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 신부님들이 성탄을 지내러 다들 집으로 떠나는 이맘때가 되면, 집 근처 양로원 미사는 주님 공현대축일까지 내 몫으로 고정이 된다. 제법 코끝을 찡하게 하는 쌀쌀한 새벽 공기를 깊은 숨으로 들이마시며 양로원에 도착했을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연로하신 원장 수녀님이 달력 한 쪽을 쭉 찢어 그 위에 미사 지향을 적어 놓고는 10유로의 미사 예물과 함께 힘없이 내밀면서 슬픈 눈빛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어제 저녁 아우로라Aurora 수녀님이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연미사 부탁드립니다.”
너무 깜짝 놀라서 갑자기 심장이 피를 전신으로 확 품는 느낌이 전해졌다. 평화의 인사를 할 때마다 나와 악수한 손을 떼고 나면 곧바로 당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는 수녀님이었다. 어느 날 인가 내가 이유를 물었더니 ‘성체를 만지는 거룩한 손’이라서 그러는 것이라며 환하게 웃던 아우로라 수녀님이 성탄을 이틀 앞두고 어제 저녁 6시 반경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요즘 몸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허무하게 가실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 생각해 보니 며칠 전부터 나를 볼 때마다 ‘부온 나딸레Buon Natale’하면서 미리 성탄 인사를 건네셨던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 같았다.
대림待臨시기를 하루 남겨놓고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대림시기는 이미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시기이자, 그러한 기억을 통해 당신의 구원사업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대림은 이렇게 주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이미’ 시작되었지만 역사歷史 안에서의 완전한 실현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하느님 구원사업의 도정 한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실존의 모습 그 자체인 것이다.
대림시기는 결코 매년 12월 24일 자정부터 시작되는 예수 성탄 대축일 하루를 기다리는 시기가 아니다. 2천년 전,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생일 축하하고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대림시기는 이미 오신 예수의 성탄을 통하여 시작된 하느님의 구원 시나리오가 그 완결을 향해 우리들 삶의 무대에서 바로 오늘 생생하게 펼쳐져야만 하는 한 편의 드라마다. 이것은 예수님 혼자 출연하는 모노드라마가 아니다. 당신이 빠지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날 수 없는, 당신없이는 애당초 극의 전개가 불가능한 당신과 예수님이 공동으로 주연을 맡은 드라마다.
감독님의 ‘큐’ 싸인에 따라 예수님이 등장하셨다. 수난 받으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무대 뒤로 퇴장하셨다. 다시 예수님이 등장하실 때까지는 당신이 무대에 나서서 감독님의 의도대로 멋진 연기를 펼쳐가며 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야한다. 그런데도 지금 당신은 관객석에 앉아서 새로운 예수님의 등장만을 기다리고 있다.
“컷!”. 감독님이 소리쳤다. “뭐해? 안 나가고? 다시 한 번 갑시다. 이번에는 잘 하세요. 레디... 큐!”
또 다시 예수님이 등장하신다. 당신은 여전히 관객석에 앉아 있다. 이렇게 벌써 수 십 차례 엔지NG가 나고 있는데도 당신은 또 다른 예수님의 등장만을 기다리며 똑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있다. 당신이 나서야 할 그 때! 그 때가 바로 지금 당신이 보내고 있는 대림시기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삶 전체가 대림시기이다.
이 거룩한 대림시기에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당신이 기다려야 할 것은 정작 당신 자신이다. 이 말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나와 당신의 드라마는 올 해도 엔지, No Good이다.
미사를 마치고 양로원을 나서서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 집집마다 요란하게 깜빡거리는 성탄 장식으로 힘겹게 깨어나고 있었다. 아우로라 수녀님이 내 사는 꼴이 안쓰러워 절로 기도를 하고 계실 것 같다. 언제 있었냐는 듯 홀연 사라지고 말 인생에서 도대체 무엇을 그토록 바라고 또 기다리고 있느냐고 답답해하시면서 말이다.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묵시22,20)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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