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하느님 믿어도 소용 없구먼! ?)
저는 5년 전에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투병일기를 써서 환우 카페에 올렸습니다. 환우들이 되도록 재미있게 공감하며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웬만큼 기도해서는 하느님께서 눈 하나 깜짝 안 하신다. 믿음으로 산도 옮긴다고 해놓고서. 하느님은 ‘뻥쟁이’이시다.”라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어제 제 블로그에서 그 글을 읽은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 놓았습니다.
“보라,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 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다.(이사 59:1~2)“
댓글을 단 분은 성경 말씀을 빌려 ‘당신의 고통이 좀 덜했으면 하는 바람을 하느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은 당신의 죄 때문입니다.’하고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제법 여러 번 들어서 익숙해진 의견이라서 웃고 말았습니다.
5년여 전 제가 한참 투병 중일 때, “너 성당에 그동안 안 나갔지? 그 죄 갚는 거야.”, “입으로 지은 죄는 00암이 되고, 생각으로 지은 죄는 00암이 된다더라.”, “그 사람 욕심 많이 부리더니 결국은 암으로 죽더라.”,“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항암치료 안 받고 나을 텐데. 믿음이 부족한 것 같아.”하는 등의 핀잔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신 분들은 제 표정이 밝아서 제가 환자라는 사실을 깜박 잊어버리고 평소에 갖고 있던 암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편하게 드러내셨던 것 같습니다.
일정 부분 사실일지도 모르는 “네 죄 때문에 아픈 것이다.”라는 의견은 그래도 웃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잠깐만 설명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득 당할 것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저는 “하느님을 그렇게 열심히 믿어도 소용없구먼.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기나 해?”하는 불평을 듣게 될까 걱정입니다. 제가 암이 재발해서 다시 수술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도 ‘고통이 하느님의 은총일 수는 없잖아?’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생에서는 ‘고통의 신비’를 온전히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반응은 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재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당혹감을 드러내는 분들에게서 오히려 제게 대한 진한 사랑을 느끼고 고마워하게 됩니다. 저는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계속 주님의 뜻을 애써 묻고 그 뜻을 알려야할 것 같습니다.
수난 예고를 하신 예수님께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렸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로부터 ‘걸림돌’이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마태오 16,21-27) 어느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된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말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베드로의 반응이 왜 ‘걸림돌’이 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묻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루카 9,43ㄴ-45)
그러나 신앙인은 고통 속에 영광의 씨앗이 감추어져 있음을 고백하는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셔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감추어진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기쁘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뜻을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고통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고 두려워하고만 있으면 우리 영혼이 큰 걸림돌 앞에서 성장을 멈추고 주저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3년 반쯤 전에 저는 ‘자궁내막암 조직검사 결과 99%는 분명 암일거야.’하고 예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궁 쪽도 약간 의심스럽다는 PET CT 결과를 무시하고 유방암 수술만 받았었던 기억이 났고, 먹고 있던 항암약의 부작용 중 하나가 자궁내막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녀 소화데레사의 전기’를 읽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아, 하느님께서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 같았었는데, 내가 영적으로 너무 빨리 성장해서 하느님의 계획이 바뀌었나 보다.(^^) 이젠 나도 성인처럼 죽어야 하나 보다. 아마 장렬하게(?) 죽는 것이 영원 속에서 보면 내 영혼에 훨씬 더 유익한 길인가 보다.’하고 상상했었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러 병원에 가는 날, 엄마가 걱정되신다며 병원에 같이 가셨습니다. 소화 데레사 전기를 읽고 있는 저를 보고 엄마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꾸짖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스물 네 살에 아파서 죽은 성녀가 마음에 드냐? 그런 책이나 읽고.”
의사 선생님이 이상 없다고 말씀하시자 엄마는 무척 기뻐하시면서 병원에서 나와 백화점에 가자고 하시더니, 당신 옷을 한 벌 사셨습니다. (아마 봐두셨던 옷이 있었던 모양인데,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내 옷을 사주실 줄 알았더니, 왜 엄마 옷을 사시지? 이 기회에 나도.’ 하고 생각하면서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제 옷도 한 벌 골랐습니다. 시간을 들여 옷을 골랐다가는 그 사이 엄마 맘이 변할까봐 엄마랑 같은 코너에서 옷을 샀더니, 영~ 노티가 나서 지금은 못 입고 있습니다. ㅎㅎ엄마는 가끔 아주 엉뚱하십니다.^^)
이상 없다는 말에 그만큼 기뻐하셨던 엄마 못지않게 저도 기뻤습니다. 아니, 어쩌면 엄마보다 제가 훨씬 더 기뻤습니다. 저는 싱글 벙글 웃으면서 ‘아이구. 괜히 심각하게 폼만 잔뜩 잡았네.’하고 멋쩍어했습니다.
이제 다시 암이 재발해서 수술을 앞두고 있으니, 엄마는 제가 힘들어할까 봐 전화도 못하시고 끙끙 앓고 계십니다. 엄마뿐 아니라 친구들도 제 안부를 묻는 것을 망설이는 것 같습니다. 또다시 저는 5년 전처럼 투병일기를 써서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에게 안부를 전하려고 합니다. 아직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 걱정이 되고, 서툰 소리만 요란하게 내다가 저도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웃음거리가 될까 겁도 납니다. 그래도 전처럼 성경이나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 등을 읽으면서 주님의 말씀에 담긴 약속과 위로를 의지 삼아, 제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될 고통의 의미를 노래하려고 합니다. 제 노래 속에서 환우들과 친구들이 주님의 위로의 손길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날이 일찍 오지 않기를 바랐었는데, 저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교만하다거나 소설 쓴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 당연해서 싫은데,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예레미야 20. 9)’ 내키지 않는 길로 저를 떠미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의 일기는 신앙의 빛 속에 있는 분들 외에는 이해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다시 아프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떤 분들에게는 오히려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걱정 때문에, 비신자들의 카페에는 5년 전처럼 자주 제 투병일기를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아주 작은 불편과 고통일지라도 선한 의지로 봉헌하면 천 마디의 말로 하는 기도보다 값진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알뜰 장터에 물건을 기부하거나 장기기증을 하는 것과 같이, 선한 의지로 참아 받은 고통을 이웃과 세상을 위해 기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고통에 따르는 원망과 두려움과 좌절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희생과 고통을 참아 내야 하는 길임을 제 삶으로 이해해보려고 감히 두려움을 참으며 주님의 뜻을 묻습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소설 [빙점]의 작가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코는 7년 동안 대소변을 못 가리고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가 쓴 [빛 속에서]라는 책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걸어가다가 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이 걸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앞에서 예수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은 누구의 죄로 그런 것입니까? 본인의 죄 탓입니까, 그렇잖으면 부모의 죄 탓입니까?” (중략)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본인이 죄를 범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며 다만 하느님의 뜻이 그렇게 나타났을 뿐이다.”(중략)
나는 본래 두 남성과 동시에 약혼한 일이 있는 나쁜 여자라서 무슨 비난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의 성서구절을 읽었을 때 느꼈던, 눈앞이 환히 밝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의 병도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하느님은 이런 땅벌레 같은 나까지도 어디엔가 쓰시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떨렸다.(후략)“
“ 주님,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제게 대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주님, 제가 어떻게 주님의 길을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의 사랑받는 딸답게 품위를 잃지 않고 고통을 겪고 싶은데,
제 부족함이 너무 크고, 제 결심이 너무 약해서
자주 힘들어하며 투덜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면
나약하고 작은 바람이라도 어떤 고통보다도 강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시작되는 제 투병생활을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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