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1년

♣♣☆ '기도의 힘'을 볼 수 있다면

김레지나 2011. 9. 17. 11:13

 

‘기도의 힘’을 볼 수 있다면

 

 

(이 졸글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들아.”

 

 

  2011년 추석(9월 12일)에 두 번째 암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잠깐씩 걷기도 힘들만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폐 속에 남아 있는 마취가스 때문에 미열이 나서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병동 옆에 있는 산책로를 거닐면서 평소 하던 대로 사제들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특히 저와는 다른 신앙관을 갖고서, 저와 제가 사랑하는 신부님들을 비웃고 제가 사랑하던 동생과의 사이를 노골적으로 갈라놓은 한 사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한때는 그분을 기억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분은 제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일꾼이시기 때문에 진심으로 거룩해지시기를 바랐습니다. 또, L신부님이 비안네 성인을 닮은 성인 사제 되시기를, A 신부님이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완덕의 계단을 올라가는 사다리로 삼으시기를, C 신부님이 안티들의 염려를 넘어서 주님의 큰 일꾼으로 우뚝 서시기를, J 신부님이 더욱 더 영성이 뛰어난 사제가 되시기를, I 신부님이 건강하시고 너무 외롭지 않으시기를, S 신부님이 당신의 고통을 통해 성덕을 더욱 쌓으시기를, U 신부님이 자신보다는 주님을 드러내는 사제 되시기를, K 신부님이 순명을 통해 주님을 더욱 닮게 되시기를, H 신부님이 온화한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향기를 전하시기를,......... 그리고 본당 신부님과 학사님들이 훌륭한 사제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빠, 그분들 모두 성인 신부님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제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미쳤다고 할 거예요. 예, 아시다시피 저는 정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들 정상이 아니지요. 제가 진심으로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분들이 사랑하는 아빠의 일꾼이시기 때문이에요. 하늘나라에서 그분들을 만나게 될 때, 그분들이 해처럼 빛나는 모습이면 좋겠어요. 저는 그저 맨 꼴찌 자리에서 그분들을 우러러 볼 수만 있으면 행복할 거예요. 이 세상 어느 한 분의 신부님이라도 잘못되어 아빠 마음이 아프실 걸 생각하면 저도 마음이 아파요. 추석에 자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이 세상 아버지들의 마음처럼, 하느님도 그렇게 하늘나라에서 건강한 모습의 자녀들을 만날 수 있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그때 갑자기 성모님의 목소리가 제 마음에 울렸습니다. 저는 묵주를 잡고 입으로만 건성으로 성모송을 외우고 있었고 기도하는 내내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거나 하느님께 종알대고 있었기 때문에, 느닷없이 끼어든 성모님의 목소리에 놀랐습니다. 성모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들아.”하고 사제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느 한 사제라도 잘못될세라 노심초사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특별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호소하시는 성모님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성모님의 엄마로서의 사랑과 염려가 제 마음에 전해지면서 와락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의식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어머니께서는 저와 함께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 부족한 기도를 당신 사랑의 그릇에 담아 하느님께 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심술이 나다.

 

  퇴원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갑작스레 우울해졌습니다. 어디에 말도 못할 어려운 문제들을 새삼 마주하게 되었고, 앞으로 제 아들들 대학이나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속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5년 전에 처음으로 암에 걸렸을 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에 세상일이고 가족의 일이고 전혀 걱정되지도 않았고 지극히 행복하고 평화로운 감정으로 신바람 난 나날을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음속에 불쑥 불쑥 올라오는 갖가지 상처들과 화해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안부를 묻는 문자들에 답장도 하기 싫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심술이 잔뜩 나서 중얼거렸습니다.

  “아빠, 저는 아빠가 미워요. 처음으로 그런 마음이 들어요. 아빠가 미워요. 제가 못되고 부족하고 엉터리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빠가 제게 너무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아빠가 밉다구요. 듣고 계세요? 앞으로는 글도 안 쓸 거고 사람들 만나서 웃지도 않을 거예요.”

  한번 삐딱해진 마음은 점점 더 엉망이 되었지만, 운동 겸 기도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묵주를 잡았습니다. 습관대로 기도의 첫 번째 지향은 사제들을 위해서 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괴로우니 병원에 입원해있던 때처럼 간절한 사랑을 담아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아.”하고 말씀하셨을 때 느꼈던 감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빠 하느님, 엄마 성모님, 좋아요. 좋다구요. 신부님들과 제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당신의 아들들’을 위해서 기도하지요. ‘당신의 아들들’이나 잘 챙겨주세요. 저 같은 건 이렇게 불평이나 하고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을 테니까.”

  한참을 형식적으로 묵주알만 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저를 잘 아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저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또한 제가 기도 중에 기억하는 신부님들 대부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마치 처음 깨달은 것처럼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그저 엉터리로 잠깐씩 기도할 뿐인데도, 제가 하는 기도의 수십 배나 되는 기도를 거저 받고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힘을 온 마음으로 느꼈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표징으로서 받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기도의 힘을 제 감각으로 느낀 적은 딱 두 번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기도의 힘을 느꼈던 기억

 

  (제 졸글 “만만한 하느님을 위한 회개”의 일부를 그대로 옮깁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첫영성체를 받은 후로 성당에 열심히 다니다가, 결혼 후 10년 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몇 주 남겨두고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5년 전, 암 진단을 받은 후 한동안은 꽤나 의연하고 밝은 모습으로 버티었는데, 대전의 동생 집에 맡겨 놓았던 어린 아들들이 눈물을 감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 후로, 그만 슬픔이 폭탄처럼 터져버렸습니다. 아이들과 헤어지고, 다음 진료를 위해 분당의 동생 집으로 오면서 평생 처음으로 맛보는 지독한 괴로움에 눈물만 죽죽 흘렸습니다.

  문득 하느님께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오래 냉담을 하다가 아프게 되어서야 하느님을 찾는 것이 자존심 상할 만큼 염치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을 하소연이라도 해야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슬퍼서 이성으로는 단 한 마디로도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십여 년 만에 심령기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동생네 큰방 침대에 누워서, 소리 내지 않고 입만 오물거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성령께서 필요한 기도를 하게 해 주신다더라’하는 기왕의 믿음만 있었지, 엄청난 슬픔 때문에 무엇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누워있는 제 몸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후우~하는 한숨과 함께 기도가 끝났나보다 하고 느끼자마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이 마음 가득 차올랐습니다. 이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급작스럽고 지극한 기쁨이었습니다. ‘아, 하느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구나.’하고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서 티 없이 환한 행복감에 취해서 연신 헤죽헤죽 웃음이 났습니다.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 상상한 적도 없는 황홀한 기쁨에 푹 잠겨서, 행여 제가 죽은 후에 남겨질 아이들도 하느님께서 어련히 챙겨주시랴 싶었고,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곧장 하느님 품에 안기면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평화로운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날 저는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마고 약속했던 이들 한 명 한 명이 또렷이 떠오르면서 그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에 빠졌고, 곧 고마움에 눈물이 났습니다. 분명히 그들의 기도 덕에 저는 그렇게 분에 넘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의 힘을 느꼈던 기억

 

  제가 항암치료를 받던 당시, 저는 큰 고통 중에 계시는 어떤 신부님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급하고 간절했던지 여러 달 동안 그분을 위한 기도를 3분 이상 잊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친정집 가족들이 놀러 와서 바닷가로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저는 그분과 다른 몇 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가족들과 즐겁게 어울리지 못했고, 혼자 차 안에서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다가 K선생님이 코팅해서 선물해주신 파티마의 기도문을 읽었습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을 믿고 찬미하며 의지하고 사랑하나이다. 당신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용서해주소서."

  "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 성부 성자 성령님, 마음 깊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세상 모든 감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보배로운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당신께 바치오니 예수님의 마음을 상해드린 불법과 모독과 무관심을 기워 갚기 위함이나이다. 예수 성심의 무한한 공로와 티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을 통하여 삼가 청하오니 불쌍한 죄인들이 회개하게 하소서."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었는데, “당신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용서해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상해드린 불법과 모독과 무관심을 기워 갚기 위함이나이다.”라는 부분에서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지더니, 단어 하나하나가 바다와 하늘 가득히 스며들어 퍼지는 듯했고 제 가슴에도 날아 들어왔습니다. 곧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 순간 제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데 게을렀음을 통회했습니다. 그 신부님이 억울한 고통 중에 계신 것도, 이 세상에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불법과 모독과 무관심이 판을 치는 것도, 제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 탓이라 여겨졌습니다. 이웃과 세상을 위한 기도를 소홀히 한 것이 하느님을 모르는 체한 것과 같다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어야 했는데, 저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간절한 사랑을 담아 기도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그날도 기도의 힘을 온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넓은 바다와 하늘 저편으로까지 스며들어 가는 기도를 ‘보는 듯이 느꼈다’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기도의 힘’을 볼 수 있다면

 

  얼마 전에 인터넷에 80여년 만에 봉쇄수녀원을 떠나 나들이를 나오게 된 노수녀님에 관한 기사가 떴습니다. 댓글 중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의 수행을 오직 자신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썼다는 사실이 유감스럽습니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댓글을 쓴 네티즌은 ‘기도의 힘’을 조금도 모르는 분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힘’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미사와 기도와 희생 덕에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고, 우리가 받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불평하는 마음도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압니다.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나 만나지도 않은 이들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기도하는 많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일대일의 사랑을 맺고 있는 듯이 기도하고 있음을. 세상일들 하나하나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과 애정을 갖고 기도하고 있음을. 그리고 저 또한 그분들의 기도에 빚지고 있음을.

 

 

심술이 풀리다.

 

  하느님께 심술을 부린지 (아쉽게도?^^) 사흘 만에, 기도의 힘을 느꼈던 순간을 기억해내면서 꼬인 마음이 사르르 풀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기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도를 이미 넘치게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 기도는 저를 위한 그분들의 사랑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배려입니다.

  심술이 풀리니 기도할 때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줄줄이 떠올라서 그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놀이에서처럼 저를 위한 기도가 그분들께 되돌아가도록 ‘반사~’하고 외쳐보기도 합니다.^^) 또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외로운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제가 앞으로 또 다시 고통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서, 광야에서 고생스럽다고 이집트의 노예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투덜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불평을 하게 된다면, 저를 위한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가 기도를 받을만한 자격을 잃어버린 탓일 것입니다.

  제가 ’기도를 받을만한’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값없이 받은 온갖 좋은 것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 103:2)”

 

                                                          2011년 9월 16일, 퇴원 후 사흘째 되는 날, 엉터리 레지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