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2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 송용민 신부님

김레지나 2012. 7. 6. 20:22

어떤 분이 제 블로그에 실었던 이 글을 스크랩하셨길래, 어떤 글인가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블방에 옮겨놓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대각선으로 읽고 틀 교정도 못하고 올렸었는데,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정말 마음에 들어서 제대로 손봐서 다시 올립니다.

투병일기만 읽다가 신물나신 분들께 쉬어가라고 선물합니다.

 

 

송용민 지음
 
신학 에세이4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책상 앞에 앉았다. 문득 가슴을 적셔주는 작은 생각들이 떠 올랐다. 나를 이렇게 살게 해주는 사람들의 얼굴, 아주 작지만 내게는 너무 큰 사람들의 손길과 웃음, 작은 말마디들이 내 가슴을 꿰뚫는다.

밀려 있는 과제들과 산적한 일들, 책임감으로 해야 할 코앞에 닥친 일들을 마주하면서도 내가 행복한 이유를 찾으려면 끝도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과 내가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부끄럽고 나약하고 때로는 초라해 보이는 내 모습과 달리 또 다른 나를 발견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비록 지금 내 모습이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최초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눈길과 마음은 내가 바라보아야 할 내 본래의 모습을 보게 해준다. 현실 속의 내 모습과는 다른 또 다른 나라는 괴리감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 인생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지듯이, 내 모습에 담긴 양면성이 언제나 나를 자괴감에 빠뜨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이가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서 힘들어한다.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내린 잘못된 선택에 좌절하고,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신을 저주하기도 하고, 자신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 때문에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인생을 한탄하기도 한다. 세상은 그들을 몰라준다. 그들의 능력과 재능도 모른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자신의 현실 밑바닥만 들여다 보게 된다. 하느님은 공정하지 못하신 것 같다.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세상에서 잘난 사람은 계속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그냥 못난 대로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조금은 정의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신앙은 인간의 행복 기준을 달리 바라보도록 한다. 물론 사람들이 찾는 행복이 신앙 안에서 찾는 행복과 다르지 않다. 편안하고 평화롭고 물질적인 곤궁에 시달리지 않고,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은 신앙인의 삶에도 중요하다.

 

  하지만 신앙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인생의 밑바닥을 바라볼 때다.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인정을 받는다 해도 정작 내면에 깊이 숨어 있는 기회를 얻고 인정을 받는다 해도 정작 내면에 깊이 숨어있는 부정하고 싶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신앙인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한다. 그런 기회를 만드는 일조차 싫어한다. 남들에게 간섭받지 않는 자기만의 시간을 찾고 있지만, 정작 홀로 있어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가정생활이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한 영역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길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찾지만, 그 시간에도 결코 홀로 있지 못하 는 탓이다.

 

  진정한 자기만의 시간이란 솔직한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다. 내 인생과 마주하고 내 삶의 의미를 묻고, 내가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그런 일이 피곤하고 해답이 없을 것 같다고 남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곳에 신앙인이 자리할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행복이 우리 삶에서 요원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 삶이 아직은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하느님을 만나 누리는 행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가치와 행복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찾는 일을 그만두어 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인생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 먹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신다. 그렇다 해도 그런 인간적인 것들이 결코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 주지는 못한다. 물질은 우리가 사는 데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인간의 행복은 그런 물질의 필요를 훨씬 넘어서는 것 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이란 땅을 밟고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삶에 참된 행복이 있음 깨닫는 사람이다. 내가 서 있는 땅, 곧 내가 사는 이 세상 안에서 사람들, 가족, 친구,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땅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 그리고 더 나아가 창조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끌어안고 살면서도 하늘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맑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높고 푸르고, 모든 사람을 감싸주는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 영혼의 고향을 바라보기 위한 연습이다. 그래서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땅을 사랑한 예수님의 삶과 조화를 이룬다. 무조건 하늘만 바라보지 않고 땅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신앙인일 것이다.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축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받을 축복에 희망을 걸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내가 서 있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축복에 걸맞지 않은 수많은 사건 사고로 물들어 있고 수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주셨음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내게 남은 과제는 이 하늘을 함께 볼 수 있도록 그 희망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된 희망, 못난 내 모습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는 희망, 하느님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하느님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희망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