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2년

★☆ 차동엽 신부님의 <사도신경> 강의를 듣고

김레지나 2012. 6. 30. 10:34

 

2012년 6월 20일 2시부터 5시까지, 용인 성당에서 차동엽 신부님의 <사도신경> 강의가 있었습니다.

엉터리 레지나는 2시에 도착했는데, 막 신부님의 강의가 시작된 참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대학생이실 때 우연히 뜨거운 감동으로 듣게 되었다는 성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를 소개하시면서 갑자기 울먹이시느라 말씀을 못 이으셨습니다.

  성가봉사하시는 분이 눈치껏 기타반주로 그 성가를 함께 부르자고 하셔서 어색한? 순간을 때웠지요.

  성가가 끝난 후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강의 시작되기 전에 의자에 앉아 있는데, 성당 안으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겁니다. 이 더위에 이렇게 사람들이 오다니, 제가 대학교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주님께서 저를 이렇게 키워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 부분은 제 기억에 의해 쓴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습니다. 강의를 들은 지 열흘이나 지나서 정리하다보니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차신부님께서는 6년 전에 제 본당에 강의하러 오셔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묵상해보면 다 압니다. 그래서 제가 이 먼 길(차로 7시간)을 마다 않고 오는 겁니다.”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도 한참을 울먹이셨습니다. 저도 그때 하느님의 사랑에 흠뻑 취해 있었던지라 공감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차신부님의 왕팬이 되었지요. 기도할 때, 하느님을 전할 때, 눈물이 나는 것은 그 순간 주님께서 꼭 안아주시기 때문이라지요? 아마 그 순간 주님께서 차신부님을 안아 주셨던가 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셔서 골탕을 먹이시기도 합니다.^^ 저는 그렇게 골탕 먹이시는 주님이 정말 좋습니다. 저는 그렇게 주님 사랑과 은혜에 눈물 흘리시는 차신부님이 정말 좋습니다.)

 

  몸이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사진기도 볼펜도 메모지도 들고 가지 않았고 눈 감고 편히 듣고만 와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제 옆에 앉으신 분이 뜬금없이 자기 수첩을 북북 찢어서 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멀쩡한 수첩을 망가뜨리면서 메모지를 주시는데 고맙다는 시늉으로라도 메모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메모를 중간 중간 시작했는데, 힘들어서 메모를 그만하고 싶어도 그 분이 자꾸 수첩을 찢어서 주시는 바람에 거의 다 하게 되었습니다.

 

  메모했던 것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부분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차신부님의 책 <사도신경>의 내용과 함께 올립니다.

 

  

나는 믿나이다. - 열린 믿음 <사도신경 p. 37 책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과 축복을 누린다. 믿음은 또한 주님을 감동시키고 기쁘게 해 드린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116)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필요가 있다. 방금 위에서 얘기한 3단계로 말이다.

 

  주님은 믿음을 기뻐하신다. 성경 속 ‘중풍병자와 관련된 예를 들어보자.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보여드려 낫하고 싶었지만 군중 때문에 어렵게 되자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어 병든 친구를 예수님이 앉아 계신 곳으로 내려 보낸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5) 크게 감탄하셨다. 사실 수님이 윤리 선생이면 얘긴 전혀 딴 판이 되었을 것이다. 차례 안 지,남의 집 지붕 뚫었지. 그런데 예수님은 그 차원이 아니시. 사람을 헤아리는 그분의 측은지심은 그런 걸 문제 삼지 않으시오히려 얼마나 딱하면 이렇게까지 데려 왔을까하는 마음으로 병든 친구를 데려온 이들을 이렇게 칭찬하셨던 거다. “너희들이 정말로 내가 낫게 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구나. 그러니까 이 법석을 떨고 여기까지 온 거구나"

  또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녀는 병든 딸을 살리겠다는 일념에서 주님으로부터 깅아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라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 여인은 이방인이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나는 유다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왔지 이방인들을 위해 오지 않았다.” 라고 하셨던 거다. 그런데 굴복을 모르는 믿음으로 간청한 이 여인의 적극성이 예수님께 어필하였다. 마침내 예수님은 크게 놀라며 여안의 믿음에 감탄하셨다.

  끝으로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의 예는 더하다. 그는 중병으로 누워 있는 자기 종을 치유해 달라고 청하면서 예수님께서 미천한 자기 집까지 오실 필요 없이 ‘그저 말씀만(루카77) 하시면 종이 낫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크게 감탄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79).

  예수님은 우리 ‘과장된 믿음’에 절대로 재를 뿌리거나 찬물을 끼얹지 않으셨다. 없는 믿음은 야단을 맞아도 오버하는 믿음은 야단을 맞은 적이 없다. 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반복하여 듣고 묵상하면서 터득한다.

  “아! 주님이 믿음을 좋아하시는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시는구나!“

 

  그런데,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날이 갈수록 굳건해지도록 해 달라고 청한 제자들처럼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해야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이 성장하려면

 

1. 기억하라. (차동엽 신부님의 강의내용입니다.)

  “아 주님께서 그때 그러셨지. 죽는다고 난리쳤는데 살려주셨지. .....”

  신명기에 모세 연설문이 몇 번 나오는데, 그 내용이 주로 ‘잊지 마라. 너희 조상이 노예 생활했던 것, 하느님께서 울부짖었더니 응답하셨던 것. 나를 불러 홍해 바다를 건넜던 것..... 만나를 주셔서 먹이신 것,........인도해주신 것...“

 

2. 들어라

<사도신경 p.39 책 내용입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지름길 가운데 하나는 자꾸 듣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성경을 읽고 신앙체험담을 자꾸 들으면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

“아 극적으로 주님이 역사하시는구나.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구. 망한 자도 일으켜 세우시고,끝난 사람도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구나. 와,원더풀! 할렐루야,아멘!"

  믿음의 성장은 특히 말씀을 듣다가 ‘나’를 위해 건네시는 주님 말씀인 ‘레마’를 만남으로 촉진된다. 나는 여러 저술에서 주님께서 각에게 ‘레마’를 주심을 누차 강조했다. 성경에 있는 객관적인 진술을 로고스’(logos) 라 한다면 이것이 주님이 나만을 위해서 속삭여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때 ‘레마’(rema) 라 한다.

<중략>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인류 전체를 통째로 상대하지 않으신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씩을 상대하시어 ‘나’를 위해서만 따로 말씀을 준비하신다. 이것이 주님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은 구체적이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데레사, 내가 너 사랑해. 마리아, 내가 너 사랑해. 요한, 내가 너 사랑해....”라고 말씀하신다. 일대일 사랑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다가 감동이 오는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을 붙들고 힘내서 살 일이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만 건네시는 레마며, 그것이 ‘나’의 삶에서 그대로 현실이 될 것을 확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결국, 말씀을 들음으로, 레마를 철썩같이 받아들임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다.

<중략>

  주님은 신앙체험을 혼자 간직하는 것을 ‘겸손’이라 여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네가 나를 부끄럽게 여기는구나”라며 섭섭해 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각자의 체험을 나발 불며 주변에 알림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나 역시 그로 인해 받은 은혜가 더 크다. 곱씹을수록 정말 중요한 내용이다. ‘서로 으샤으샤 해서 함께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이기에.

 

(차신부님 강의 내용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신앙 체험에 관한 한 여러분이 저의 스승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생존형 믿음을 강의한 게 아니었습니다. 교리 강의를 먼저 했었는데, 점점 영성적인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제들이 생활형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진짜 기도는 절박한 삶의 위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서 전해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 강의는 여러분이 만들어낸 강의입니다. 저는 응답받은 믿음의 용사들의 이야기를 취합하여 듣고 전합니다. 제 강의에는 수많은 증인들이 저와 함께 서 있는 셈입니다.)

   

3. 믿는 이가 되라.

   (<사도신경> p.41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심이 많은 토마스 사도에게 뼈있는 말씀을 주셨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이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째 다락방 발현 현장에서 내리셨다. 자신의 부재 시에 예수님이 첫 번째 발현하신 일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던 토마스에게 주신 충고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본래 그리스어 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토마스야, 아피스토스(apistos)가 되지 말고 피스토스(pistos)가 되어라.”

  여기서 ‘아피스토스’는 ‘안 믿는 이’란 뜻이고, ‘피스토스’는 ‘믿는 이’라는 뜻이다. 즉 “안 믿는 이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라”는 말씀이었다.

  <중략>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믿음은 하나하나의 ‘case by case'로 믿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믿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한 사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통으로 ’안 믿는 이냐, 믿는 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이’가 되기로 선택하고 나면, 모든 것이 믿음의 눈으로 보인다. 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축복이고 다 은총이고 다 행복이고 다 잘 된다. 반면 ‘안 믿는 이’의 눈으로 보면 다 불행이고 다 실패고 다 좌절이고 다 불평거리다. 결국,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셈이다.

  “토마스야, 네가 네 동료들이 전해 준 내 첫 번째 발현 얘기를 믿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전달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네가 평소 ‘안 믿는 이(apistos)의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너 그거 고쳐라. ’믿는 이‘(pistos)가 되면 비록 네가 보지 못했어도 내 부활을 진즉 믿었을 테니까.”

  부활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다. 희망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다. 미래는 주가 보는가? 믿는 자가 본다. 축복은 누가 보는가? 믿는 자가 본다.

  핵심은 간단하다. 믿음은 결코 하나하나 사건에 달린 사안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을 바라보는 총체적인 안목이다. 그 총제적인 안목이 ‘믿는 이’와 ‘안 믿는 이’를 결정짓는다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이 심오한 일침을 토마스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언을 바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것이 믿음의 경지다. 이 두 마디로 토마스는 ‘믿는 이’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차신부님 강의 내용입니다.

안 믿는 자의 마음으로 강의를 들으면 이해가 안 되고 중간에 나가게 됩니다. 이해 구조가 안 되어 있으면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의하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탓입니다. 안 믿는 자의 마음으로 앉아있으면 아무리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강의라고 하더라고 그 사람에게는 은혜가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에 대해 말씀하셨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옥토..............생략...........)

 

* 말씀을 붙잡고 시련을 견디는 신앙

  (<사도신경 p.43 내용입니다.)

  우리 신앙이 바닥날 때, 절망의 골이 깊어질 때 우리를 위기에서 구출해 주는 것은 성경 말씀이다. 말씀은 우리 믿음의 파수꾼이 되어 준다. 주님은 약속의 말씀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교인의 특권이 흘러나온다. 주님은 당신 몸소 주신 약속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철석같이 믿고 청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들었지만 주님의 ‘말꼬리’를 잡고 떼를 쓰기에 일맞춤인 약속이 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약속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 무엇을 청할 때 괜히 주눅 들어서 거지처럼 청하지 말고 당당하게 채권자처럼 청하라고 응원해 준다. 이 말씀으로 인해 “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주님! 약속대로 주세요!”하고 애교를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붙잡을 말씀은 얼마든지 있다.

  우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2)

  만약 이 구절을 읽는데 감동이 왔다면, 내 집안을, 내 사회적 영향력을 일으켜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큰 민족이 되게 한다.”라는 말씀은 “나의 무엇인가를 일으켜 주겠다.”라는 뜻 아닌가.

다음으로 주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힘들 때, 두 팔을 내밀어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 주고, 네가 몰랐던 큰 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예레 33,3)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일들이 연신 생겨난다. 노상 부르는 이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주님의 기도) ‘전능하신 천주 성부’(사도신경)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성호경)가 크고 비밀한 일을 터주는 물꼬인 것이다. 그 힘으로 그 설렘으로 우리가 매 순간을 살고 있는 셈이다.

 

( 이하 신부님 강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들은 진술, 설명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약속하는 분이 책임지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들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갖고 있는 특권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이런 약속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갖지 못하고 기도하는 종교는 청한 것을 받아도 그만, 못 받아도 그만입니다. 왜냐면 약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말씀에 담긴 주님의 이 약속을 붙잡고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우리들에게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하느님을 안 믿고 어려워하고 염치없다고 뒤로 빠지려고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발 당신께 편하게 다가오라고, 당신께 청하라고 당신께 불리한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좀 써먹어라. 나를 불러라. 문제가 생기면 먼저 포장마차 가서 신세타령하지 말고 나에게 청해라. 주시려면 주시고 안 주시면 할 수 없고 하는 식으로 기도하지 말고 확신을 갖고 기도해라......”하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야단치실지도 모릅니다. 템플 스테이도 잘 팔리고, 가짜들도 잘 팔리는데, 내가 뭐가 부족해서? 하시면서요. 어쩌면 주님을 홍보해야하는 사제들이 더 노력해야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했더니, 어떤 분이 “신부님, 오늘 위험한 발언을 하시네요. 그거 기복기도, 자판기 기도가 아닙니까? 그런 신앙은 틀렸습니다.”라면서 불신의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많이 듣는 소리라서 좀 세게 대답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묵상해보셨습니까? 정의가 불의에 의해 재판 당하고 사형을 당하셨는지 묵상해보십시오. 그것은 ‘당함의 영성’입니다. 하느님께서 져주신 것입니다. 일부러 우리에게 먹히기 위해 밥이 되신 분이십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 싶으셨으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그런 예수님께서 설령 당신이 자판기에서 팔리는 것처럼 된다고 한들, ‘너희들 자존심 상하게 나를 팔아?’라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너희 삶에 보탬이 된다면 그렇게 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구원자’라는 말을 음미해보십시다.

  예수님은 천상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천상에서 고상하게 계시다가 우리가 죽으면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런 구원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사람이 되신 구원자, 시장바닥으로 내려오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환자를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상의 구원자였다면 “나는 영적인 구원자이지 육신의 구원자는 아니니, 이 사람을 의사한테 보내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의사한테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안수해주시고 치유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끼니가 떨어졌을 때도 영적인 문제만 당신 소관이라고 하시면서 ‘집에 가서 먹고 오라’고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가진 것 모아라. 기도하자.”라고 하시면서 오천 명의 먹을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생활형, 생계형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도 뜬구름 잡는 데서 예수님 만나지 마시고 길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문제 한 복판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당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의 보람이고 기쁨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이 말씀을 묵상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낙관론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을 선포하셨고, 그 말씀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28 에,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하느님께서 태초에 “가득 채워라. 신나게 살라. 행복해라.”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신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망가뜨리고 왜곡시키고 단절시켰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이 축복의 메시지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능하신 하느님의 축복이 창세기 마지막장에서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

결국 창세기의 대단원에 이르도록 하느님의 첫 축복 메시지는 숱한 질곡을 관통하여 면면이 이어온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결국 관철하십니다.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묵시록 20장에 사탄과의 싸움 끝에 새 하늘 새 땅을 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또 새 하늘 새 땅을 보았습니다......(중략)..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 묵시록 21장)

  성경은 요한 사도가 황홀에 빠져서 하신 마지막 외침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종말을 얘기한다면, 슬퍼야 하고 무서워야 하고 두려워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승리자,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하고 주님을 초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입니까? 태초의 축복이 역사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박해가 있고,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도, 끄트머리에 가서는 다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창조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마감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좋은 것을 기대하면서, 낙관론을 선언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의 역사에도 그러한 낙관론이 적용된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고 속을 썩여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포기한 적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내 첫사랑, 내 짝사랑. 내 끝사랑이다.”라는 뜻을 기어이 관철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중략)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는 다 합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옮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시면서 낮은 수준의 기도라도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봉사하도록,,,,,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우리의 영성이 업그레이드되는 발판을 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얌체 같은 기도에도 응답을 주시는 이유는 일단 기도에 재미 붙이게 만든 다음에, 나중에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하고 바로잡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바둑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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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믿음이 성장하려면>이라는 주제로 신부님의 강의와 책 내용 일부를 서툴게 엮어보았습니다.

이하 차신부님의 강의 다른 부분입니다. 간단히 부분부분 뽑았습니다.)

<통째로 아멘>, <올인 아멘>, <희망으로 아멘.>: (강의 정리 생략, 책으로 읽으세요.^^)

문제를 붙잡고 기도하지 말고 답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문제나열형 기도를 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아도 또 다른 문제거리를 찾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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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원주의에서는 답이 여러 개입니다.

종교를 문화로 볼 것이냐, 진리로 볼 것이냐에 따라 갈리는 문제라고 봅니다.

종교를 문화로 보는 사람한테는 다원주의가 맞겠지요.

음식의 경우에는 문화이기 때문에 이런 음식은 맞고 저런 음식은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문화적인 요인도 있지만 본질은 문화이기 이전에 진리입니다.

답이 여럿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언젠가는 마지막에 가서는 네가 틀렸든지 내가 틀렸든지, 둘 중 하나만 맞는 겁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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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먼 추기경님 말씀 :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분만 받아들이면 결국 ‘거짓’에 빠지게 됩니다.

사도신경의 전체 내용을 통째로 ‘아멘’해야 합니다. 하나도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사이비 종교는 그 중 딱 한 부분 바꾸었는데 다 바꾼 거나 똑같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