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4일 일요일
나는 글을 발표하기 전에 글 속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미리 허락을 구한다.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에 나오는 주인공, 데레사에게 글을 보내고 찜찜한 부분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었다. 이번 이야기는 너무 개인적이고 적나라해서 친구의 반응이 걱정되었었는데, 답장을 받고 마음이 놓이고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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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야!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써 주어서 고맙구나!
그때가 언제였나 싶게 또 다시 희미해지려고 했는데
너의 구수한 글을 보니 새삼 다시 기쁘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다져본다.
진아야!
너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조직검사 해놓고도 웃을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를 두어서 난 정말 행복하고
난 정말 네가 자랑스러워..
다 하느님의 은총덕분이겠지!
그 웃음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래.
다음에 또 언젠가 글을 쓸 때
내가 소록도 성당을 어렵게 찾아서
소록도에 있는 환우들과 함께 십자가 길 하면서 느꼈던 것도 적으면 좋을 것 같은데..
"저 사람들이 우리의 고통을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저 사람들은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 같은...
이미 천국의 티켓을 얻은 사람들 같은 ..
천국이 그들 안에 있고,
특별히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그들의 은총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한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들의 행복이 부러워서 뜨거운 눈물이 났던 때가 자꾸 생각나는구나!
‘언젠가 나도 이곳에 와서 정기적으로 봉사활동하면서 그들의 은총을 나눠 받고 싶다‘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때의 마음이 지금도 나의 가슴에 잔잔히 남아 있단다.
두서가 없고 표현이 어색하지만 진한 감동이 있던 그 순간이 자꾸만 머리속에 남아 있어.
이런 느낌을 너의 글에 필요할 때 끼워 넣어도 좋을 것 같아.
진아야!
사랑해,,
그리고 나의 글을 예쁘게 써주어서 다시 한 번 고마워!
기도 중에 기억할게!
2011년 8월 15일
대축일 미사에 다녀와서 루카의 대학탐방 숙제를 하기 위해 s대학교에 다녀왔다.
마침 동생 율리아가 와 있어서 여기 저기 설명해주면 좋겠다 싶었고,
공기도 좋은 곳이라서 나들이 겸 가기로 한 것이다.
쉬고 오리라 했었는데,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지, 엄청 피곤했다.
2011년 8월 16일 화요일
미국에 가려고 이삿짐을 띄워놓고 잠시 우리 집에서 머물고 있는 동생, 율리아와 조카를 태우고 서울의 유방전문 외과에 갔다. 동생은 몇 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 겁이 난다며 운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차도 폐차되어 없기도 하고.
율리아는 10일전에 유방 흡인 세포침 검사를 받았는데, 증식성 세포가 발견되어 맘모톰으로 수술 겸 조직검사를 권유 받았다. 오늘은 다른 병원에 갔다. 율리아의 선배 남편이 운영하는 병원이다. 의사 선생님이 경험이 풍부한 지라 맘모톰 대신 주사바늘로 정확하게 조직을 뽑아내었다.
동생은 병원에서 돌아와서 오후에 친정집으로 내려갔다. 일주일 우리 집에서 머물렀는데, 나는 다섯 살 조카를 잠깐씩이나마 보느라 힘들었다. ‘어휴,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다‘ 싶었다. 조카는 나랑 헤어질 때마다 ’치치 이모랑 같이 가‘하면서 울었었는데, 오늘은 울지도 않고 흔쾌히? 엄마를 따라 나섰다. 내가 '엄마 귀찮게 하지 마라. 엄마 다리 치료받고 다니잖아. 무릎에 올라가지 마라....떼 쓰지 마라.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하면서 잔소리를 몇 번 했었던 지라 저도 눈치가 좀 보였나 보다. 요즘엔 미운 일곱 살이 아니라 미운 다섯 살이라더니.
동생을 보내고 좀 여유가 생겨서 아침에 떠오른 글감에 대해 간단히 메모했다. 사흘 전에 읽은 이태석 신부님 관련 책에서 변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에서 크게 광고하길래, 반가워서 샀는데, 부분 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선종하시기 한달 쯤 전에 복수가 차서 움직이실 수도 없었는데, 모 신부님을 찾아가셔서 ‘살고 싶다’하시며 기도를 받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적은 부분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실이 아닐 것 같았다.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스토리일지 모르나, 이태석 신부님은 그 경지를 넘어선 분이신데, 그런 이야기가 활자화 되어서 성인 신부님의 이미지를 망쳐놓은 듯해서 불쾌했다. 그 책에 실린 사진도 수단과 관련 없는 것이고,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몇 군데 더 있었다.
이신부님이 정말 그러셨다면 그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삶에 집착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한 번 더 묻기로 하셨던 것이리라고, 어떤 경우에도 신부님은 하느님의 뜻과 받아들임을 선택하셨을 분이시라고, 그런 요지의 글을 쓰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한 번 검색해서 확인해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태석 신부님의 형님 신부님이신 이태영 신부님께서 그 책에 실린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신 말씀을 읽게 되었다. 어떤 신부님이 부풀린 이야기가 그대로 책에 실린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걱정이 되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서, 루카와 함께 저녁미사에 갔다. 율리아의 조직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5년 전에 내가 암에 걸렸을 때, 율리아는 하느님께 울면서 기도했다고 했다. ‘언니 대신 제가 아프겠습니다. 언니는 아직 아이들도 어린데, 저는 아직 아이가 없으니 제가 아프겠습니다.’하고.
‘이놈의 계집애. 이번에 또 그런 기도 한 거 아니야?’하고 겁이 덜컥 났다. 동생 결과만 안 좋으면 큰일이다 싶었다.
미사 시간에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 5년 전에 제가 아플 때는 제 아들들이 너무 어려서, 중학생만 되어도 좋겠다고 하고 생각했었지요. 이젠 유지니오가 중학생이 되었으니, 제가 다시 아프게 되어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여 율리아가 암이라면, 그거 저한테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율리아가 아픈 것보다는 제가 아픈 게 낫겠습니다.
물론 전에 L신부님을 위해서라면 제가 더 아프겠습니다. 하고 청했던 것은 아직도 유효해요.
대단치도 않은 고통에다 청을 너무 많이 붙여서 괜찮을랑가 몰러요.ㅎㅎ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 아들들, 제 가족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아프게 되는 것보다는 제가 아픈 게 낫습니다. 오늘 저를 화나게 한 신부님을 위해서라면 제가 더 아파도 좋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게 더 나을 테니까요. 저야 뭐 별 거 아닌 사람이지만 사제 한 분 한 분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셔야 하잖아요.
음... 남편 대신이라면 어쩔 거냐구요? 네. 뭐.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좀 더 단단한 제가 아프게 되는 게 낫겠네요.
의미 없는 고통은 없을 거라는 믿음이 위안이 돼요.
아무리 그래도 동생이고 저고 안 아프면 제일 좋아할 거라는 것 잊지는 마시구요.
어쨌든 잘 좀 돌봐 주세요. 저희를 떠나지 마시구요. 안 떠나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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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7일 수요일
학교에 가서 방과후 수업을 세 시간 하고, 병원에 갔다.
먼저 산부인과에 들렀다. 조직검사 결과는 이상 없다고 했다. 자궁내막암은 보통 난소까지 들어내는 데다가, 림프절 전이가 되어서 절제하면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겠다 싶어서 걱정했는데, 한 시름 덜었다.
유방외과에 갔다. 나를 수술하셨던 선생님은 얼마 전에 다른 병원으로 가셨기 때문에, 새로운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 굉장히 착한 미소를 늘 띠고 있는 여자 의사 선생님이다. 5년 전에 수술할 때 레지던트이셨는데, “갈비뼈와 목뼈에 이상이 보이는데, 암세포 때문이라면 말기이구요.”하면서 웃으셨던 분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그 의사 선생님의 티없고 착해보이는 미소가 참 마음에 들었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암으로 나왔네요. 오른쪽은 전절제를 해서 괜찮은데, 왼쪽에 새로 생긴 거네요. 부분절제하고 나서 방사선 치료는 했나요?”
“아니요. 왼쪽은 0기여서 안 했는데요.”
“양쪽에 암이 생긴 경우라서 유전자 검사가 필요하겠어요. 왼쪽도 전절제해야될 것 같네요.“
“이번에도 림프절 절제하고 림프액 통을 차고 있나요?”
‘수술장에서 감시 림프절 검사해봐야 해요. 림프액통 차고 있는 게 아프셨어요?“
“아니요. 전절제해서 너무 아팠어요.”
“어머, 그래요? 그다지 아프지 않은 수술인데, 수술이 잘못되었었나?”
나는 ‘에구, 맙소사. 까무러칠만큼 아팠는데, 별로 안 아픈 수술이라니’하는 생각을 하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안 아프긴요? 5년 전에 저 수술할 때 선생님이 레지던트이셨거든요. 그때도 뼈사진의 검은 부위가 암이라면 말기이구요.하면서 웃으셨어요.”
의사 선생님도 웃으며 말했다.
“어머, 웃어서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요.”
나는 이상하게 그 의사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다. 밝고 착한 성품이 느껴져서인 것 같았다. 이번에 그 의사선생님에게 진료를 받게 되어서 반가웠지만, 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의사 선생님이 있어서 수술은 다른 의사에게 받기로 마음 먹었다.
“저 수술은 선생님이 하시나요?”
“저도 잘 하는데, 원하시면 다른 선생님한테 하셔도 됩니다.”하면서 웃었다.
진료실을 나와서 간호사가 의사선생님을 결정하라고 해서 나는 이 교수님에게 받게 해달라고부탁했다. 간호사는 다음 주 수요일에 진료를 받은 후에 수술날짜를 잡자고 했다. 다시 중증환자 등록을 해주었다.
이 교수님은 마흔쯤 된 남자 의사 선생님이다. 5년 전에 환우카페에 글을 올릴 때, 그분이 올린 글을 몇 편 읽었는데,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백간호사 선생님과 유전자검사에 대해 상담을 했다. 암환자의 5~10%가 유전성 암이라고 한다. 양성 반응이 나온 사람들은 유방암, 난소암, 전립선암에 잘 걸리고, 흔한 암인 경우에는 50~80%가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한다. 양성이 나오면 형제 자매들, 자녀들도 검사를 받아야한다고 했다.
내가 아들만 둘이라고 했더니, 남자들은 전립선암에 약한데, 예방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주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양성반응이 나오면 예방적 수술로 난소제거 수술을 받아야한다고 했다. 동생도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라서, 심난해졌다. 유전자 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오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5년 전에는 많이 슬퍼했었는데, 이번에는 차분하네. 그때 하느님과 행복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기로 했다. 기도는 안 하기로 했다. ㅎㅎ
하느님께 하루 정도는 삐친 척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칫! 기도 안 하고 그냥 잘 거야.’라고 마음 먹었지만, 습관이 무서운지라, 하느님께 이러쿵 저러쿵 종알 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기도한 셈이 되었다.
나도 제법 굳세어져서 하느님께서 예전처럼 정상 이상의 행복감을 주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잘 견딜 수 있게 안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느님 말고 누굴 믿고 이렇게 평화스러울 수 있겠는가.
2011년 8월 18일 목요일
학교에 가서 방과후 수업을 했다.
병가와 질병휴직에 대해 다시 알아보고, 교장, 교감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기간제 교사 구하는 공고를 냈다. 여기 저기 전화 받느라고 바빴다. 피곤해서 쓰러져 자고만 싶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여유가 생겨서 P선생님과 J선생님, E선생님 등과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에서 딱 두 선생님한테 내 신앙체험을 이야기했었는데, P 선생님은 그중 한 명이다.
개신교 신자인 P선생님이 말했다.
“하나님이 책임져야지. 뭐. 그러게 일을 좀 대충해야지. 너무 신경 쓰니까 그렇지요.”
내가 웃으며서 말했다.
“글쎄, 말이에요. 우리 집 생계가 걱정이지요. 나 아는 사람이 천주교에서 세례 받고 냉담하면서, 내 이야기를 듣더니만, 하느님이 앞으로 나를 더 이상 안 아프게 해주면 그때는 하느님을 믿어보겠다고 하대요. 사람들이 나 재발한 거 보고 신앙이 흔들릴까 걱정이네요.”
“그런 걱정도 하지 마세요. 해로워요.”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평화가 바로 표징인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치유만을 보여달라고 고집하지요.”
“맞아요. 교회에서 신앙간증 책자를 보면 다 불치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밖에 없어요.”
“나는 사람들이 내 고통과 죽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고통의 신비에 대해, 내가 짐작하는 나의 소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P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이 조금만 아프게, 얼른 낫기를 기도할 거예요.”
내가 말했다.
“고마워요. 물론 나도 하느님께서 좀 살살 아프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선생님들한테 내 블로그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학교에서 화도 내고 투덜대기도 하고 부족한 행동하기도 했었던 터라, 내 블로그를 알려주었다가는 오히려 하느님을 욕되게 할까 봐 학교에서 딱 두 사람 외에는 알려주지 않았었다.
“며칠 전에 쓴 글도 있어요. 읽어보세요. 글솜씨는 없지만 환우들한테 권해도 좋아요. 위로를 받을 거에요.”
그들이 내 부족함을 기억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저렇게 부족한 사람에게도 직접 사랑을 일러주시고 가르쳐주셨구나’하고 오히려 위로받고 힘을 얻기를 바란다.
L님과 전화를 했다.
“그러게 여기 저기 답글 달고 오만 데 관심 갖고 그러지말고 몸생각을 했어야지.”
“왜 그러세요? 저 몸생각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쌤통이라구요?”
L님이 언성을 높이셨다.
“누가 그런댔냐?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지.”
저녁에 Y선생님이 전화하셨다.
전화할까 말까 고민하셨다고 하셨다.
내가 깔깔 웃기도 하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니까 “하느님 빽이 대단하긴 하네.”라고 하셨다.
8월 19일 금요일
아주 오랜만에 새벽에 눈을 뜨자 마자 5년 전에 아팠을 때의 자잘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재미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뱅글뱅글 웃느라고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침에 블로그를 열어보았더니, 어제 이야기를 같이 나눈 J선생님의 댓글이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만난 당신은 이미 죽음 따윈 두려움도 염려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당신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본래의 목적을 충분히 감당하고 계신 선생님! 잔잔한 감동과 도전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늘 당신 안에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심을 삶으로 보여주실 시간들을 기대합니다.~ 샬롬!!!”
카타리나가 전화를 했다.
“자긴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나는 어젯밤에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오드만.”
K선생님과 L님과 내가 궁금해하고 기다리던 발표가 있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 청은 세 가지였다. 00님과 00님과 00을 위한 기도를 했었다. 내가 더 아파도 좋으니 청을 들어주십사 했었는데, 진심이었는데, 그토록 간절했는데, 교회를 위한 청이었는데, 세 가지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K선생님에게 전화했다. 같이 많이 속상해하고 투덜댔다. K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글쎄. 어떡하냐? 세상에. 참 너무하신다........”
“정말 걱정되네요. 하느님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쩔 수 없다시잖아요? 제가 L님에게 ‘레지나가 수술하게 되었는데, 고통 봉헌하면서 기도해드린다고 힘내시라고 전해주세요.’라고 했어요.”
K 선생님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제 자기랑 전화 끊고 얼마나 눈물이 나든지...두 시간은 운 것 같아. 전에는 미처 모르는 상태에서 아팠지만. 이번에는 뻔히 얼마나 아플지 알면서 기다리는 거잖아. 그 맘이 오죽할까 싶어서 너무 가슴이 아픈 거야. 예수님도 당신의 고통을 미리 알고 계셨잖아. ”
나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위로했다.
“아이고. 선생님. 저도 안 울고 우리 식구 아무도 안 울었는데. 울지 마세요. 우찌된 게 내가 위로를 해줘야한다니까요. 역할이 바뀌었잖아요. ”
여러 친구들한테 전화를 받았다.
참 소문도 빠르다. 하긴 내가 철딱서니 없이 동네 방네 광고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예감이 꼭 아프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내 마음가짐을 글로 써서 알렸었다.
인터넷으로 유전자 검사에 대해 검색하다가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2기의 조기 유방암이라 할지라도 근치적 유방절제술 후 액와 림프절 전이가 없는 경우는 20%, 액와 림프절 전이가 있는 경우는50% 이상에서 재발이 이루어지며 대부분 3년 이내에 재발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전이된 액와림프절 수가 4개인 경우 재발률은 60%, 10개 이상인 경우는 70% 이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액와림프절 전이가 없다 할지라도 암의 크기가 2cm 이상, 환자의 연려기 35세 이하인 경우 또는 호르몬 수용체가 음성인 경우 재발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방암은 뼈, 폐, 뇌나 간에 전이를 잘 일으킵니다. 이와 같이 전이를 잘 일으킨 전이성 유방암의 증상은 폐 전이가 있을 때는 호흡곤란, 뼈 전이가 있을 때는 통증, 뇌 전이가 있을 경우는 신경의 이상 증상 그리고 간 전이가 있을 경우는 식욕감퇴 등이 나타날 수 있으나, 마지막 수개월 전까지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울 사는 친구 T가 전화했다.
“5년이 지났는데도 재발하기도 하니?”
“음. 원래 유방암이 재발율이 높은 암이야. 다른 암은 5년을 완치로 보는데, 유방암은 10년이거든. 유방암 2기도 재발율이 20% 이상이라네. 나도 그렇게 높은 줄 몰랐었는데. 대부분 3년 이내에 재발한다는데, 나는 5년 버텼으니까 선방했네. 전이가 된 건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다음 주 진료 받을 때 내가 갈게.”
“뭐하러? 나 그날 수업 다하고 병원 가서 이런 저런 상담하고 엄청 피곤할 텐데. 오지 마라. 니가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럼 수술 받을 때 갈게.”
T는 5년 전에 말기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전절제에 림프절 절제로 수술 범위가 정해진 후에 병문안을 와서 기도해주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못 오게 했었는데, T는 서울 살아서 본 지가 꽤 오래 되어서 오라고 했었다. 핸드폰 장난하면서 여유있게 버티고 있었는데, T가 소리내서 기도해주는 바람에 서러워져서 울었던 기억이 났다. ‘
'또 스타일 구겨지면 안되는데.’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 또 니네 성당 신자랑 같이 와서 기도해줄라고?”
“아니~ 그냥.”
친구이자 대녀인 비아한테서 문자가 왔다.
“전화 통화하는 것이 많이 걱정된다. 내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아.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았어....”
바로 전화를 넣었다.
“왜 니가 잠을 못 자? 나는 잘 자는데. 걱정하지 마라.”
친구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니는 걱정도 안 되냐? 어제 한숨도 못 잤다. ”
“야. 우리 식구 아무도 안 울었는데, 왜 니가 우냐? 내가 시시각각 상황보고 할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너 수술할 때, 문0이랑 올라갈게.”
“됐다 됐어. 여기가 어디라고 그 멀리서 와. 내가 이제 백수니까 방학 때 내려갈게.”
“아니다. 우리가 갈게”
“그래. 그럼 겨울 방학 때 놀러 와라.”
‘이거야 원. 입장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네. 내가 많이 비정상인가?’
‘걱정해주는 친구들한테 많이 미안할 지경이네.’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카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간호하느라 힘들 것이다.
“내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암은 아닌데, 중등도 이상의 증식 세포가 나왔다고. 수술을 해서 떼어 낸 다음에 그 조직을 다시 검사해보자고 하던데. 수술은 해야 된다고 해.”
“글쎄. 비행기표 그냥 취소하는 게 좋겠다. 내가 유전자 검사 하게 되면 결과가 두 달 후에 나온다는데, 그때 양성이면 너도 검사해야할 테고. 너도 또 양성이면 유방암 발병률이 85%까지 높아지니까. 예방적 차원에서 전절제 수술을 하는 게 낫다는데. 그래도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이참에 수술로 이상 부위 떼어내고 조직검사를 다시 정확하게 받아봐야겠지? 큰일이네. 미국 갔다가 두 달 후에 다시 들어올래? 아님, 그냥 수술 받을래? 그 병원은 진단만 하고 수술을 안하니까, 진료 의뢰서 끊어주면 나 다니는 병원에서 같은 날 수술 받고 같은 병실 입원하면 좋겠네. 근데, 토마스는 누가 보냐? 암튼, 낼 진료예약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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