성서를 가르친다는 전문가 입장에서 봐도 이 공통점을 찾아내기가 참 어려워요. 뭐가 도대체 연관 되어있는 것인지. 아주 깊이 좀 숙고를 하셔야 되는데
좋은 방법 하나는 화답송을 참고하시라는 겁니다. 화답송을 보시면 “아 지금 요 두 개의 본문에서 지금 연결되는 것은 요거구나!” 이렇게 대부분 문제가 풀리더라구요.
주일미사에는 복음과 독서를 2개를 읽으니까 3개가 되죠. 근데 제2독서는 연관성이 약간 떨어집니다. 그거는 저희 성서학계나 이런데서도 왜 연관성이 떨어지는지 정확하게는 지금 연구결과가 나와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제 1독서와 복음은 아주 기가 막히게 연결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0장 19절에서 2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즉 어떤 말씀이 나에게 생명일까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느님이 알아서 내가 얘기하겠다 라는 거예요.
네 그런 부분 보시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느님 뜻을 파악하는 건데 하느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있고, 교회는 성경에서 매일 양식을 배분해서 배식을 드리고 있는데 여기에서 묵상 방법은 두 말씀의 연관성을 보아야 하는구나’ 하고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물론 거기서 어떤 그 부분에서 깊이 묵상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칙을 모르신 채, “아 요 단어 굉장히 나한테 마음에 들어와” 하시는 것과 원칙은 알지만 ‘저는 오늘은 요게 훨씬 저한테는 당신 말씀 같네요“이러면서 묵상하시는 거’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도 계실 거 같아요. 나는 아무리 미사 참여해도 이게 뭐 말씀이 생명으로 확 다가오지를 않는데 이거 어떻게 되는 건가! 그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때와 시기와 장소와 모든 것은 하느님이 결정하십니다. 내가 결정 하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아주 극도로 절박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생명으로 거듭 나는 일이 그다지 자주 발생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사건도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사건이쟎아요. 근데 거기에서도 전제되는 게 있는데 뭐냐하면 아주 극도의 가난함이 선택된다라는 거에요. 말구유에 태어나시쟎아요 그죠? 추운밤에 어디 뭐 애기 낳을 데가 없어서 아주 절박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 조건에서만 말씀이 사람이 되실 수 있다는 거죠. 내가 만약에 아직은 그렇게 가난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것도 감사하셔야 되고 만약에 이렇게 절박해서 이렇게 가난해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나 하신대도 저희 신앙에서는 그게 절박함이라고 말씀 드리지 않고 그거야말로 말씀이 사람이 되는, 이제 내가 직접 네 안에 거듭 태어나겠다 라고 얘기하시는 그런 은총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 저희를 살리는 것이지요.
저희는 마침 기도로 계속해서 영광송을 할건데요 영광송이야말로 하느님의 세위가,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위가 세 개죠. 그래서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거라서 교회 안에서 가장 훌륭한 종결찬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영광송으로 마침기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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