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불화의 원인 - 오해

김레지나 2011. 12. 31. 22:50

아주 오랜만에 학교 정문 앞에서 스콜라스티카 수녀님을 만났다. 지금은 아주 오랜 친구처럼 서로 반가워하면서 볼을 마주치는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지만, 사실 그 수녀님과 나의 인연은 극복하기 힘들었던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삼년 전, 교회법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수녀님이 내가 앉아있던 바로 앞자리에 앉으려는 찰라였다. 나는 그 자리가 누군가 음료수를 쏟았는지 몹시 끈적거리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소리쳤다.

“No, No, No! Non metterti!(노, 노, 노! 앉지 말아요!)”
“Perche'?(왜죠?)”
“Perche' quello sedere e' sporco.(그 의자가 좀 지저분해서요.)”

나는 친절한 호의를 베푼 사람답게 빙긋이 웃으면서 ‘고맙다’는 그 수녀님의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수녀님이 화를 벌컥 내더니 뭐라, 뭐라 중얼거리면서 다른 자리로 가 버렸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가버렸는지는 며칠이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아직 이탈리아 단어들이 이것저것 헷갈리던 때라서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좌석’, ‘의자’를 뜻하는 ‘쎄딜레(sedile)’ 대신 ‘엉덩이’를 뜻하는 ‘쎄데레(sedere)’라고 말해 버렸으니 그 수녀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겠는가? 더군다나 아프리카 출신인 스콜라스티카 수녀님의 ‘쎄데레’는 누가 보더라도 굉장히 큰 편인데다가 하필 쑤욱 빼서 의자에 놓으려는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던 찰라에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 사건 이후부터 그 수녀님은 나를 마주칠 때마다 마치 무슨 벌레 보듯 했었는데 다시 새로운 친구관계를 시작하기 위해서 내가 기울인 피눈물 나는 노력은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다. 지금이야 가까운 사이가 되어 다행이지만 단어 하나에서 비롯된 오해를 풀기 위해 그 동안 들인 공을 생각하면 사실 좀 억울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살다보면 정말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큰 오해를 불러오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경우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 낸 쪽에서 별의별 해명을 해 가면서 오해를 풀어보기 위해 애를 쓰지만 끝내 풀리지 않고 상대방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의 단절 뒤에는 우리들의 경솔함과 교만함과 경직된 삶의 자세가 숨어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물이나 현상, 혹은 사람들에 대해 항상 사리를 분별하여 잘 이해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 즉 오해誤解이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런 잘못된 이해를 많이 하게 되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조그만 피해를 입히거나 작은 실수를 저지르면 그 한 가지 경험만을 가지고 상대방의 전체 인격으로 확대시켜 해석해 버리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알고 보니 상대해서는 안 될 인간이네’라는 식으로 판단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 그런 다음에는 상대가 무슨 해명을 해도 그 판단을 바꾸려하지 않는다.

만약 밤하늘의 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전체 우주를 아는 듯 떠벌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경솔하고 교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건을 가지고 한 사람의 전체 인격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 사람들의 경솔함과 교만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혹시 내 경솔함과 교만함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을 잘 못 이해하고 그릇되게 판단하는 오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본다.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많은 오해와 이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불화는 사실 나 스스로에 대한 오해에서부터 비롯됨을 깨닫게 해 준 모든 인생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오해는 불화의 원인이 되지만 경험이 많은 사람은 이를 스스로 거둘 줄 안다.”(집회36,20)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