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주사’는 싫어요.
대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새 구두를 신고 강의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더니, 집에 돌아갈 때쯤에는 발뒤꿈치가 벗겨지고 발가락이 아파서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숙녀 체면에 30분 거리의 길을 신발을 벗어들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걷다보면 이렇게 아픈 것도 좀 무디어지겠지. 차라리 확 뛰어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하고 생각하면서 아픔을 무시하고 몇 발짝 씩씩하게 걸어보았는데, 무디어지기는커녕 훨씬 더 아팠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살금살금 한 발짝씩 내디디며 속으로 연신 ‘으악’, ‘으악’ 비명을 질렀습니다. 얼마나 아팠던지 30분이 아니라 30시간은 걸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길에 서서 잠깐 쉬면서 다음 걸음을 어떻게 내디딜까 겁내고 있었습니다.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생각났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무서우리만치 엄청난데, 어떻게 견디셨을까?’, ‘주먹을 불끈 쥐고 ‘으아아아~~~~악’하고 한 번 참기로 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아픔은 누그러질 테지?’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번 참기로 한다고 참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한 발짝 한 발짝이 온전히 새로운 고통이구나.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는 거구나. 큰 아픔 뒤에 따라오는 작은 아픔이라고 해도 따로 따로 새롭게 느껴지는 거구나. 오래 아프다고 해도 무디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서 한 발짝 한 발짝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순간순간 온전하게 아프셨구나. 걸음걸음마다 새롭게 힘드셨구나.’
5년 전에 여러 달 동안 누워만 계셨던 분과 같은 병실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까지 같은 병실을 썼기에, 임종 전의 고통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처럼 뼈만 앙상했고, 복수가 차서 배가 부풀어 올라있었습니다. 하루는 복수를 뽑아내는 튜브를 교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뚫어진 구멍에 새 튜브를 끼워 넣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그분이 “그렇게 하면 아파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저렇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는 중에도 바늘 하나 바꾸는 작은 고통까지 온전하게 느낄 수 있구나.’하고 놀랐습니다. 큰 아픔에 묻히면 작은 아픔쯤은 무디게 느껴지는 건 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고통이 겹친다 해도 각각의 아픔은 따로따로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5년 전에 앓던 암이 재발해서 일주일 후에는 수술을 받게 됩니다.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또 어찌 견딜까 싶습니다. 환우 한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토하다 토하다 쓸개즙까지 다 토했는데, 그건 사는 게 아니야. 재발해서 그런 치료 또 받으라고 하면 나는 굶어서라도 죽어버릴 거야.”라구요. 심한 고통의 경우에는 경험해보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겁을 내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재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막달레나 언니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이야기 듣고 한참 울었어. 그 힘든 과정을 다 알면서 기다리는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서.” 저는 고마워서 웃었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느님께 좀 살살 아프게 해주시라고 기도해야겠어요.”
제가 아들들에게 읽어주던 동화가 생각납니다. 제목이 “예방주사는 싫어요.”였습니다. 덩치 큰 거인 아저씨가 작은 아이들 뒤에 서서 예방주사를 맞으려고 기다렸는데, 거인 아저씨 차례가 되자 간호사가 거인 아저씨용으로 특별히 커다란 주사기를 빼냅니다. 거인 아저씨는 기겁을 하고 나무 위에도 숨고 다리 밑에도 숨고 도망을 다니다가, 결국 커다란 주사 한 대 대신에 작은 주사 10 대를 나누어 맞기로 하고 용감하게 주사를 맞았다는 내용입니다.
저도 그 거인 아저씨처럼 커다란 왕주사 대신에 작은 주사 10 방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이렇게 졸라야겠습니다.
“하느님, 지독한 통증과 항암치료 중의 울렁증이 겁이 나서 저도 거인 아저씨처럼 숨고 싶거든요. 혹시 저를 위해 왕주사를 준비하고 계신 건 아니시지요? 저는 왕주사 맞을 만큼 큰 사람이 아니거든요. 꼭 참작해 주세요. 그래도 왕주사를 맞아야 한다면, 저도 큰 거 한 방 대신에 작은 걸로 열 방 맞고 싶어요. 웬만하면 견딜만하게 따끔거릴 정도로만 아프게 해주세요. 아셨지요?”
2011년 8월 29일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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